소설리스트

#96 (96/106)
  • #96

    늦은 오후, 미카엘과 루이스 던스트는 당황한 시선을 서로 교환했다. 두 사람의 손에는 하나씩 각기 다른 편지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헤데스타드 황궁에 심어 둔 첩자로부터, 다른 하나는 왕실에서 보내온 공식 서신이었다. 두 편지 모두, 황제 대리 사절단의 불시 방문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지금쯤 스카보르 검문 게이트를 넘어서고 있을 겁니다.”

    “자동차를 들여왔을 줄은 몰랐군요.”

    미카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차로 오는 것이라면 첩자의 전보가 최소 하루는 더 빨랐을 터였다. 루이스가 허를 찔린 얼굴로 새 주인을 보았다.

    “차주 즈음 카일렉 님의 형 집행이 공표될 거란 말이 있었습니다.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뭔가 캐내려는 것일까요?”

    “황제의 방문 시 사흘간 연회가 열리는 게 관례라고 했었죠.”

    “맞습니다. 황제 대리는 제국법 제정을 제외, 다른 권한은 황제와 동일하게 부여되니까요.”

    “그럼 사흘의 연회 중 두 번째 밤…… 아니, 오늘 밤 바로 시행하는 게 어떨까요.”

    미카엘의 제안에 루이스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늘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다소 무리하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 바로 준비하고 대비하겠습니다.”

    루이스는 신속히 체임버를 나가 헬퍼들을 소집했다. 이르면 내년, 전 황제의 애도 기간이 끝나기 직전 실행하려 했던 계획을 두 달이나 앞당기게 되었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헬퍼들은 이 또한, 대의를 위한 신의 뜻이라 받아들였다.

    * * *

    미카엘은 침실 문의 자물쇠를 하나씩, 총 일곱 개를 풀고 안으로 들어섰다. 홀처럼 드넓은 방은 황후의 방 못잖게 화려하고 웅장했다. 하지만 실내에 감도는 정적과 무거운 공기 때문에, 누군가가 기거하는 방이라기보다는 장엄한 장례식장 같은 분위기였다.

    그는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침대로 향했다. 앤지는 병자처럼 창백한 낯으로 잠들어 있었다. 붕대를 감은 팔이 인형의 것처럼 힘없이 침대 아래 늘어져 있다. 쇠약해지다 못해 처연한 낯이 정교하게 빚어진 밀랍 인형 같았다.

    미카엘은 머리맡에 앉아 환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러운 대공의 방문에 앤지를 어디에 숨겨야 할지 난감했다. 별관 지하로 옮기는 게 나을까?

    고심 끝에 결국 이대로 두기로 결정을 내렸다. 건물의 외관 구조상, 예배당의 부속 첨탑처럼 보이는 이곳이 역시 제일 안전할 것 같았다.

    “앤지…….”

    시타델에 보낸 첩자로부터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늦어도 며칠 안에는 답변이 올 터였지만 심증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노아는 그녀와 카일렉 사이의 아기가 틀림없었다.

    그는 앤지의 이마 위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주려다 멈칫, 손을 거뒀다. 차라리 이렇게 자고 있을 때가 낫다. 깨어나면 그를 또 괴물 보듯이 노려보겠지. 보석처럼 아름다운 초록빛 눈동자가 제 심장을 베어 낼 때의 아픔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

    진저리가 처졌다. 이러다 언젠가 그 눈동자를 찔러 버리게 될까 봐 두려웠다. 두 눈을 멀게 만들고, 다음에는 사지를 못 쓰게 훼손한다면……. 그때는 그에게 의지하게 되며 마음을 열게 될까.

    정 안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앤지.

    만약 그녀의 아기를 제물 삼아 불멸을 얻게 되면, 최소한 앤지보다 조금 더 오래 살게 되면 더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그녀보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살아야 생의 마지막까지 보살펴 줄 수 있을 테니까.

    앤지, 안됐지만 아이의 존재는 잊어. 넌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게 되겠지만……. 빈터가르에서 잘 살고 있다고 막연한 희망을 품게 되겠지만, 어차피 영원히 이별해야 할 테니 차라리 기억에서 지우는 게 낫잖아.

    그녀는 영원히 여기 갇혀 있어야 한다. 빈터가르에도, 시타델에도, 함께 살던 아미티지 가에도, 친척 할머니가 있던 레반 마을에도, 어디도 갈 수 없었다. 그들 중 누구도 다시는 만날 수 못할 것이다.

    -괴물. 너는 네 조부, 존 피츠로이 블랙웰과 똑같아. 괴물이야.

    앤지의 비난이 귓가에 재생되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다들 그를 비난하는 것인지. 선대 공작의 죄라면, 스스로를 거룩한 의식의 실험체로 기꺼이 바쳐서 결국 언데드로 화한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음지의 혈육으로서 그를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최후를 지켜 주었다.

    존 피츠로이는 인간 본연의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다. 무소불위의 권력과 절대적인 부(富)를 쥔 자라면 누구나 불멸을 꿈꿀 터였다. 그래서 그에 반하는 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헬퍼였던 글렌 애덤스와 제롬 해밀턴, 심지어 카일렉과 죽은 부친까지도.

    레머디. 갓난아기. 무고한 생명의 순수한 피. 그 모든 과정이 기괴한 기행이며 비윤리적인 죄악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떻단 말인가. 인간 자체가 결국 악에 가까운 존재이며, 그들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며 진화해 온 궁극적인 목적은 신의 영역을 넘어서기 위해서가 아닐까?

