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 (9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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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가의 오랜 주치의, 글렌 애덤스도 헬퍼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이터니티에 대한 그의 생각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다른 양상을 띠어 갔다.

    나이가 들어 가며 영생을 더욱 집요하게 추구하는 루이스 쪽과 달리, 그는 블랙 매스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레머디 수급 및 수혈에 적극 임했지만 선대 공작의 언데드화, 에드워드의 참혹한 말로를 보면서 생각이 바뀐 것이다.

    “루이스. 그에게는 가망이 없어. 지금이라도 아가씨들을 마을로 돌려보내고, 이곳을 제2의 컬리넌 섬으로 만드는 걸 멈추게.”

    글렌은 집사장을 향해 신랄하게 말했다. 중년 부인은 늘 그렇듯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하지만 내심 착잡한 심경이었다. 미카엘이 남자구실을 못해 후사를 갖지 못한다면,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터니티의 완성을 기대할 수 없다면, 서자인 그를 차기 공작으로 떠받들 이유조차 없었다.

    카일렉을 너무 일찍 포기한 것은 아닌지, 그의 교수형을 가속화할 거짓 증언을 보낸 것이 새삼 후회스러웠다. 그가 이터니티에 관심이 없다는 건 늘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죽은 레티샤와도 지난 3년간 부부 관계가 손꼽을 만큼 드물거나 아예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레티샤와 샬럿 모두 쓸모가 없었기에 처리했지만, 미카엘까지 회복될 가망이 없다면…….

    “그럴 순 없죠, 글렌. 안타깝지만 카일렉 님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요. 황제 시해와 모반죄에다 윈스턴 대공 전하가 단단히 벼르고 있었을 테니.”

    카일렉의 형이 집행되면 다음 타겟은 윈스턴 공과 유명무실한 그의 본처, 정부와 그녀가 낳은 아이들 차례일 수 있었다. 왕실이 와해되면 국가의 막대한 채무를 블랙웰가 재산으로 탕감해 줄 수 있으리라. 그럼 다음 수순은 뻔했다. 미카엘을 내세워 블랙웰 가문이 진짜 실세가 될 수도 있다.

    “치유 방법이 있을 거예요. 글렌이 어렵다면 해외의 의료진을 초빙해서라도…….”

    “그럴 필요 없습니다.”

    미카엘이 어느새 중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손에 들린 종이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루이스가 서류를 집어 들고 미간을 좁혔다.

    “이건……?”

    “방법이 있으니 더는 내 치유가 문제 되지 않을 겁니다. ……들어와요.”

    그가 중문과 휘장 사이를 돌아보자 초로의 여인이 체임버로 우물쭈물 들어왔다. 갑자기 으리으리한 귀족가의 저택에 불려와 영문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산파입니다. 하인리히가 데려왔죠. 아까 살펴본 여자의 몸 상태에 대해 직접 말하세요.”

    미카엘의 지시에 여인은 허리를 숙이곤 말문을 열었다. 다들 제 검증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한 듯, 말이 술술 새어 나왔다.

    “네. 제가 면밀히 살펴본 결과, 아가씨의 몸에는 출산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뜻밖의 사실에 글렌과 루이스 둘 다 깜짝 놀랐다. 여인은 두 손을 모으고 강조하듯 덧붙였다.

    “마을 의사를 도와 산모를 보살피는 일을 30년간 해 와서 그런 쪽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았다고? 어림짐작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보였는가?”

    루이스가 여인에게 바짝 다가와 물었다. 여인은 움찔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마을 토박이인 하인리히가 허투루 데려왔을 리 만무하다. 산파는 산부에 따라 자궁 쪽 회음부가 아물고 흔적이 남는 경우가 있는데, 앤지의 경우에도 아주 희미하게 발견되었다고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최근의 흔적이 아닙니다. 적어도 2, 3년 정도는 되어 보였습니다.”

    루이스의 눈빛이 변했다. 만약 카일렉의 아이라면. 그럼 그에게 첫 아이가 있었다는 것인데. 하지만 카일렉은 곧 죽게 될 것이며, 그 미래의 결과에는 그녀 자신이 이바지한 부분도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읽은 듯 미카엘이 산파를 내보낸 뒤 다시 말했다.

    “블랙 매스의 이터니티를 최초로 시행한 사람은 존 피츠로이 블랙웰이 아니었어요. 백 년 전, 친조카의 피를 제물 삼아 구십팔 세까지 살았던 수도원장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최초의 의식은 외진 마을의 조그만 수도원에서, 당시 육십 세였던 수도원장과 수도사들에 의해 거행되었다. 아제르반의 크로첸 주에 있었던 로슈 수도원이 그 현장이었다.

    “저 역시 소문을 듣긴 했어도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셨죠?”

    루이스의 물음에, 미카엘이 선선히 답했다.

    “물적인 증거는 없지만 이모 헤스터가 생전에 말해 줬어요. 교리를 담은 비서(祕書)에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선대 두 분은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 사례를 조사시킨 조부는 그 가능성을 헬퍼에게 알리기 전에 언데드가 되었고, 아버지 에드워드 님은 끝까지 함구했겠죠. 어쨌든 결과만 말하자면 그는 언데드로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부와는 달리.”

