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 (95/106)
  • #95

    무사히 살아만 있어 줘, 앤지. 그거면 되니까. 그거면…….

    미카엘은 오랫동안 그녀에게 흑심을 품어 왔다. 그의 조건에 따라 결혼한 것과는 별개로, 그 감정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테 데움에 데려가 잡아 둔 것이겠지. 그래서 죽이거나 해치진 않을 터였다. 함부로 다루거나 아프게 하는 일은 없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도 기묘한 불안감이 심장을 부여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동안 가문의 종으로 묵묵히 충성했던 미카엘 랜들. 3년 전 언데드가 된 제 조부의 목을 베고 불에 태운 아버지의 또 다른 아들.

    후자 쪽이 그의 실체임이 틀림없었다. 한없이 선해 보이는 보랏빛 눈동자. 그 뒤에 도사린 무광(無光)의 심연. 아직 실제로 접해 본 적 없는 그 불길한 어둠이 자꾸만 심장을 파고들어 왔다.

    앤지. 제발…… 무사히 버티고 있어 줘. 금방 갈 테니까.

    그는 피로 얼룩진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이마를 감쌌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앤지만은 무사히 구해 낼 것이라는 결심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녀만 무사할 수 있다면. 누구든 기꺼이 살육하고 파괴하며 멸할 것이다. 세상 전체가 눈앞의 피바다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 * *

    던스트 부인의 발소리를 듣자마자 앤지는 쇼크 상태에서도 신속히 움직였다. 아네트를 재빨리 벽장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으려 했지만, 하필 이음쇠가 중간에 끼어서 잘 닫히지 않았다.

    “아네트, 잠깐만 있다가 조용해지면 그쪽으로 돌아가.”

    그녀는 이불을 이네트 쪽으로 집어던져 반쯤 드러난 아네트의 몸에 뒤집어씌웠다. 그리고는 의자를 집어 들어 창문으로 던지는 등, 최대한 주의를 흩트리기 위해 방을 어지럽혔다. 와장창, 유리창과 꽃병이 깨지며 파편이 이리저리 튀었다. 그제야 자물쇠가 하나씩 풀리고 문이 덜컥 열렸다.

    “이게 무슨…… 대체 웬 소란이지?”

    제때 들어온 루이스 던스트가 기가 찬 얼굴로 방을 둘러보았다. 앤지를 보는 눈은 매서웠지만 다행히 벽장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또 달아나려 했구나.”

    앤지는 말없이 숨을 씨근덕거리며 부인을 노려보았다. 루이스가 다가와 앤지의 뺨을 세게 때렸다. 여자인데도 힘이 엄청났다. 앤지는 뒤로 밀려나 카펫 위에 풀썩 쓰러졌다. 팔이 바닥에 쓸리는 순간 섬찟한 통증이 일었다. 깨진 유리창 조각이 팔목에 꽂혀 있었다.

    “또 난동을 부렸나요?”

    문 뒤에서 또 다른 여자도 들어섰다. 시종장 야스민이었다. 며칠 전 기억에 앤지가 움찔 떨었다. 그녀는 미카엘이 마을에 가고 없는 동안, 식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그녀의 목을 조르고 거구의 몸을 위에서 눌러 꼼짝 못 하게 제압했었다.

    저택의 헬퍼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예전의 친절하고 지각 있던 사람들은 죄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똑같은 가면을 뒤집어쓴 가짜들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

    “당신들은 미쳤어, 전부 다…… 인간이 아니야! 짐승들이야!”

    그때 미카엘이 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야스민이 흠칫 놀라 방 밖으로 물러섰다. 그는 카펫에 나동그라진 앤지를 보고 찌푸린 얼굴을 던스트 부인에게 돌렸다. 보랏빛 눈이 어느새 그녀 코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루이스. 앤지에게 손을 댔나요?”

    “네, 또 엉뚱한 생각을 했길래 주의를 주는 차원에서 벌을……”

    루이스의 말문이 순식간에 막혔다. 미카엘이 그녀의 뺨을 후려친 순간, 그녀도 넘어질 뻔하다 벽에 한 손을 짚고 버텼다. 그가 가면이 벗겨진 채 집사장을 향해 거칠게 으름장을 놓았다.

    “저 여자에게 손대지 마. 내 거니까. 죽이든 살리든, 고통을 주든 모두 나만 할 수 있어.”

    “……죄송합니다, 미카엘 님.”

    루이스는 시선을 내린 채 순순히 사죄했다. 미카엘이 크게 숨을 들이쉰 뒤 고개를 바짝 기울였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끼어들지 마세요, 루이스. 천천히 길들여 가는 중이니까.”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돌아서서 나갔다. 방문이 닫히고 나서도 앤지는 망연자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뺨을 얻어맞은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머릿속에 노아가 가득했다. 노아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에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가, 미카엘이 무릎 꿇고 앉아 팔을 잡는 순간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거 놔! 저리 가…….”

