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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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일은 두 손목은 꽁꽁 묶이고 발에도 족쇄가 걸린 채 의자에 강제로 앉혀졌다. 멍든 얼굴, 너덜거리는 죄수복, 말할 수 없이 남루하고 초췌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짐 하나 없이 꼿꼿한 자세였다.

    윈스턴 대공은 내심 이를 갈았다. 이렇게 처참한 꼬락서니에도 고귀함과 품위가 가시지 않는 공작이 끔찍하게 얄미웠다.

    허나 그럴수록 나중에 제대로 무너지는 꼴을 보는 쾌감은 더 크겠지. 반드시 네 놈의 몰락을 보고야 말겠어. 정신까지 완전히 스러져 버리는 파멸 말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있었다. 이런 놈이 진심으로 제 편이 되어 주면 얼마나 든든할지, 새삼 죽은 레니에 형님이 부럽기도 했다.

    유약하고 무능한 주제에 적장자랍시고 황제 자리에 앉은 놈. 결국 제 간계에 빠져 비참하게 죽었으니 승자는 자신인 셈이다. 만약 레니에에게 황후와 후사가 있었다면 그들 역시 지옥행이었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략혼으로 맺어진 황후는 몇 년 전 병사했고 자식은 전무했다.

    “경. 새삼 다시 감탄했네. 정말 대단해. 내면적인 강인함도 그렇지만, 아무리 망가뜨려도 손상되지 않는 그 곱상한 낯짝과 고고함 말이야.”

    윈스턴이 아쉬운 속내를 감추며 비릿하게 웃었다.

    “국고가 바닥나면 남창질이라도 시켜야겠어. 장담컨대 남녀노소 불문, 연일 줄을 설 거네, 하하.”

    “안타깝습니다. 제게 품고 있는 음심을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하시다니.”

    “내 여자들이 들으면 기함하겠군. 누굴 감히 남색가로 매도하는 거냐.”

    “방금 전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남녀노소 불문이라고요.”

    “건방진 새끼. 고문이 약했나 보군. 아직도 오만불손하게 혀를 놀릴 배짱이 남아 있다니. 내가 맘먹고 ‘스캐빈저의 딸’이나 ‘아이언 메이든’에 집어 처넣어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쥐어 짜내면 어쩌려고. 차륜형을 쓸 수도 있어.”

    “고문을 약하게 하셨다면 그리하신 이유가 있을 텐데요.”

    카일의 명민한 벽안이 축축하니 번들거리는 회색 눈을 차분히 훑었다. 3주간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지고 야위었지만 날카로운 눈빛만은 그대로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윈스턴은 고개 돌려 간수에게 턱짓해 보였다. 무언의 지시에 간수들은 일제히 문밖으로 물러났다.

    윈스턴은 카일을 비웃듯 훑었다. 찌르는 듯한 눈빛, 특유의 위압감은 그대로였지만 사지가 단단히 구속된 지금은 단둘이 독대해도 두렵지 않았다. 제아무리 가공할 맹수라도 쇠사슬에 철갑을 부술 정도가 아니면야.

    “경. 자네의 충신, 제롬 해밀턴이 어제 날 찾아와 무릎 꿇고 빌더군. 부디 제 주인에게 한 가지 사실만 알려 주라고 말이야.”

    카일의 눈은 차분함을 유지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윈스턴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앤지 뭐라던가…… 경의 옛 정부가 남부 스카보르의 블랙웰 영지에 있다더군. 테 데움이라 불리는 곳이라지?”

    카일의 숨이 가빠졌다. 손목이 결박된 채 맞잡은 두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 따지고 보면 옛 정부가 아닌가? 그동안 몰래 밀회를 가져 왔다면 현 정부기도 하겠군. 죽은 공작 부인…… 데르반 남작의 질녀와도 데면데면, 영 부부 같지 않아 실은 경이 남색가가 아닌가 의혹을 가진 적도 많았다네.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

    “내가 임시 가주로 승인을 내려 준 그 서자 놈이 잡아 놓고 있는 모양이야. 아하, 아니지! 어쩌면 본인이 원해서 그 서자에게 갈아탄 것일지도 모르겠어. 경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내가 정식으로 황제가 되어 적장자 법을 개정하면 그 서자 놈이 차기 블랙웰 공작이 될 테니까 미리부터 환승을 한 것이지. 하하하- 알고 보니 똑똑한 여자로군. 하긴, 나라도 침몰하는 배에서 뛰어내려 든든한 구조선에 몸을 담긴 할 거야.”

    카일은 돌처럼 차갑게 굳은 얼굴로 윈스턴의 박장대소를 노려보았다. 눈빛으로 죽일 수 있다면 대공의 심장은 진작에 멎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정절을 지키는 정부들도 얼마든지 있을 테니 말이야. 특히나 자네 같은 사내라면.”

    윈스턴이 약 올리듯 턱수염을 슬슬 쓸었다.

