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 (88/106)
  • #88

    본래 거짓말은 절반의 진실을 섞어야 그럴듯하게 들리는 법이라 했던가. 그에 대한 치료법을 암암리에 알아보고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숨겨진 탐욕 역시.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냐. 최근 한 달 전까지는 샬럿과 정상적인 부부 생활이 가능했어. 아이만 생길 수 없었을 뿐…….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기능을 잃었지. 그러니 안심해, 앤지. 설령 내가 원한대도 널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

    “그러니까 일 년 정도 시간을 벌면 돼. 그동안 어떻게든 헬퍼들을 이곳과 수도의 영지에서 죄다 몰아낼 방법을 찾을 거야.”

    “그래서……? 그리고 그다음에는?”

    제 몸에 대해 털어놓은 것만은 진실인 듯했다. 언제고 그녀를 범할 의도라면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네가 굳이 차기 공작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건 이해하겠어. 제국법이 바뀌어 사생아도 장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나는? 날 굳이 여기까지 데려와 억류해 두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어, 미카엘.”

    “…….”

    “내가 수도에 가는 걸 막으려는 거야? 카일에게 유리한 증언을 할까 봐? 하지만 실제로 황궁에 들어갈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잖아. 그러니까 날 빈터가르로 보내 줘, 제발.”

    일단 시타델로 돌아가서 빌렘 아저씨, 마르틴, 브린, 모두와 카일을 구할 방법이 없을지 의논해 볼 생각이었다. 카일도 카일이었지만 노아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미칠 것 같았다.

    “지금쯤 다들 걱정하고 있을 거야. 내가 말도 없이 간 대신, 도착 즉시 서신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깜깜무소식이잖아. ”

    그리고 일주일간 아무 기별이 없으면 트리에스테와의 평화 수교 협정에 의거해 그녀를 수색해 달라는 말도 덧붙였었다. 그 편지만은 브린이 틀림없이 확인했을 것이다. 역에서 사환을 통해 서신을 보낼 때는 미카엘이 옆에 없었다. 그저, 며칠간의 부재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내용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미안해, 앤지. 그건 들어줄 수 없어.”

    “미카엘.”

    앤지가 그가 앉은 팔걸이의자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서늘한 눈으로 미카엘을 내려다보았다. 섬뜩하고 두려웠지만, 그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게 있었다.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말해.”

    어쩌면 그가 이대로 자신을 영원히 놔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빈터가르로 영영 돌아갈 수 없고 다시는 카일과 노아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폐부를 깊숙이 찔러왔다. 뭍과 고립된 커다란 숲속, 그 안의 호수 한가운데 작은 섬처럼 떠 있는 이곳은 그만큼 탈출이 요원해 보였다.

    “앤지, 내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뿐이야. 네가 내 곁에 있는 것…….”

    미카엘의 애처로운 자색 눈동자 위로, 카일의 검푸른 눈이 겹쳐 보였다. 언젠가 카일도 그렇게 말했었다.

    섬이 불타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날, 양부모가 나란히 돌아가시기 전, 별채의 침실에 갇혀 있을 때 카일은 무람없이 거칠었었다. 동시에, 심장이 터져 버릴 것처럼 애달픈 눈으로 애원하기도 했었다.

    -앤지, 내가 원하는 건 너 하나뿐이야. 내 곁에 있어만 줘, 제발.

    하지만 미카엘은 카일이 아니었다. 비록 그가 제 눈앞에서 양부모를 잔인하게 쏴 죽이긴 했어도. 블랙웰가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이 늘 환시처럼 따라붙게 될지언정,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 오랜 감정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오직 카이 한 남자만을 사랑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최악의 경우,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해도.

    “미카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그저 내 곁에만 있어 주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 앤지.”

    그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오랜 제 감정을 고백해 왔다.

    “전에도 고백했지만…… 나는 널 사랑해, 앤지.”

    “미카엘.”

    “그때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내 마음을 거절했을 때는 정말로 포기할 생각이었어. 나름대로 애써 노력했지만…… 나도 내 감정을 어떻게 할 수 없었어.”

    카일렉과의 밀회를 제일 먼저 눈치채고, 헤네랄리페 정원에서 별채의 침실 창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전에도, 언젠가 카일렉이 앤지의 캔디 상자 안에 넣어 보냈던 편지를 슬그머니 빼돌리는 짓도 했었다.

    「사랑하는 나의 앤지.

    직접 배웅하고 말로서 전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유감이야. 앞으로 내 신변에 대해 어떤 말이 들려도 절대 동요하지 마. 나를 믿어. 모든 진실은 수도에 가서 다 밝힐게. 내가 내린 모든 결정은 오직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니까 너에 대한 내 마음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길 바라. 늘 그랬듯이 나는 너만을 사랑해, 앤지.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너의 카이로부터」

    레티샤와의 결혼이 앤지에게 알려질까 봐 미리 언질을 주었던 편지였다. 양심의 가책 따윈 느끼지 않았다. 편지의 부재가 두 사람의 관계에 더 빨리 균열을 일으키길 바랐을 뿐.

