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 (87/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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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일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가주인 그 외에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인장이었다. 대공은 종이를 낚아채듯 받아 들고 곧장 훑어 내렸다. 읽는 내내 살짝 찌푸리고 있던 미간은 점점 펴지고 입가에는 승리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대법관. 용의자를…… 아니, 죄수를 지하 유치장에 투옥시키게. 지금 당장.”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제국법의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여기, 오랜 세월 동안 공작가의 하우스키퍼로 몸담아 온 자의 증언이 있다.”

    대공은 의기양양하게 서신을 대법관에게 내밀었다. 켄트 공작을 위시한 다른 가신들도 대법관 주위를 둘러싸고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지난 3년간의 새 주인의 황제 시해 및 모반 계획에 대해 밀고하는 내용이었다.

    「……(중략) 안타깝게도 물적인 증거는 제시드릴 만한 것이 없어 송구합니다. 하지만 제가 제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주인에의 신의를 저버리면서까지 이런 증언을 고하는 이유는 제국의 정의와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부디 차기 황제 폐하와 황실에 더 이상의 불충한 의도가 미치지 못하기를, 신의 축복만이 함께 하시어 늘 강녕하시기만을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합니다.」

    편지의 말미에는 루이스 던스트의 서명이 있었다. 카일도 그 이름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윈스턴 대공은 투옥을 재차 명령하며 다른 한 가지도 선포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고 에드워드 리암 블랙웰의 서자, 미카엘 랜들을 블랙웰가의 임시 가주로 승인한다. 공작도 가문의 수장 자리가 텅 빈 것보다는 그 편이 더 안심될 거라 믿네.”

    대공은 검은 속내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는 어떤 상황이 이어질지 불 보듯 뻔했다. 카일의 교수형이 집행되면 서자의 호적법을 본격적으로 손봐서 미카엘을 차기 공작으로 만들든, 이용 가치를 봐서 제거하든 둘 중 하나일 터였다.

    루이스 던스트와 미카엘이라…… 역시 그랬었군.

    카일은 이를 악문 채 쓴웃음을 삼켰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정식 투옥을 앞둔 비참한 현실, 가문이 송두리째 서자에게 넘어갈 수 있는 위기보다도, 내일 제롬을 통해 앤지의 안부를 확인하지 못하는 게 더 절망스러웠다.

    샬럿의 시신은 테 데움으로 돌아오지 않고 헤데스타드 영지의 숲에 묻혔다. 갑작스러운 식중독이 일으킨 발열과 발작은 그녀의 심장을 멈추게 했고, 미처 손쓸 틈도 없이 고인을 사자로 만들었다. 그게 대외적인 사인(死因)이었다.

    하지만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원인이 그에게 있었다 해도, 어쩌면 앤지와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안됐지만 샬럿은 어차피 사라져 줘야 할 존재였다. 레티샤와 데르반 남작 역시. 루이스 던스트가 이터니티에 무섭도록 집착하는 까닭에 일을 간편히 만들어 줘 다행이었다.

    미카엘은 루이스의 서신을 읽고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서재를 둘러보았다. 지금쯤 감옥 안에 있을 카일렉 로던 블랙웰이 쓰던 집무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카엘의 방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었다.

    황제 시해에 역모 죄까지 더해진 자의 말로(末路)야 뻔하지 않겠는가. 취조실에서 지하 감옥으로, 감옥에서 다시 스톤 타워로 옮겨지고 난 후에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게 정해진 수순이다. 그 과정에서 벗어나 살아남는다는 것은 글쎄,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11월의 오후는 나른하고 평화로웠다. 미카엘은 공작 부부가 메인 체임버로 사용하던 본관으로 들어섰다.

    1층 마스터 베드룸과 연결된 온실 정원은 과거, 블랙웰 하이츠의 헤네랄리페 정원과 비슷했다. 정원뿐 아니라 저택을 해자처럼 둘러싼 호수며 숲, 모든 자연이 그랬다.

    테 데움 자체가 여러모로 불탄 섬과 닮아 있었다. 찬란하고 아름답던 컬리넌 섬의 가을, 그 자연과 풍광을 고스란히 옮겨 온 것만 같았다. 테 데움(Te Deum), 거룩한 신의 찬미라는 성가 이름처럼 모든 것이 성스러웠다.

    이제는 내 것이지. 나의 테 데움이야. 곧 내 것이 될 헤데스타드의 영지처럼, 그리고 그보다 더 빨리 내 소유가 될 그녀처럼.

    미카엘은 온실 정원을 가로질러 침실로 향했다. 클램셸 도어를 열자 캐노피 달린 침대가 멀찍이 보였다. 그는 찬바람이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문을 닫았다. 하늘거리는 캐노피 천 아래, 앤지가 누워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창백한 낯은 곤히 잠들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을 통 자지 않아 간밤에 물 잔에 수면제를 타 둔 보람이 있었다. 미카엘은 침대 맞은편, 팔걸이의자에 앉아 그녀를 보고 있다가 침대 가까이 다가섰다. 그 순간 앤지의 눈이 퍼뜩 떠졌다. 그녀는 미카엘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 가까이 오지 마!”