    “내 보기에 그 서자 놈은 적자인 경에게 많은 열등감과 피해 의식을 품고 있었던 듯해. 빈터가르 왕성에서 황제와 자네를 암살하면 공작 위가 떨어질 거란 제안에 기꺼이 응했고, 황제를 죽일 때도 경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증거품을 옷 속에 넣은 걸 보면 말이지. 그러니 당연히 천재일우의 기회겠지. 경의 것이었던 작위도 가로채고 여자도 빼앗고 말이야.”

    “…….”

    “뭐 어느 경우든,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 그가 누구의 정부를 어떻게 하든, 여자를 몇을 끼고 살든. 임시 공작 대리를 승인시킨 이상 그 영지 내에서 무슨 치정이 벌어지든 아무리 나라도 내 권한 밖이니.”

    카일이 이 악물고 숨을 골랐다. 그는 지독한 충격에 빠져 있었다. 윈스턴에게 여지를 줘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 때문에 간신히 자제하고 있을 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는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며 제롬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루이스 던스트의 거짓 증언이 아니었다면, 3주 전 스톤 타워로 끌려오기 전날 제롬의 취조실 면회가 가능했을 터였다. 그럼 그때 제롬이 그 소식을 알려 줬을 것이다. 테 데움에 앤지가 잡혀 있게 된 지 이미 3주나 지났다는 뜻이다.

    순간 강렬한 살의가 밀려오며 시야가 흐려졌다.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어떤 고문에도 잃지 않았던 이성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미카엘을 당장 눈앞에 잡아 와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앤지의 무사한 모습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기꺼이 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경? 경. 이봐, 카일렉.”

    손가락을 딱, 튕기는 소리에 카일이 시선을 들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험악했는지 윈스턴은 흠칫 놀라 잠시간 얼어 버렸다. 그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는 동안 카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 원하시는 게 뭡니까.”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갈 때마다 싸늘한 냉기가 새어 나왔다. 차디찬 돌 감옥의 공기가 한층 더 음산함을 띠어 갔다.

    “원하는 걸 말씀해 주시죠.”

    “오호.”

    윈스턴이 설핏 웃었다. 정부를 빼앗겨 분노하는 꼴을 보고 싶을 뿐이었는데 이게 동기가 되다니?

    “이제야 나랑 진지하게 대화해 볼 마음이 드는 모양이로군.”

    카일이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제롬의 진의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윈스턴 개새끼가 제게 앤지의 소식을 물어다 주게끔 유도했다. 자신이 더 시간 끌지 않고 스톤 타워를 빠져나와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나는 예전부터 경의 가문에 관심이 많았어. 블랙웰 가문에는 어떤 비서(祕書)가 있지. 그렇지 않은가?”

    “…….”

    “레니에 형님에게 몇 번이나 찔러 봤지만 입을 굳게 다물더군.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태도였어.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고 있지.”

    대공의 어조가 음침해졌다. 바깥의 간수가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그는 톤을 바짝 낮췄다.

    “그건 영생의 비밀에 대한 기록이야. 오래전 카일룸교에서 행해졌던 블랙 매스와 연관된 것이고. 그렇지?”

    카일은 대답 없이 대공을 보았다. 무언의 긍정으로 읽힐 수도 있는 시선이었다.

    “카일룸교의 수장, 데르반 남작을 소환해 자세히 캐묻고자 했네만 아쉽게도 자네 처와 죽어 버렸으니. 그 죽음도 어딘가 석연치 않더군.”

    “그걸 알고 싶으신 거였군요.”

    “당연히. 그리고 가급적 수혜도 누려야지. 생각해 보게. 다들 트리에스테가 쇠락해 간다고 수군대지만 말이야, 만약 그 비밀을 황가가 대대로 실현시킬 수 있다면 우린 영원히 번성할 거야. 영원토록 태양의 제국, 그리고 그 제국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는 거지. 그게 정말 가능하다면 말이지. 만약 과거의 연금술이나 전설의 성배처럼 허황된 미신에 불과한 것이라면…….”

    “선대 존 피츠로이 블랙웰 공작은 구십구 세까지 살았습니다. 3년 전, 컬리넌 섬에 화재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게 정말인가. 역시, 그 섬을 꽁꽁 숨겨 둔 이유가 있었어. 하지만 불에 타 죽었다면 결국 허황된 미신 아니었던가?”

    “그때는 영생의 몰약, 이터니티의 부작용을 개선하는 단계에 있었으니까요. 그 외에도 여러 조건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 체질은 그 조건에 들어맞지 않죠. 하지만 미카엘, 그놈에겐 맞을지도요.”

    카일은 천연덕스럽게 허언을 이어 갔다. 무능한 폭군을 향한 아첨은 죽어도 할 수 없었으나, 상대방의 무의식이 듣고 싶은 말로써 현혹시키는 것은 가능했다.

    “그, 나머지 조건이 뭔가!”

    “저도 여기까집니다, 대공 전하.”

    “경. 이봐, 카일렉. 자네 하기에 따라 당장 증거 불충분으로 사면해 줄 수 있네.”

    카일이 상체를 뒤로 젖혔다. 오만하게 치뜬 시선에도 대공은 비굴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이미 안달이 날 대로 나 있었다.

    “어차피 모든 비밀은 테 데움에 있습니다. 이젠 그곳이 제2의 컬리넌 섬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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