    전쟁 후 빈터가르를 중심으로 대륙에 산업 혁명과 과학의 신기술이 도래하며, 전기와 자동차, 대규모 공장과 기선이 생겨난 것도 결국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끝없는 도전이 아니냔 말이다. 좀 더 편리한 문명의 도약을 꾀하는 것, 그 문명을 좀 더 오래 누리며 영생을 위한 첫걸음의 선구자가 되는 것. 둘 사이에 무엇이 다를까.

    미카엘은 의자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기 전 머뭇거렸다. 앤지의 손발을 묶어 놓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창문의 걸쇠를 일일이 확인한 뒤 커튼을 내려 고리를 사슬로 고정시켰다.

    미카엘은 침대를 한 번 더 돌아보고 방을 나섰다. 철컥, 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하나씩 다시 잠기는 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방 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러나 커튼의 틈새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한 줄기 석양빛 덕분에, 완전한 암흑만은 피할 수 있었다.

    앤지는 눈을 떴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문에 귀를 대고 미카엘이 멀어진 걸 확인했다. 그리고는 벽장문을 열고 하얀 래커칠을 한 궤짝을 옆으로 밀었다. 가려졌던 벽에 움푹 팬 홈이 있었다. 미리 약속한 대로 두 번, 그리고 세 번 두드리자 벽이 뒤로 밀리며 메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네트.”

    “앤지 언니, 괜찮아? 지금 저택에 난리가 났어. 한 시간 안에 황제 대리 전하가 올 거래. 불시 방문이라나 봐. 그래서 다들 환영 만찬이다 뭐다 정신이 없어서 나도 빨리 가 봐야 해.”

    “황제 대리 전하……? 윈스턴 대공 말이지? 갑자기 무슨 일로?”

    “그것까진 모르겠어. 지금 반대쪽 선착장에 사절단을 태울 배가 열 척 넘게 대기 중이거든. 마을 사공은 다 집합시킨 것 같아.”

    아네트의 말에, 앤지의 눈이 반짝였다. 반쪽이 된 얼굴이 잠시나마 환해진 순간이었다. 두 여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속삭였다.

    “어쩌면 기회가 아닐까?”

    “절호의 기회야.”

    앤지가 먼저 말을 이었다. 그녀는 아네트의 등 뒤를 연신 살피며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대공이 오면 만찬이 열리겠지? 최소 며칠은 머물다 갈 테니 이쪽에 정박해 둔 배들은 그대로 있을 거고……. 경비가 아무리 삼엄해도, 배가 수시로 오가게 되면 그 틈에 끼어 저쪽으로 넘어갈 기회도 생기지 않을까?”

    “나도 같은 생각이야. 기회를 봐서 다시 올 테니까 신호에 맞게 두드리면 열어 줘.”

    “알았어. 조심해, 아네트.”

    “응. 걱정 마. 이 비밀 통로는 아무도 모르니까.”

    아네트는 머리를 바짝 숙인 채 왔던 길로 돌아 나갔다. 앤지는 그녀가 차디찬 나선형 돌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참 뒤 발소리가 마침내 사라졌을 때에야 벽장 문을 닫았다.

    테이블 위의 트레이 커버를 올리자 갓 만든 음식이 바구니에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프와 밀크 롤, 스콘, 레몬 딜 버터에다 각종 과일 잼, 정성껏 뼈를 발라낸 그릴드 피쉬와 새우, 송아지 고기, 신선한 달걀과 과일 샐러드, 커스터드 러스크와 라벤더 차까지 화려한 성찬이었다.

    스푼은 있었지만 나이프와 포크는 없었다. 음식도 접시 대신 종이에 싸서 나무 바구니 안에, 스프는 빵으로 만든 보울에 빠네처럼 담겨 있었다. 찻잔 역시 깨지지 않는 은 소재로 만들어져 있다. 자해를 꾀하거나 슬쩍 숨겨 뒀다 무기 삼아 공격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함일 것이다.

    앤지는 테이블에 앉아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리고 빵을 뜯어 스프를 찍어 먹고 한 입씩 잘린 고기와 생선도 열심히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종이를 씹는 것처럼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목이 메고 숨이 막혀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지만 꾹 참고는 최대한 삼켰다.

    체력을 비축해야 돼. 오늘 밤이 기회야.

    연회로 시끌벅적한 틈을 타서 달아나야 한다. 오늘이 아니면 앞으로 기회는 영영 없을지도 몰랐다. 노아를 생각하자 두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카일…… 아직 무사하겠지. 만약 형이 집행되었다면 미카엘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녀를 확실히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그의 죽음을 밝힌 뒤 수도로 향했을 것이다.

    아직은 무사할 거야. 분명히…….

    앤지는 빵이 들어 있던 바구니를 뒤집어 촘촘하게 얽혀 있는 나무 단면을 뜯어냈다. 바짝 힘을 주느라 손톱이 뭉개지고 긁혀서 피가 났지만 이 악물고 참았다. 간신히 조각 하나가 뜯겨 나왔다. 가장자리가 날카로워 마음먹고 찌르면 작은 상처나마 가할 수 있을 듯했다.

    신발 바닥 밑에 숨기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미카엘이 방 안에 신을 한 켤레도 남겨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머리 묶는 헤어넷 안에 조각을 숨기고 그대로 잠옷 주머니 속에 넣었다. 부디 쓸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반드시 쓰여야 한다면, 제발 적시에 잘 활용되길 빌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