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 (94/106)
  • #94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벌써 나흘이나 낭비했어. 그동안 앤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카일이 침상에서 이를 악물며 숨을 골랐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혼자서라도 떠나고 싶었다.

    “그나마 차로 가게 되어 다행입니다. 대공이 지난주 아제르반에서 왕실용 가솔린 자동차를 멋대로 들여와 매우 들떠 있는 모양이에요.”

    카일을 호위 겸 방패 삼아 옆자리에 태울 것이다. 윈스턴은 그를 여전히 믿지 않았다. 제롬은 심란한 얼굴로 도련님의 이마에 다시 물수건을 대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어디서든 피를 공수해 수혈이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수도 없다. 도련님의 반대가 아니더라도, 컬리넌 섬에서처럼 서로 체질이 잘 맞는지 생체적인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만약 혈액이 맞지 않으면 더한 변이와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었다.

    “제롬. 난 괜찮으니까 빈터가르 쪽에 접선해 계획에 차질이 없는지 알아봐.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계획은 빈틈없이 잘 이행될 겁니다. 염려 마세요.”

    약이 돌기 시작하는지 카일의 눈이 조금씩 감겼다. 제롬은 그가 잠든 걸 확인하고 조용히 의료실을 나섰다.

    * * *

    카일의 의식이 돌아온 것은 의료실의 경비를 관리하는 감독관이 방 안에 들어왔을 때였다. 하지만 자는 척 눈은 뜨지 않았다.

    남자는 전쟁 전 절대 군주 시절, 관록이 깊은 고문 전문가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탑에서 카일에게 십자가식 고문을 가하라 지시했던 사람도 그였다. 불혹이 넘은 사내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깝군, 좀 더 데리고 놀 수 있었는데.”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침상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약 기운에 깊이 잠든 듯, 공작이 미동도 않고 누워 있었다. 창백하리만큼 투명한 옆 선이 그림 속 조각처럼 고아하다. 남색가인 사내의 가슴이 뛰었다. 눈이 멀 만큼 매혹적이었다.

    공작은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었다. 단 한 번도 접한 적 없는, 비범하고 특별한 청년이기도 했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땐 한없이 유약해 보이다가도, 눈을 뜨면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차디찬 날카로움을 갑옷처럼 두르곤 했다. 제왕의 카리스마에다 남녀노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어쩐다. 이대로 보내기엔 너무 아까운데…… 역시 이 약을 써야겠어.”

    그가 품에서 약병을 꺼내 물 잔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공작이 굳이 대공의 도구로 쓰일 필요는 없으리라. 어차피 대공이 노리는 건 블랙웰 가문의 광대한 재산과 영향력일 터, 공작 자체를 원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장난감으로 좀 데리고 놀아도 되지 않을까.

    약이 물 잔 속 수면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사지를 서서히 마비시키는 맹독이었다. 오늘 안에 한쪽 팔이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대공은 쓸모가 없어진 공작을 다시 돌탑에 돌려보낼 것이며, 그럼 다시 제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카일은 더 자는 척할 수가 없었다. 이번엔 흉부의 격통 대신 극심한 현기증이 일었다. 머릿속이 급격히 소용돌이치며 호흡이 딸려 버틸 수가 없었다. 심장통에 이은 빈혈이 이터니티 부작용의 또 다른 증상이었다.

    그가 기침을 몇 번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를 노려보았다. 고문관은 당황하다 피식, 실소를 지으며 한 발짝 물러났다. 자신이 물에 약을 타는 건 보지 못했을 터였다.

    “저런, 기침이 심한데 물이라도 드시죠, 공작 전하.”

    그가 뻔뻔스럽게 물잔을 건네자 카일은 묵묵히 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시야의 초점을 바로잡으려고 애썼다. 전신의 세포가 일제히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몸속의 무언가가 피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며칠째 물 한 방울도 흡수하지 못해 체내가 바짝 말라 가는 듯 버석거리는 느낌이었다.

    카일은 물잔을 잠시 협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사내를 향해 오만하게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좀 봐 주겠나. 눈에 뭔가 들어간 것 같은데.”

    남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그러죠.”

    “고맙군. 자네 이름이 뭐였지……?”

    “에단입니다. 에단 하노버.”

    귓불이 벌게진 사내는 공작의 얼굴에 가까이 제 낯을 가져갔다. 그래서 뭔가 빠르게 스쳐 가는 느낌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한순간이나마 방심한 대가는 컸다. 너무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라 방어할 틈도 없었다. 옆구리에서 뽑혀 나온 검은 그의 옆구리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허리춤의 칼집이 아니라 살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큭……! 커헉…….”