    “그런 말 하지 마. 나에 대한 감정을 정리했으니 다른 여자와 결혼도 했을 텐데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나는 단 한 번도 샬럿을 사랑한 적 없어, 앤지. 그건 내 뜻이 아닌, 카일렉이 내건 조건이었어. 가문의 서자로서 공작저를 떠나지 않으려면 메이드 중 하나와 결혼해 정착할 수밖에 없었고, 난 멀리 떠나고 싶지 않았어.”

    “미카엘, 나는 널 사랑하지 않아. 앞으로도 영원히.”

    앤지가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그녀는 명료하게 말을 이었다. 그에게 호응하는 척, 달아날 틈을 노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길 원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만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동안 미카엘에게 신세 진 것, 컬리넌 섬과 레반에서 그녀를 도와주고 구해 줬던 일 등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니까 제발 날 놔줘. 지금 보내 주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절대 문제 삼지 않을게.”

    그나마 남아 있던 좋은 기억마저 얼룩지지 않기를 바랐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 시타델로 돌아가야 했다. 노아에게 돌아가 아이를 직접 지키며, 카일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아미티지 가족과 의논하는 게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괜찮아. 날 사랑하지 않아도 그냥 내 곁에만 있어 주면 돼.”

    “날 계속 붙잡아 두면 단지 사랑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널 미워하게 될 거야, 미카엘. 지독하게 혐오하고 경멸하게 될 거라고.”

    앤지의 입술이 달싹였다. 설령 상처가 된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그는 예전에 그녀가 알았던 미카엘 랜들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알아 왔던 그 선했던 얼굴은 역시 가면이었던 걸까.

    “앤지, 나는…….”

    “실은 지금도 너를…… 미카엘, 나는 네가 무서워.”

    “차라리 그 편이 나아. 아무 감정도, 관심도 없을 바엔 차라리 그게…….”

    “내가 널 보면서 카일을 떠올려도 괜찮아?”

    그와 닮은 널 보면서, 네가 아닌 그를 그리워하는 게 정말 좋아?

    앤지는 이 악물고 기어이 날 선 말을 뱉었다.

    “3년 전에는 어딘가 비슷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확실히 형제란 걸 알겠어.”

    “앤지.”

    미카엘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번엔 확실히 타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 순간, 둔탁한 소리가 창 너머 희미하게 흘러들었다. 노가 뱃전에 부딪치는 소리였다.

    지금이야!

    앤지는 그가 뭐라고 더 말할 새도 없이 미카엘을 밀치고 달아났다. 배가 저택 계단 끝, 선착장에 닿아 있었다. 며칠간 갇혀 있는 동안 창 너머로 호수 저 멀리, 반대편에 정박한 조각배를 계속 봐 왔다.

    모자를 눌러쓴 사공은 요 며칠 저택으로 오는 손님이 없었는지 하루 몇 번만 배를 살피다가 어디론가 사라지길 반복했었다. 그래서 늘 배가 이쪽으로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앤지는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렸다. 끝도 없이 이어진 긴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몇 번이나 발을 헛디딜 뻔했다. 사공이 공작가 사람인지, 헬퍼인지, 마을의 일꾼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뭐라도 해 봐야 했다. 일단 붙잡고 뭍까지 태워 달라고 사정하면…….

    하지만 그 소망이 무색하게, 앤지는 선착장 앞에서 멈춰 섰다. 한 중년 여인이 사공의 부축을 받으며 배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배가 저만치 하나 더 있었다. 야유회용 배처럼 차양 덮개를 씌운 큰 배에는 앳된 소녀들과 또 다른 사공이 타고 있었다. 호숫가 한가운데 섬처럼 떠 있는 테 데움, 저택의 경관에 감탄한 듯 다들 탄성을 흘리며 재잘거렸다.

    “와아, 정말 근사하다. 이런 곳에서 일하게 되다니 정말 행운이야!”

    “그러게 말이야. 난 메이드 경력이 없는데도, 급여도 아주 높게 불러 주시고 독방도 있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

    그때 앤지를 등지고 선 던스트 부인이 사공에게 들릴락 말락 낮게 속삭였다.

    “미카엘 님이 지시한 대로 일단 네 명. 상황 봐서 다음 달 몇 명 더 공수해 올 거야.”

    “아, 예. 알겠습니다.”

    순간, 앤지의 머리가 하얗게 바랬다. 쿵, 커다란 벽돌이 내리치는 충격이 심장을 강타했다. 소녀들은 메이드로 고용된 것이 아니었다. 방금 던스트 부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로도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때 던스트 부인이 돌아서며 앤지를 보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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