    부스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 녹색 눈동자가 강렬한 경계심과 거부감을 뿜어냈다. 미카엘은 이내 상처받은 얼굴이 되어 침대에서 물러났다. 그가 의자에 돌아가 앉자, 앤지도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던스트 부인은? 제롬은 아직도 오지 않았어?”

    “루이스는 내일쯤 수도에서 올……”

    “카일은? 그는 아직도 감옥에 있어?”

    “아마도 그렇겠지…….”

    앤지는 몸을 확 일으켰다. 격앙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미카엘. 여기 온 지 벌써 사흘이 지났어!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제발 날 수도로 보내 줘. 헤데스타드로 가서 카일이 어떤지 봐야 돼. 처음부터 그 목적을 위해 빈터가르로 온 거잖아. 노……”

    노아까지 두고 온 거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다 멈췄다. 앤지는 크게 숨을 들이쉰 후 미카엘을 보았다. 그는 사흘 전부터 쭉 그래 왔듯 그녀를 차분히 달래고 설득하려 들었다.

    “앤지, 카일은 이제 가망이 없어. 루이스의 전갈에 의하면 그는 이미 돌탑에 투옥되었고 조만간 형 집행이 결정될 거야. 이런 상황에서 네가 수도에 가 봤자 너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그래서 여기 데려온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나 역시 정말 안타까워. 하지만 죄를 지었으니 정당한 심판을 받는 거야.”

    “거짓말……!”

    앤지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미카엘은 3년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변함없이 선하고 순수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사흘 전의 그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마차에서 그녀의 입에 수면 약을 강제로 묻혔을 때의 미카엘 랜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또 다른 그였다.

    “나야말로 몇 번이나 말하지만 거짓말은 그쯤 해 둬, 미카엘. 너는 카일의 상황에 대해 전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지 않잖아…….”

    그는 이미 테 데움의 주인인 양 행세하고 있었다. 저택 내에는 카일렉의 흔적이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헬퍼와 사용인들은 카일렉의 머리글자가 새겨진 물건이 보이는 즉시 어디론가 거둬 갔다. 예전에 그녀와 일했던 메이드는 단둘이 있을 때 슬쩍 귀띔하기도 했다.

    -앤지. 나도 정말 영문을 모르겠어. 갑자기 하루아침에 이게 무슨 일인지. 우리 같은 서브 메이드들은 던스트 부인과 야스민 시종장님 지시에 따라야 되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어. 우리끼리는 밤마다 몰래 모여서 공작님을 걱정하고 있지만…… 들키면 아마 쫓겨날 각오도 해야 될 거야.

    게다가, 그녀의 말에 의하면 공작 부인인 레티샤와 미카엘의 아내인 샬럿도 각각 강도 살인과 식중독으로 죽었다. 그 둘의 사고 또한 시기상 석연치 않았다. 누가 뒤에서 작정하고 공작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 날, 한 시에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둘의 죽음으로 가장 큰 수혜를 받게 되는 사람은 미카엘이었다.

    “미카엘.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죽은 부인의 장례식…… 애도 기간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잖아.”

    “앤지, 그렇게 경계하지만 말고 내 말을 좀 들어 줘.”

    미카엘이 그녀에게 다시 조심스레 다가왔다. 연한 금발을 제외하고, 서글서글한 눈빛과 콧대와 입매, 가지런한 이목구비는 확실히 고 에드워드 님의 초상화를 많이 닮아 있었다. 배다른 동생과도 비슷했지만 웃지 않을 때의 날카로움은 카일 쪽이 더 했다.

    “잠깐만 내 말을…….”

    “가까이 오지 마. 미리 말해 두지만 내 몸에 손대면 절대 가만있지 않아. 이터니티를 이어 갈 생각이라면 더더욱.”

    “앤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널 어쩔 생각으로 데려온 게 아니니까. 나는…….”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막 털어놓으려는 것처럼, 얼굴에 비장함마저 어려 있었다.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어.”

    앤지가 움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는 진심으로 놀란 것 같았다.

    “그래서 2년 반 동안 샬럿과의 사이에 아이가 없었어. 이 사실은 아직 누구도 몰라. 던스트 부인도, 헬퍼도…….”

    “하지만 이해가 안 돼. 헬퍼들이 보란 듯이 널 그 자리에 앉히고 차기 공작이 된 것처럼 모시는 이유가, 네가 블랙 매스…… 이터니티의 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 아니었어?”

    “그렇게 믿게끔 방관했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나도 헤스터 이모에 의해 카일렉처럼 어릴 적부터 이터니티를 복용했어. 첫 번째 부작용은 알비노 병에 의해 눈 색깔이 바뀐 것이고, 두 번째는 최근부터 발현된 증상이야. 나는 이제 누구와도 관계할 수 없어, 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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