    “가만있어! 유리 조각을 빼내야 하니까 움직이지 마.”

    유리 파편이 박힌 팔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앤지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렀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녀 몰래, 그녀의 아기를 의식에 쓰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악마 주제에. 어떻게 감히. 제 몸에 손 닿는 게 끔찍할 만큼 싫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도,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치 떨리게 거부감이 일었다.

    “이거 놔!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앤지가 분노로 형형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노아에 대해 언급을 할 순 없었다. 그럼 제 입으로, 노아가 카일과 그녀 사이의 아이가 맞다는 걸 스스로 확인해 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노아는 괜찮을 것이다. 빌렘 아저씨와 마르틴, 브린이 절대 이 악마들에게 틈을 허용하지 않고 철저히 지켜 줄 거라 믿었다.

    “괴물…… 괴물이야. 너는. 모두가 미쳤어. 신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너희 모두!”

    “앤지…….”

    미카엘이 또다시 상처받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발 내 손끝에 닿지도 마. 너와 닿느니 차라리 유리에 찔려 죽는 게 나으니까.”

    앤지가 숨을 씨근거리며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한동안 누르려고 애써 온 증오와 경멸, 두려움과 경계,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그녀의 눈에 드러났다. 그 시선은 오롯이 미카엘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새삼 처음으로 이터니티의 부작용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그의 남성이 정상이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랬다면, 이미 셀 수도 없이 그에게 범해졌을 것이다.

    직접적인 관계 대신 다른 변태적인 짓을 하진 않을까, 극심한 공포감에 사로잡히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럴 경우 자신만 더 비참해질 뿐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제 벗은 몸을 보면 본능이 요동쳐서 자제할 수가 없는데, 정작 몸은 반응하지 않는다는 패배감과 자괴감에 휩싸일 게 두려워서.

    성적인 변태 행위 대신 구타와 폭력을 일삼긴 했어도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여자로서 안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에 대한 살의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제발 정신 차려, 미카엘. 그렇지 못할 바엔 차라리,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쳐서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어떻게 감히 노아를. 그 짐승만도 못한 열망을 이루기 위해 내 아이를 희생시키려 하다니.

    “그래……?”

    미카엘의 입매가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앤지의 손목을 다시 움켜잡았다. 밀어내고 밀치고 버둥거리길 잠깐, 그가 그녀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앤지가 악, 비명과 함께 뒤로 쓰러지자 미카엘은 그 위에 올라타 팔을 거칠게 잡았다.

    그리고 빼내려고 했던 유리 조각 끝을 잡고 반대쪽으로 꾹 밀었다. 날카로운 파편이 살 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앤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몸속의 장기가 끊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처절하고 괴로운 비명이 방 안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파편은 천천히 밀려 들어오다 혈관을 건드리기 직전 멈췄다. 앤지의 비명도 멈췄다. 파들파들 떨던 몸도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제야 미카엘이 거친 숨을 내뱉고 조각을 당겨 빼냈다. 피가 튀어 올랐다. 얼굴이며 옷, 여기저기가 피투성이가 됐지만 아랑곳 않고 앤지의 상처에만 집중했다.

    그는 원래 치료해 주려던 대로, 파상풍용 소독약과 붕대로 임시 처방을 했다. 이내 의사와 메이드가 호출되었다. 짧고 잔혹한 소란이 끝난 후에야 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홀로 남은 미카엘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시체처럼 누운 앤지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붕대를 칭칭 감은 팔, 붉게 부어오른 양 뺨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망각제를 만들어 볼 방법은 없을까. 차라리 리셋되어 버리는 게 우리 둘 다를 위해 최선일 텐데…….

    아네트는 벽장에 처박혀 덜덜 떨었다. 몇 번이나 이불을 젖히고 앤지에게 달려가려 하다가 그러지 못했다. 두려웠다. 미카엘이 너무 무서워서 숨도 쉴 수 없었다. 들키는 순간 그 자리에서 살해될 것만 같았다.

    앤지 언니, 미안해. 하지만 어떻게든 도와줄게. 여기서 탈출할 수 있도록……. 나도 이 무서운 곳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아. 함께 달아나자.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줘…….

    소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문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숨을 죽였다. 소리가 새어 나갈까 무서워 울지도 못했다.

    다음날 새벽, 공작가 주치의인 글렌 애덤스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얼마 전 죽은 샬럿 랜들처럼 사인은 식중독이었고, 시신은 예배당에 조용히 안치되었다.

    임시 가주이자 공작 대리인 미카엘은 간단한 조의로 안타까움을 표했다. 던스트 부인은 사흘 뒤 장례가 치러질 예정이며, 조만간 수도에서 다른 의사가 배정되어 올 것이라 알렸다. 헬퍼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테 데움은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늘 그랬듯, 호수 한가운데 자리한 고성은 지루할 만큼 평화롭고 고요했다. 12월의 겨울은 아직 안온했으며 저택을 둘러싼 호수만이 얼음처럼 차디찰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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