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 (92/106)
  • #92

    “역시 그곳이었군. 혹시 미카엘, 그 서자 놈도 그 사실을 알고 거기 처박혀 있는 건가.”

    카일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낯을 차게 굳혔다.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릴 테니 사면해 주시지요. 그놈은 죽이든 살리든 뜻대로 하시고요.”

    “그 여자만 안전하면 된다 이거지?”

    윈스턴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카일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미 들켜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앤지가 그의 최대 약점이란 걸 알았어도 절대 어쩌진 못할 것이다.

    “좋아. 일단은 왕궁 교도소로 이관해 주지. 하지만 사면은 보류야. 추밀원과 사법 회의를 열고 승인을 얻기까진 며칠이 필요해.”

    “대외적으로는 이 스톤 타워에 있는 걸로 해 주십시오. 테 데움 쪽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편이 전하께도 유리할 겁니다.”

    “그러지. 사흘 뒤 테 데움을 불시에 방문하겠다. 경은 내 친위대로 위장해 내 곁을 떠나지 말도록.”

    카일은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애써 눌러 참았다. 만약을 위해 그를 방패 삼으려는 뻔한 속셈이었다. 하지만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테 데움은 대공을 제물로 삼켜 버릴 것이다. 윈스턴이 발을 디디는 순간, 고대에 신의 영역이었다던 호수는 그의 무덤이 되고 말 터였다.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누군가 물에 젖은 가죽 벨트로 온몸을 후려치고 있었다. 채찍이 얇은 모슬린 잠옷 위를 칼날처럼 매섭게 가르고 또 갈랐다.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꿈인 동시에 꿈이 아니었다. 꿈은 얼마 전 실제로 벌어졌던 현실을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만, 미카엘! 제발 그만해!

    무릎 꿇고 빌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네트가 이른 대로, 굴복하는 척이라도 하려 했으나 도저히 숨겨지지 않았다. 허벅지 어딘가가 터지며 피비린내가 났다. 차디찬 바닥의 냉기가 얇은 천을 꿰뚫고 엄습해 왔다. 몸이 완전히 축 늘어질 때야 매질이 멎었다.

    눈을 뜬 순간, 그녀는 완전히 다른 공간에 있었다. 여전히 잠옷 차림으로 오도카니 서서 누군가 황망히 찾고 있었다.

    노아, 노아……! 아가. 어디 있니? 엄마가 여기 있어.

    덩그러니 혼자 남은 공간에 은빛 모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모래밭인지 백사장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방금 전만 해도 품에 안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도 온기가 여전한데 실체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노아, 노아! 아가야!

    아무리 목이 찢어져라 외쳐도 노아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거센 모래바람, 시야를 뒤덮은 모래 알갱이 때문에 걷기 쉽지 않았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의식하지 못하는 새, 모래 묻은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카일도, 노아도, 브린과 마르틴도, 캐서린 할머니와 빌렘 아저씨, 그 누구도 없었다. 앤지는 사방이 황폐한 모래바람 속에 오롯이 홀로 서 있었다. 그녀의 세계는 텅 비어 있었다.

    앤지는 송장처럼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 미카엘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협탁 위에는 온수 대야와 깨끗한 천, 여러 겹으로 접힌 타월과 약병들이 놓여 있었다.

    앤지는 이틀 전, 지하실에 두 번째 갇혔다가 채찍질을 당한 밤부터 까닭 모를 몸살을 앓고 있었다. 열병에 걸린 환자처럼 전신이 발열로 뜨거웠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악몽을 꾸고 깨어났다가, 다시 의식을 잃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었다.

    미카엘은 근심 어린 얼굴로 앤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흐트러진 긴 금발 아래, 목과 팔 등 여기저기 멍이 든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녀만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건만 번번이 분노를 자제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서랍에서 연고를 꺼냈다. 한 시간 전 바른 약이 아직 번들거리는데도 다시 연고를 덧바르는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앤지의 목까지 깃털 이불을 덮어 주고는 호소하듯 중얼거렸다.

    “앤지, 내가 잘못했어…… 제발 기운 차려.”

    다시는 지하실에 가두지 않을게. 아프게 하지 않을게. 그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다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 맹세를 지킬 수 있을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카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미카엘을 괴물이라 칭하지도 않았고 부질없는 저항도 더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보는 시선은 그대로였다. 아니, 조금씩 더 적의 어린 시선이 심해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는 과거, 그를 향해 온기와 호의만이 담겨 있었다. 허나 이제는 다른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환멸과 경계, 미움의 감정이 흘러넘쳐 홍수를 이룰 것만 같았다.

    그 눈이 미카엘을 미치게 했다. 그녀의 경멸이 그에게까지 전이된 것마냥, 스스로가 혐오스럽고 끔찍했다. 지금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머리로는 이해되고 납득이 가도 분노와 자괴감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앤지, 너도 결국은 현실에 순응하게 될 거야. 우린 테 데움에서 행복할 수 있어. 아니, 헤데스타드든 어디서든.

