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 (89/106)
  • #89

    앤지는 3년 만에 조우하는 집사장을 보다 그 뒤에 선 초로의 사공과 눈이 마주쳤다. 등 뒤에서 계단을 달려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다짜고짜 사공에게 달려가 그의 손을 붙잡고 매달렸다. 어쩌면 사공은 아무것도 모르는 마을 사람일지도 모른다. 레머디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한 채 그저 저택의 인력을 공수한다고만 생각할지도 몰랐다.

    “저기, 저 좀 태워 주세요! 제발요! 뭍까지만 태워 주시면…….

    “앤지.”

    거친 숨소리가 머리 바로 뒤에서 들렸다. 그때 사공이 난처한 듯 앤지의 손에서 벗어나며 뒷걸음질을 쳤다. 정중했지만 단호한 몸짓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블랙웰가의 종복인지라 임시 가주의 명에 따라야 합니다만.”

    앤지의 눈이 이내 절망으로 가득 찼다. 던스트 부인이 다가와 뭐라 말을 건넸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두 다리가 휘청거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저를 향해 다가오는 미카엘의 건장한 그림자가 시커먼 괴물의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눈을 감고 시야에 담지 않아도,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미카엘이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언뜻 듣기에는 차분하고 온화한 음색이었다.

    “앤지. 소용없어. 넌 여기서 못 나가.”

    “괴물…….”

    앤지의 입에서 밭은 숨이 흘러나왔다. 미카엘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처음 며칠간은 그를 이해해 보려고도 했고 어떻게든 달래서 설득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지금처럼, 언뜻 비치는 보랏빛 눈 속 광기는 아무리 봐도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에 카일이 별채에 가둬 두며 거칠게 굴었을 때와는 또 달랐다.

    그것은 이질적인 종류의 광폭함이었다. 뼛속까지 섬뜩하고 끔찍한, 보다 야만적이고 날 것인 무언가가 그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지극히 비인간적인 내면을 엿본 듯한 충격이 뇌리에 경종을 울렸다.

    “괴물. 넌 괴물이야, 미카엘!”

    미카엘의 동공이 크게 떨렸다. 그는 주저앉은 채 천천히 뒷걸음질 치는 앤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역시, 이번만은 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제야 알 것 같아. 3년 전…… 그때의 너는 진짜 자신이 아니었어. 모두에게 늘 친절하고 다정했던 미카엘 랜들은 사실 꾸며 낸 모습이었을 뿐이야.”

    “…….”

    “너의 내면…… 네 실체는 괴물이었어. 그게 선천적인 것인지, 이터니티의 부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너는…… 선대 공작, 존 피츠로이 블랙웰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야.”

    이제는 그 안에 도사린 괴물을 알 것 같았다. 블랙 매스, 이터니티에 아무 관심도 없고 헬퍼들을 포기시킬 생각을 하고 있다더니. 죄다 거짓이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저 소녀들을 레머디로…… 레머디로 데려온 거야. 그렇지?”

    그때 던스트 부인이 저만치 떨어진 배로 다가가 소녀들을 후문으로 급히 이끌었다. 앤지가 뭐라고 하기 전에 귀를 막으려는 심산이었다.

    “자, 빨리들 들어가렴. 지금 집 안에 환자가 있는데 갑자기 밖으로 나왔단다.”

    “네? 환자……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담당 메이드가 따로 있으니 너희가 담당할 일은 없을 거다. 가끔 낮에 몽유병 증상이 있을 뿐이야. 자, 어서들 들어가.”

    소녀들은 시키는 대로 저택 뒤로 멀리 돌아가면서도 뒤를 흘끔흘끔 살폈다. 사공과 키 큰 남자가 등지고 선 사이로, 눈에 확 띌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남자가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달래는 것 같았지만 여자는 고개를 황망히 흔들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머, 저분인가 봐. 혹시 차기 공작 부인이실까? 가엾어, 저렇게 예쁘신데…….”

    “뭐? 저 사람이? 우리 또래처럼 보이는데.”

    “저런, 어쩌다가…….”

    산발이 된 긴 금발,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모습이 침대에서 막 뛰쳐나온 것 같았다. 크게 뜬 녹색 눈, 새파랗게 질려 달달 떠는 얼굴은 흡사 괴물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공포에 질려 있었다. 확실히 제정신은 아닌 듯했다.

    “하인리히.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만 물러가요.”

    “예. 미카엘 님.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사공은 재깍 배로 돌아갔다. 그를 조카 대하듯 했던 친근함은 예전 그대로였으나, 호칭과 몸짓은 정중하고 깍듯하게 변해 있었다. 누가 봐도 차기 공작을 대하는 태도였다.

