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 (9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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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 위스키 잔 사이로 근황 인사가 잠시 오고 갔다. 숨을 돌린 핀레이는 잔을 티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트리에스테가 워낙 폐쇄적이라 내부 사정을 알아내는 데 꽤 애먹었습니다.”

    최근 빈터가르의 뒤를 밟아 입헌 군주제로 탈바꿈한 비첸틴 왕국에는 트리에스테 쪽 정보망이 더 촘촘했다. 그들은 주로 왕실과 최측근, 고위 귀족들의 동향에 밝았다.

    “블랙웰 공작의 상황이 꽤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황제 대리직을 맡은 윈스턴 대공은 무슨 꿍꿍이인지 대체…….”

    영사의 얘기가 길어질수록 세 사람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 뜻밖의 소식도 있었다. 카일렉 로던 블랙웰 공작이 빈터가르에 있던 동안, 비첸틴 영사를 통해 은밀히 꾸몄던 사안이 있었다.

    “내일 정식으로 행정 절차가 완료될 예정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군요.”

    핀레이 영사의 한마디가 끝나자마자 다들 흥분된 기세로 질문을 던졌다. 그 뜻밖의 소식이 어쩌면 앤지를 찾을 가능성과 직결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 * *

    정신이 들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지만 시야는 캄캄했다. 또다시 지하실에 가둬 둔 모양이었다. 앤지는 바닥을 더듬더듬 짚었다. 손목이 나란히 묶여 있어 몸을 똑바로 일으키는 것조차 힘겨웠다.

    코 아래가 두꺼운 천에 덮여 있었다. 재갈이었다. 입에 물려 있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전에 가둬 뒀을 때 문을 하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서 이번에는 손과 입을 속박해 둔 것 같았다.

    “흐……. 으…… 흐흑…….”

    저번엔 그를 공격하려던 죄로 갇혔고, 오늘은 호수를 헤엄쳐 뭍으로 달아나려다 들키고 말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노아가 생각나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지금쯤 잘 지내고 있을까. 카일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는지, 브린과 마르틴이 분명 자국민 수색 요청을 했을 텐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든 게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나마 카일은 아직 살아 있는 듯해 다행이었다. 만약 그의 형이 집행됐거나 예전의 지병이 재발하여 죽기라도 했다면, 그럼 미카엘의 동태에도 뭔가 변화가 생겼을 터였다.

    제대로 울음을 터트리지 못해 끅끅, 흐느낌만 흘리길 한참, 문 저편에서 자물쇠 소리가 짤랑거렸다.

    앤지는 움찔 놀라 울음을 멈추고 몸을 굳혔다.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되다 보니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하게 되었다. 아무리 정신은 굴하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아도 몸은 제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끼익, 문소리가 나며 누군가 들어섰다. 긴장으로 뻣뻣했던 몸이 절로 풀렸다. 무게감 없이 사뿐사뿐 들어서는 발걸음은 미카엘의 것이 아니었다. 그림자는 한 손에 촛대를 들고 앤지를 보며 쉿, 입에 손가락을 댔다. 예상대로 아네트였다.

    “입의 재갈부터 풀어 줄게. 그 사람은 던스트 부인과 마을로 갔으니 저녁때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아네트는 앤지의 입과 손목의 결박을 차례대로 풀어 주었다.

    “배가 뜨면 바로 원상 복귀해 줄 테니까 잠시만이라도 편히 있어.”

    “고마워…….”

    입안이 바짝 말라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앤지는 그녀가 챙겨 온 수프를 빵과 곁들여 간신히 삼켰다.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지만 체력을 비축해 둬야 했다.

    “정말 고마워, 아네트. 하지만 다음엔 이러지 마. 들키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난 괜찮아.”

    아네트의 예쁘장한 얼굴이 촛불에 아련히 비쳐 보였다. 당사자의 말처럼, 그녀는 처벌을 받거나 크게 혼이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네트의 친부모는 컬리넌 섬에서 화재로 죽은 헬퍼였고, 그녀는 레머디가 아니었던 몇 명 중 하나였다.

    그녀는 자수 모임에서 가장 어린 소녀였다. 그래서인지 심술궂은 레티샤와 그 무리에게 만만하게 보여 구박을 당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앤지가 그녀를 달래 주고 뒤에서 도와준 적이 많았다. 그 보답이 오늘날 이런 상황으로 돌아올 줄이야.

    테 데움의 메이드로 일하는 그녀와 처음 조우했을 때는 감금된 상태에서도 무척 반가웠다. 비록 레머디는 아니었지만 자수 모임의 일원 중 생존자가 존재한다니. 당시 열네 살이었던 소녀는 이제 열일곱이 되어 있었다.

    아네트도 앤지를 알아보고 재회를 기뻐했지만, 그녀가 미카엘의 물건처럼 다뤄지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지하에 갇혔을 때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아네트. 난 괜찮으니 어서 돌아가. 누가 널 찾을 수도 있잖아.”

    “괜찮아. 조금만 더 있을게. 혼자 있으면 무섭잖아…….”