    “그럼…….”

    “물론 그렇다고 명예로운 죽음을 맞은 건 아니었어요. 이터니티의 불멸성이 가진 한계치를 몰랐기에, 칠십을 넘기고부터는 침실 안에만 틀어박혀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언제 어떤 사고를 당해 기껏 얻은 영생이 물거품이 될지 모르니 최대한 안전한 공간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은 것이죠.”

    그는 아미티지가 사람들에 대한 서류를 꺼내 루이스에게 건넸다.

    “노아 실바 아미티지란 아이. 올해 세 살입니다.”

    “세 살…….”

    루이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눈에 숨길 수 없는 흥분이 어려 있었다. 그때 글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도저히 귀를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잠깐! 지금, 설마……. 만약 카일렉 주인님과 앤지 리즈델 사이에 정말로 아기가 있다면, 의식에…… 그건 아니겠지요?”

    “만약이 아니라 실제로 있습니다. 시기상, 앤지가 섬을 탈출했을 때 이미 임신 중이었던 것 같아요.”

    미카엘은 확신에 차 있었다. 주치의는 충격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싸늘한 눈으로 글렌의 의혹을 불식시켰다.

    “새삼스럽군요. 우리가 공작가의 헬퍼로서 존재하는 이유가 이 때문인 것을.”

    “미친……. 사람이 아냐.”

    미카엘은 그 욕설을 못 들은 척 다시 집사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 빈터가르로 사람을 보내 사실 확인부터 해야겠어요. 카일렉의 아이가 맞다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이리로 데려와야죠. 앤지는 절대 몰라야 합니다.”

    루이스는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두 사람은 누군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 * *

    아네트는 옆방 벽난로에 바짝 붙어 앉아 바짝 귀를 기울였다. 틈새로 흘러드는 대화 소리에,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은 채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끔찍함에 목 깊은 곳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네트는 그들의 음성이 끊기고 문 닫히는 기척이 들리자마자 신속히 움직였다. 두 다리가 옥외계단으로, 다시 첨탑의 비밀 통로와 이어지는 지하로 바삐 움직였다.

    오래지 않아 앤지의 침실 벽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앤지의 침실은 예배당과 면한 첨탑 별관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녀는 급한 마음에 예고도 없이 벽장문을 확 열어젖히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앤지가 깜짝 놀라 경악한 눈으로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환자 같은 몰골로도 당장 침대에서 뛰어내릴 것 같았다.

    “아네트……? 어떻게 거기서 나와?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쉿! 앤지 언니, 큰일 났어. 언니, 혹시…… 아기가 있어?”

    “그걸 어떻게…….”

    앤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공포감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 현실로 임박했다는 불길한 예감에 온몸이 떨렸다.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방금 던스트 부인과 그 남자가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아네트가 조금 전 엿들은 대화를 두서없이 이어 가는 동안, 앤지는 한 손으로 가슴팍을 쥐어뜯고 있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공포라는 이름의 괴물이 전신의 땀구멍을 비집고 살을 저며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네트, 나 좀…… 좀 도와줘. 여기서 벗어나야 돼. 내 아기……. 노아, 노아가…….”

    앤지는 헐떡임 속에서 가까스로 말을 이어 나갔다. 누군가 심장을 꽉 쥐어짜는 듯했다. 앤지는 침대 아래 주저앉아 간신히 숨을 골랐다.

    괜찮을 것이다. 그들은 노아를 건드리지 못한다. 빌렘 아저씨의 개인 경호원들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사설 군인들이다. 아미티지 저택을 24시간 둘러싸고 개미 한 마리 들어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을 터였다.

    “앤지 언니, 잠깐 진정해. 저쪽 벽장에 바깥과 연결된 비밀 통로가 있었어. 나도 어제 발견했는데…….”

    그때, 복도 쪽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던스트 부인의 발소리였다.

    * * *

    테 데움으로의 출발은 카일의 와병으로 며칠 미뤄지게 되었다. 그는 왕궁 교도소로 이관되자마자 고문의 여파로 지독한 몸살을 앓아 운신도 하지 못했다. 3주 가까이 차디찬 감옥에서 지냈기에 체력 자체가 쇠약해져 있었고, 무엇보다 간헐적인 심장 발작 및 각혈로 하루 몇 번씩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히 제롬이 윈스턴 대공에게 읍소하다시피 요청해 카일은 교도소에서 의료실로 옮겨지게 되었다. 사면이 조용히 논의 중이었기에 수도의 블랙웰가 영지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카일이 대외적으로는 스톤 타워의 죄수로 있기를 고집했기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도련님. 테 데움으로 가시는 것은 좀 더 미루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상태로는 내일 출발은 무리입니다. 발작의 간격이 더 짧아지고 있다고 도련님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제롬이 그를 간호하다 무겁게 말했다. 대체 왜 지금까지 재발을 숨겨 왔는지 답답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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