    사내는 고통에 못 이겨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신음을 토해 냈다. 자신이 환자에게 기습을 당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눈이 불그스름하게 충혈돼 있었다. 카일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고문관이 무릎 꿇은 채 일어서서 반격하려 할 때였다. 카일이 두 손에 무게를 내리 싣고 검을 한 번 더 휘둘렀다. 이번엔 처음처럼 빠르지 않았다. 검의 무게 때문에 가벼울 수가 없었다. 둔탁한 움직임 끝에, 고문관의 팔 한쪽이 어깨에서부터 분리되며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으아아악, 남자가 끔찍한 괴음을 토해 내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카일은 잘라 낸 팔을 구석에 던져 버리고 검신에 묻은 피를 천천히 핥았다. 핥다 못해 피에 굶주려 입 안으로 정신없이 흘려 넣는 모습이었다. 잃었던 기력이 돌아오며 이성과 의식이 명료해지고 있었다.

    “재밌는 얘기를 하나 해 줄까, 에단.”

    카일이 검에서 혀를 떼고 여상하게 말했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에 젖어 있었다. 얼굴과 머리, 환자복과 가운까지 붉지 않은 곳이 없었다.

    “스톤 타워에서 그랬지. 블랙웰은 대대로 남의 생피를 빨아 먹는 흡혈귀 공작가란 소문이 있다고…….”

    그가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파랗게 불타는 두 눈은 인간의 것 같지가 않았다.

    “헛소문이 아냐. 그 말이 맞으니까.”

    사내의 다른 쪽 팔도 순식간에 절단되었다. 엄청난 힘이었다. 울부짖음과 몸부림에, 복도 쪽에서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카일은 숨을 고르고 그의 목덜미를 쥔 채 벽난로로 질질 끌었다. 그리고 타닥타닥, 혀를 날름거리는 불길 속에 그의 머리부터 밀어 넣었다. 화염은 그의 혼이 담긴 부위를 냉큼 삼켰다. 방 전체를 무너뜨릴 기세로 울리던 비명도 그제야 멎었다. 방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이, 이게 무슨…….”

    비명을 듣고 달려온 근위대와 제롬, 마침 그를 살펴보러 온 대공까지 문 앞에 돌처럼 서 있었다. 피바다가 된 의료실, 머리가 벽난로에 처박혀 몸통을 벌레처럼 꾸물거리는 남자, 그리고 피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공작. 모두 혼이 빠진 얼굴로 방 안의 광경을 목도하고 있었다.

    “먼저 습격을 당했습니다.”

    카일이 차분하게 말했다. 애써 위악을 떨 필요도 없었다. 테 데움에 제 여자를 잡아 둔 서자 새끼에게 남색가 고문관을 이입시키니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의 절반이 본래 악이었다. 이성과 분별력이 그 잔혹한 면모가 발휘되지 않도록 잘 제어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갓난아기를 보면 다들 그 귀여움과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어여삐 여긴다. 그러나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에 따라, 바로 다음 순간 그 순진무구한 눈빛을 향해 칼끝을 들이밀 수 있는 악마가 바로 인간이란 존재가 아닌가. 심지어 제 자식에게조차.

    “내 고문관을 이리도 처참히…….”

    “날 죽이려 했습니다. 혹 대공 전하의 생각이셨습니까? 마음이 바뀌신 건가요?”

    “무슨 소리! 그런 적 없어. 경이 평소 적이 많으니 무언가 원한을 산 것이겠지. 뭐, 이 일로 문책할 생각은 없으니……. 처리해.”

    윈스턴은 혀를 차며 근위대에게 턱짓해 보였다. 제롬이 재빨리 주인에게 다가가 그의 피 묻은 얼굴을 닦아 주었다. 윈스턴이 비위가 상해 더는 못 있겠다는 듯 문지방을 넘어섰다.

    “이젠 제법 멀쩡해 보이는군. 내일 예정대로 출발해도 이의는 없겠지? 친위대 장교복과 필요한 물품은 준비해 줄 테니 제대로 위장하고 나오게.”

    “그러죠. 기꺼이.”

    그 선선한 대답에 윈스턴이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검붉은 피바다 속에서도 빨려 들 듯 맑은 눈으로 저를 보는 남자가 섬뜩했다. 흡사 죽음의 사자 같았다.

    대공이 그러거나 말거나, 카일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바닥의 피바다와 시체를 치우는 기병들을 차분히 훑었다. 그 초연한 가면 속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앤지. 조금만 기다려. 곧 데리러 갈 테니까…… 제발 살아만 있어.

    미카엘, 그 개새끼에게 무슨 짓을 당했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미 수없이 범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듯 조여 왔다. 갈기갈기 난도질당하는 아픔은 부작용의 재발과는 무관한 고통이었다. 이복형제를 향한 살의로 몸이 통째로 연소해 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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