    두 사람은 은은한 촛불을 사이에 두고 잠시 마주 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네트였다.

    “앤지 언니. 호수 한가운데는 수심이 아주 깊어. 정말 빠져 죽을 수 있으니까 다음엔 그러지 마. 실제로 일꾼 중 익사한 사람도 있었대.”

    “그래. 다음에는 그러지 않을게…… 걱정해 줘서 고마워.”

    “여기도 겨울엔 굉장히 추워. 수도 북부보다는 따뜻하지만…… 익사하기도 전에 얼어 죽게 될 거야.”

    앤지는 반박할 수 없었다. 물에 들어갔을 당시 뼛속까지 밀려오던 추위가 지금도 선연히 떠올랐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나도 아직은 모르겠지만 좀 더 때를 기다리다 보면, 적당한 기회가 있지 않을까. 조금만 더 버텨 봐, 언니.”

    그 위로에 앤지는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목이 메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아네트, 전에 말해 준 새로 온 메이드들…… 레머디는 아니지만 다른 목적으로 데려온 것 같다고 했었잖아? 혹시 더 알아낸 건 없니?”

    “아직은 없어. 하지만 뭔가 좋지 않은 일에 이용하기 위해 데려온 건 확실해. 낮에는 이상한 낌새가 없지만, 얼마 전에 샐리라는 아이가 자정이 넘은 시간에 그 남자의 침실로 들어갔다 나오는 걸 봤어.”

    그 남자는 미카엘일 터였다. 아네트는 그를 싫어하고 두려워해 이름조차 부르지 않았다. 카일렉 님도 범접하기 어렵고 극도로 까다로웠으나, 미카엘처럼 끔찍한 사람은 아니었다 말하기도 했었다.

    “침실에……?”

    앤지의 뇌리에 어떤 추측이 스쳤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가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어떤 일을 계기로 던스트 부인도 그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았다. 혹은 미카엘이 직접 실토했거나.

    그렇다면. 레머디가 아니라면 혹시…….

    “그 치료에 활용하기 위해 데려온 걸까?”

    앤지가 저도 모르게 불쑥 말해 버렸다. 아네트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리고 이건 순전히 내 추측이지만 그 사람, 이터니티를 이어 가려 한다고 생각해. 그 여자들로 불임 문제를 해결하고 결국 아기를 가져서…….”

    아네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끔찍해 차마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앤지는 경악에 질린 얼굴로 아네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3주가 꼬박 흘러 마지막 달에 이르렀다. 헤데스타드의 초겨울은 위세가 대단했다. 첫서리가 몇 차례나 내린 황궁 부지는 싸늘하다 못해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스톤 타워, 말 그대로 돌을 쌓아 올려 만들어진 감옥에는 연일 까마귀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종종 사람의 것처럼 들리는 신음도 있었다. 고관대작 출신만 가둬 두는 돌탑에 수감된 죄수는 현재 하나밖에 없었다.

    혹독한 12월의 돌 감옥에는 윈스턴 대공이 원했던 피비린내와 악취가 그렇게까지 진동하진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산 채로 조금씩 도륙하라 명하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자제하고 있었다.

    흉터가 남을 만큼 치명상을 입히지 않되, 최대한의 고통을 가하는 방법은 많았다. 하지만 자칫하면 정신 상태가 맛이 가게 할 수 있으니 그 또한 제한이 많았다.

    윈스턴 대공은 감옥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 바깥의 감독관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손가락은 검붉은 혈흔이 묻은 천을 거둬 가는 간수를 가리킨 채였다.

    “저건 뭐지? 피를 내진 말라고 했을 텐데.”

    “아닙니다, 대공 전하. 저희는 날 끝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 죄수가 기침하다 각혈한 것입니다.”

    “각혈을……?”

    “고문을 하다 보면 죄수마다 체질에 따라 여러 증상을 보이곤 합니다.”

    감독관은 여상하게 덧붙였다.

    “지금은 멀쩡합니다.”

    윈스턴은 흐음, 침음을 흘린 뒤 옥 안쪽으로 들어섰다. 캄캄한 입구 쪽과는 달리, 깊숙이 들어설수록 횃불과 초로 사위가 밝아지고 있었다.

    “경. 일주일 만일세.”

    “…….”

    “앞으로 사흘, 그 안에 집행일이 결정될 거다.”

    윈스턴 대공이 십자가 틀에 매달려 있는 카일을 내려다보았다. 형틀은 경사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카일은 야윈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조소를 지었다. 언뜻 보면 사지만 결박된 채 허공에 반쯤 매달려 있을 뿐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내의 피가 하부로 몰리면서 혈액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호흡과 심장 박동에 과부하가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장시간 매달리는 사람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끔찍한 고통을 받다가 죽어 가게 되어 있었다. 숙련된 간수는 죄수가 버틸 수 있는 극한까지 몰아붙이다 십자가를 똑바로 세워 주는 방식으로 자백을 받아 내거나 고문을 가했다.

    “잠깐 멈추고 똑바로 앉혀라. 얘기를 좀 해야겠으니.”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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