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 (86/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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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레니에 러틀랜드 오토 카를슈타인 하르젠 8세, 트리에스테 제국의 황제이자 코토르, 몬테비아, 하일랜드, 오흐리드센의 왕의 동생, 윈스턴 대공은 왕궁의 탑에 당도했다. 지하의 취조실로 향하기 전, 그는 수하를 은밀히 호출하여 아래쪽 상황을 물었다.

    “카일렉 그놈은? 아직도 잘 버티는 중인가?”

    “그렇습니다.”

    윈스턴은 교활해 보이는 콧수염을 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자백을 받아 내겠다, 으름장을 놓은 것부터가 하나의 연극이었다. 카일렉이 황제를 시해하지 않았다는 건 판을 짜 놓은 그들이나, 당사자나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차라리 좀 더 확실한 증거를 남겨 둘 걸 그랬습니다. 추밀원 절반이 여전히 공작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초기 계획대로 빈터가르에서 공작 부처까지 확실히 처리했어야 했는데…… 아쉽습니다. 갑자기 예정에도 없이 시가지 퍼레이드에 합류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러고 보니 진범은 어디 있지? 선대 공작의 사생아라 했던가.”

    카일렉이 퍼레이드에 끼어드는 바람에 전체적인 초기 계획이 어그러졌다. 원래는 궁성에 남아 있는 공작 부부를 죽인 다음, 수사를 교란시키고 시간을 벌기 위해 황제는 따로 납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공작의 이탈로 인해 그가 시해범이 되는 것으로 계획이 급히 변경되었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더 꼬여 버렸다. 며칠 뒤 미카엘이 황제의 숨통을 끊어 놓고 그를 뒤따라온 사병이 진범인 그놈을 바로 처리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임무를 지시받은 사병이 도착하기도 전에 미카엘이란 놈은 현장을 곧바로 빠져나갔다.

    “미카엘 랜들 말씀이시지요? 현재 남부 쪽, 스카보르 주의 영지 별장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테 데움인가 하는 곳입니다. 곧 수도로 불러올리겠습니다.”

    “현장에서 일 처리를 깔끔하게 했어야지. 하마터면 다 들통날 뻔했어. 형님이 끝까지 힘 빼지 않고 손가락을 놀릴 줄은 미처 몰랐지. 처음부터 Mikyle이라 쓸 수 있었으면 어쩔 뻔했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엄중히 책임을 묻겠습니다. 아예 원래 계획대로 처리를 할까요? 수도로 올라오는 즉시 저희 쪽에서…….”

    “흐음.”

    윈스턴은 콧수염에 이어 턱수염을 쓸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형님도 돌아가시고 했으니 사생아 관련 법을 슬슬 손봐야 할 텐데 그러기가 꺼려졌다. 법이 개정되는 즉시, 카일렉이 죽으면 미카엘에게 공작 작위가 자동 계승될 것이다.

    애당초 그게 그림자 친위대 중 미카엘을 포섭한 이유였다. 보상으로 차기 공작의 자리를 내걸고 암살을 도모했을 때, 그는 기다렸다는 듯 응했었다. 블랙웰의 사생아는 유약해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뛰어난 살수였고, 선해 보이는 낯짝과는 반대로 속이 시커먼 놈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어그러져 놈을 제때 처리하지 못했으니 어쩐다. 순순히 차기 공작으로 만들어 주면 알짜배기 자산을 가로챌 수가 없는데.

    영지와 재산은 차후 어떤 명분을 들어서라도 황실에서 몰수할 수 있겠지만, 국외에 촘촘히 퍼져 있는 사업망은 건드릴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허나 제 서자의 황실 호적이 걸린 일이니 법 개정을 차일피일 미룰 수도 없다.

    “아니, 생각을 바꿨다. 처단하는 게 여러모로 깔끔하겠지만, 아직은 쓸모가 있을 것 같군. 돈도 좋지만 내가 그 가문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거든.”

    “그럼…….”

    “그놈의 약점이나 더 알아 둬. 공작의 처형이 결정되고 정식으로 투옥되는 즉시, 테 데움을 방문할 예정이다.”

    “예? 수도로 부르지 않으시고 대공 전하께서 직접 그 시골까지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공기 좋은 휴양지에서 며칠 쉬는 셈 치면 돼. 협박이 먹힐지, 구워삶아질 놈인지…… 어떤 놈인지 일단은 좀 더 알아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탈탈 털어 봐. 약점으로 쓸 게 있을지.”

    수하는 명을 받들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조아렸다. 대공은 열 지어 선 기병들 사이를 헤치고 취조실로 향했다. 그는 이 악물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기껏해야 조카뻘인, 새파랗게 젊은 공작 앞에서 긴장이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윈스턴은 취조실 안에 자리한 카일을 노려보았다. 차기 황제인 그에게 감히 이런 긴장감을 느끼게 만들다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목을 쳐 버리고 싶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까지 왕림하시다니 영광입니다. 대공 전하.”

    카일렉이 서늘하게 읊조렸다. 어조는 공손했지만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경멸이 어려 있었다. 윈스턴이 이를 으득 갈았다. 그가 영 초췌해 보이지 않아 화가 치밀었다. 취조실에 며칠째 갇혀 있다시피 했는데도 변함없이 수려한 얼굴, 매끈한 행색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공은 감독관을 향해 턱짓해 보였다. 대면하는 동안 용의자의 손을 구속하란 의미였다. 감독관은 재깍 카일의 두 손을 결박했다. 그제야 윈스턴은 간수가 뒤로 빼 주는 의자에 앉아 카일을 마주 보았다.