    “안 돼! 가지 마세요! 저 좀, 뭍까지 데려다…….”

    앤지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뱃사공이 이미 미카엘의 편인 걸 두 눈으로 확인했지만 본능이 절박한 애원을 멈추지 않았다. 미카엘은 선착장에 단둘만 남은 걸 확인하고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앤지는 그 손을 격하게 뿌리치고 계단 벽을 짚으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앤지, 제발 내 말부터 들어. 저들은 레머디가 아니야. 그게 아니라…….”

    “괴물…….”

    앤지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너는 괴물이야. 너의 조부, 블랙웰 공작처럼.”

    “…….”

    “카일 역시 선대의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 하지만 적어도…… 카일은 달라. 카일은 너 같은 괴물은 아니야. 그는 진심으로 가문의 죄를 참회하고 이터니티의 종말을 꾀하겠다 말했고 나는 그걸 믿…….”

    앤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순간 섬광이 번쩍 일어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뺨에 홧홧한 통증이 번지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미카엘이 온화하던 가면을 벗고 매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카일, 카일…… 듣기 싫어. 지겨워.”

    정신을 차릴 새도 없었다. 그의 다른 쪽 손을 본 순간 반대쪽 뺨에도 불이 일었다. 입에서 악, 비명이 흘렀다. 다시 한 대, 두 대, 몇 번을 연거푸 맞았을 땐 아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활활 타는 것 같았다.

    “그놈은 곧 뒈질 거야. 교수형을 당할 거라고!”

    몸 여기저기 거센 발길질이 날아왔다. 묵직한 부츠 끝이 복부를 강타한 순간, 앤지는 그만 정신을 놓아 버렸다. 생전 처음 당하는 무차별적인 폭력에 버틸 수가 없었다.

    미카엘은 그녀가 축 늘어지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한껏 거칠어진 숨결을 고르며 팔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순간, 감정을 조절할 수 없어 신발 굽으로 목을 밟을 뻔했지만 그전에 기절해서 다행이었다.

    그는 수초 후 이성을 되찾고 앤지의 옷이며 멍든 얼굴, 여기저기 묻은 흙먼지며 얼룩을 조심스럽게 털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양, 가녀린 몸을 안아 들고 계단으로 올랐다.

    루이스 던스트는 새 주인이 계단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기둥 뒤에 숨어 바라보았다. 주름이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한 두 눈에는 이렇다 할 동요가 없었다.

    * * *

    시타델의 루벤빌가(街), 아미티지 가는 연일 불안과 초조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성탄을 앞둔 연말연시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마르틴과 브린의 집 안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천사 같은 두 아기, 패트리샤와 노아가 깨어 있을 동안에는 그나마 온기가 감돌았지만 밤에는 절간이 따로 없었다. 빌렘 반 아미티지와 마르틴은 장기 출장을 미루면서까지 앤지의 행방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를 해 왔다. 하지만 여러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자국민의 해외 실종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우선 앤지의 신상을 다시 본래의 것으로 되돌려야 했다. 컬리넌 섬에서 탈출해 빈터가르에 왔을 때 빌렘과 마르틴이 그녀에게 위조 신분을 만들어 주었고, 지금까지 그 가명과 가짜 신분으로 살아왔다. 공작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쩔 수 없다. 행정 절차상 최소 며칠은 필요하다고 하니.”

    빌렘이 팔짱을 끼고 딸과 사위를 돌아보았다. 세 사람은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서재에 모여 있었다.

    “정말 답답하네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진작 신분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것을! 앤지 리즈델에서 앰버 윈으로 바꾸는 게 뭐가 그리 오래 걸릴까요. 범법자도 아닌데……!”

    브린이 답답한 듯 크게 성토했다. 마르틴도 목덜미를 연신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여전히 염려와 죄책감에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일주일 전 미카엘 랜들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아봤더라면. 브린 또한, 그렇게 기차역에 덜컥 보내는 게 아니었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를 질책했다.

    “본래 신분이 인증되는 즉시, 빈터가르 왕실과 외교부에 실종 수색 청원을 넣을 테니 너무 걱정 말게.”

    “미칠 것 같아요. 앤지가 걱정돼서…… 지금쯤 수도에 있기는 한 건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안전에 위협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마르틴이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집사 헬렌이 문을 두드렸다. 기다리던 손님이 왔다는 전언이었다. 마르틴이 문을 벌컥 열자 프록코트 차림의 남자가 모자를 벗고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빈터가르 주재 비첸틴 영사인 테오도르 핀레이였다.

    “늦은 시간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소리, 우리가 요청한 것인데 와 줘서 정말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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