    잃어버린 몸의 기능은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 밤마다 메이드로 온 여자들을 하나씩 끌어들여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았지만,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그는 기필코 불멸을 성공시킬 것이며 그만의 왕국을 세울 터였다. 선대 존 피츠로이 블랙웰이 처음에 꿈꾸었던 대로. 하지만 그는 언데드가 되어 버린 조부나 친부 에드워드, 그의 본처 유제니아처럼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다.

    앤지와의 사이에서 첫 아이를 낳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미 이터니티에 대해 알고 있었고 제 아이가 제물이 되는 현실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그럼 정말로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다른 여자 누구든 상관없어. 앤지는 절대 모르게 할 테니까.

    저를 괴물이라 비난하던 앤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웅웅거렸다. 가슴이 다시금 메어 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녀 역시 이해하게 될 거라 믿었다.

    모두가 영생과 불멸을 바라고 열망했다. 압도적인 부와 권력을 쥐었을 때는 더더욱. 그것은 인간 본연의 생존 욕구와도 맥을 나란히 했다. 유한성의 가치와 자연의 섭리 따윈 궤변일 따름이었다.

    영생이 아니라도 누구나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를 원한다. 그 재력과 힘을 단 하루라도, 단 한 순간이라도 더 누리길 원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와 헬퍼들이 볼 때는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자 자연스러운 욕망이었다. 어릴 적, 알비노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 두려웠던 순간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앤지,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말아 줘. 경계도, 경멸도, 혐오도, 그 어떤 것도 내게 보이지 말아 줘.

    컬리넌 섬에서 종종 쓰였다던 망각제, 장미차가 지금도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아쉽게도, 섬에 화재가 났을 때 그 특별한 풀과 품종도 전소되어 버렸다. 블랙웰 하이츠의 별채로 불이 번지며, 보관고에 저장 중이던 씨앗들도 잿더미가 되어 바닥난 지 오래였다.

    그나마 몇 시간 동안 몽유병 환자처럼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약은 있었지만 그걸로는 앤지의 기억을 리셋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니 완전히 체념하고 마음을 돌릴 때까지, 설득하고 또 설득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후세와 헬퍼들의 몫으로 남겨 둔 이터니티의 종자는 다행히 테 데움의 지하에 저장되어 있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제 유전자를 이어받은 2세의 혈액밖에 없었다. 얼마가 걸리든, 그의 이터니티가 수년간 안전히 이어지게 되면 앤지와 헬퍼들에게도 몰약의 수혜가 나눠질 터였다.

    “앤지. 나는 널 사랑해. 그날……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

    그러니까 너와 영원히 함께 할 거야, 앤지.

    그는 재차 결심을 다졌다. 그녀를 제 곁에 잡아 두기 위해서는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부득이 어딘가 훼손시켜야 한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면 그조차 불사할 생각이었다.

    “노…… 아…….”

    그 순간 앤지가 중얼거렸다. 미카엘이 깜짝 놀라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그가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한 손을 뻗었을 때였다.

    “노…… 아……. 우리 아기……. 아가야, 아가……!”

    미카엘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아가……. 엄마가…… 미…… 미안해……. 노아……. 엄마, 빨리 갈게…….”

    앤지는 눈을 꼭 감은 채 애처로운 약속을 거듭하고 있었다. 잠꼬대라기엔 너무 또렷한 내용이었다. 게다가 대상도 확실히 있었다.

    노아가 누굴까…….

    미카엘이 손을 완전히 거둬 간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앤지의 침실을 나와 서재로 들어서서 서고의 자물쇠를 열었다. 그리고는 예전에 조사해 두었던, 앤지의 주변인에 대한 정보를 꺼내 들었다.

    시타델의 루벤빌가(街), 아미티지 가문의 이름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혹시 놓친 것이 있었나, 재차 훑을 때였다.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노아 실바 아미티지.

    호적상으로는 빌렘 반 아미티지의 먼 친척 아이인지, 브린 실바와 마르틴 다 실바의 아이인지, 애매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반면 패트리샤 실바에게는 그런 모호함이 없었다. 그 이름은 명백히 실바 부부의 자녀로 보였다.

    미카엘이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어쩐지 머릿속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는 황급히 저택 밖으로 나가 선착장으로 달려갔다.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에 대해서는 던스트 부인보다 현지인이 더 잘 알 터였다. 파고라 정자에서 쉬고 있던 뱃사공은 그를 보자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인리히. 혹시 마을에 산파가 있으면 알아봐 주시죠. 지금 당장.”

    “예? 산파 말씀인가요?”

    “네. 최대한 경험 많고 숙련된 사람이어야 됩니다.”

    미카엘은 사공의 배가 출발하는 걸 보고 나서 곧바로 집사용 체임버로 향했다.

    어쩌면…… 일이 훨씬 수월하게 잘 풀릴지도 모르겠어.

    바삐 걸음을 놀리는 얼굴에 희망이 번져 가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절대적인 절망이 될 희망으로, 그의 심장은 기대감에 부풀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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