    카일이 조소를 참지 못했다. 윈스턴은 그의 입가에 어린 비소에 모멸감을 느끼며 으르렁대듯 물었다.

    “왜 웃지? 내가 우습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제가 무서우신 것인지.”

    “뭐라?”

    윈스턴은 얼굴이 벌게져서 집행관과 감독관에게 턱짓해 보였다. 그 무언의 명령에 둘은 취조실을 빠져나갔다. 간수는 남겨 둔 채였다. 그 또한 사실상 조롱거리였다. 체면을 더 구길까 싶어 가신을 내보내더니 간수는 그대로 두다니. 상대방이 무섭다는 걸 스스로 재확인해 준 꼴이나 다름없다.

    “이제 슬슬 자백하는 게 어떤가, 경. 우리끼리니까 말이네만, 어차피 다 결정된 판 아닌가.”

    윈스턴이 비열하게 웃었다. 드러나는 본색에 카일이 다시 조소를 지었다.

    “자백은 대공 전하가 하고 계시는군요.”

    “무슨 소리지? 나는 권선징악에 따라 결정된 판이라는 말이었네. 아무튼 경, 지금이라도 내게 고분고분 굴면 특별히 선처해 줄 수도 있어.”

    대공이 어조를 낮췄다. 그의 편에 붙어 개가 되면, 그리고 공작가의 재산과 영향력을 그가 요구하는 만큼 내놓으면 증거 불충분으로 특별 사면을 내려 주겠다는 뜻이다. 카일렉은 그 진의를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하지만 짐짓 모른 척했다.

    “직설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전하.”

    “더불어, 폐하가 알고 있던 그것 역시. 자네 가문에 대단한 비밀이 있지 않은가.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경이로운 방법이 있다고, 예전에 형님이 만취 상태일 때 분명히 들었어.”

    카일의 눈빛에 살기가 돋았다. 윈스턴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목소리를 떨었다,

    “경. 내가 곧 왕좌에 앉게 될 것임은 명백한 사실이네. 그럼 내겐 두려울 게 없어. 어떤 비밀이든 비화든,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알아낼 수 있단 말이야.”

    “그럼 그때는 저와 단둘이 독대할 용기도 생기시겠습니까.”

    “뭐라고……?”

    “옥좌가 근본적인 사람됨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저와 단둘이 있지도 못하시는데 무슨 왕좌 타령입니……”

    그가 한 마디를 채 마치기도 전에 퍽, 소리와 함께 뺨이 돌아가며 피가 튀어나왔다. 주먹을 날린 이는 윈스턴이 아닌, 옆에 서 있던 간수였다.

    카일은 피식, 조소를 날렸지만 간수 쪽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주인의 명에 따른 충견일 뿐이다. 그 주인이란 게 따를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 모르는.

    “봤나? 내가 비록 상대가 못 되어 직접 손을 쓸 순 없어도 아무 상관없다는 걸. 이렇게 수족을 부려 얼마든지 경을 뭉갤 수 있지 않나. 하핫.”

    카일렉의 여유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간수와 윈스턴 사이로 퉤, 피를 뱉었다. 간수가 재빨리 저지하려 했지만 카일렉이 좀 더 빨랐다. 그는 결박된 손 대신 두 다리를 놀려 간수의 다리를 세게 걷어찼다.

    간수가 크윽, 신음을 뱉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어디까지 응징해도 될지 윈스턴 쪽을 돌아볼 때였다. 전왕의 고문관이었던 머레이 켄트 공작이 취조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들어섰다. 그는 카일과 간수 사이를 막아서며 엄중히 말했다.

    “그쯤에서 멈춰라. 대공 전하, 조사 중인 용의자를 함부로 다루실 순 없습니다. 투옥했다고는 해도 아직 범인으로 확정되진 않았습니다.”

    “언제까지 선고를 미룰 셈이야! 끝까지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이라도 해!”

    윈스턴 대공이 경박하게 혀를 놀리며 수선을 떨 동안, 카일에겐 오히려 휴식 시간이 생길 수 있었다. 그는 머릿속에 누군가를 떠올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앤지. 시타델에서 별일 없이 지내고 있겠지.

    제롬은 비밀리에 빈터가르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빈터가르 왕실과 블랙웰가 사이의 은밀한 담합이 끝난 후에도 며칠 더 체류할 예정이었다. 그리고는 앤지가 안전한지 살펴본 뒤, 국경을 넘는 대신 바다를 돌아 밀항하는 방식으로 귀환하게 된다. 어림잡아 내일쯤이면 항구를 통해 헤데스타드로 넘어오게 될 터였다.

    어떻게든 취조 중 제롬과 만나 앤지의 안위를 확인해야 했다. 그의 편인 추밀원 대신들이 잠시만이라도 집정관과 감독관을 따돌리고, 제롬을 들여보내 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경계가 나날이 더 삼엄해지고 있어서 그럴 틈이 생길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집정관 중 한 명이 손에 서신을 들고 황급히 들어섰다. 그는 대법관인 버틀랜드 공작 쪽을 봤다가 방향 바꿔 윈스턴 대공에게 편지를 전했다. 봉투 한가운데에는 블랙웰 가문의 상징, 독수리가 새겨진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대공 전하, 블랙웰 본저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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