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 (85/106)
  • #85

    두 사람을 태운 기차는 네 시간 만에 트리에스테 역에 정차했다. 국경을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기차역의 분위기만 보고도 타국에 있다는 사실이 확 실감되었다.

    역사는 썰렁하다 못해 스산함마저 감돌았다. 활기에 차서 북적이던 빈터가르의 역과는 사뭇 달랐다.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은 마차나 말로 갈아타고 제각기 갈 길을 떠났다. 앤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카엘, 제롬 아저씨는 어디에 있어?”

    “글쎄.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매표소에 편지를 남겨 둘 테니 우리 먼저 출발하자. 트리에스테는 빈터가르만큼 자동차가 상용화되어 있지 않아서 마차를 타야 돼.”

    앤지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롬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기에 걱정과 실망감이 앞섰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기차에서 내리고도 마차는 한참을 더 달렸다. 미카엘은 그녀가 불편한 데는 없는지 세심히 신경 써 주며, 재킷을 벗어 기댈 수 있게 쿠션까지 만들어 주었다.

    앤지가 피로감에 잠시 졸다가 마차 문의 창을 건너보았을 때였다. 마차는 긴 강줄기를 낀 길을 달리고 있었다. 갑자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카엘. 저 강, 혹시 트라베 강 아니야?”

    “맞아. 어떻게…… 알고 있어?”

    트리에스테의 지도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트리에스테와 빈터가르 사이의 국경 너머, 기차역에서부터 나라에서 가장 긴 트라베 강이 시작되는데 이 강은 수도인 헤데스타드가 있는 북쪽이 아닌 남부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지도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 강은 남부를 향해 흘러가야 하잖아. 마부가 목적지를 잘못 아신 게 아닐까? 지금이라도 마차를 멈추고…….”

    “아냐. 앤지. 우린 올바른 길로 가고 있어.”

    “뭐? 하지만 트라베 강의 방향이…….”

    “우리는 수도로 가지 않아.”

    미카엘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앤지는 당혹감에 그와 창 너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미카엘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것은 미처 보지 못했다.

    “테 데움으로 갈 거야. 전에 말했던 남부의 블랙웰 영지로.”

    “그게 무슨 소리야? 헤데스타드에 가지 않는다니! 카일은 지금 테 데움이 아닌 수도의 왕성 감옥에 갇혀 있……”

    앤지가 말을 잇지 못했다. 미카엘이 손수건을 그녀의 입에 대고 꾹 눌러 왔다. 코에서 진한 약품 냄새가 묻어났다. 앤지는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입술을 꼭 깨물고 버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시야가 급속히 흐려지고 있었다.

    “흐……. 으…… 읏…….”

    미카엘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의식이 멀어지는 가운데서도, 믿었던 그가 이렇게 그녀를 속이고 해하려 한다는 것이 너무도 충격이었다.

    “미안해, 앤지.”

    부드러운 음색이 꿈결처럼 이어졌다.

    “잠깐만 자고 있어. 그러면 도착해 있을 거야.”

    말갛게 젖은 녹안 위로, 선명한 자색 눈동자가 비쳤다. 미카엘이 정말로 미안한 듯 재차 속삭였다.

    “약속해. 네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우린 테 데움에서 행복할 수 있어.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스르르, 눈이 감겼다. 강한 화학 약품에 앤지는 더 버틸 수 없었다. 미카엘이 그녀를 부드럽게 보듬어 안고 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사랑해, 앤지.

    뿌리치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제발, 비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앤지는 결국 그의 품에서 축 늘어지고 말았다. 미카엘은 인형처럼 얌전해진 그녀를 품에 고쳐 안고 머리를 쓰다듬다 갈색 머리 가발을 벗겼다.

    곤히 잠든 것처럼 미동도 않는 어깨 위로 햇살처럼 눈부신 금발이 폭포수처럼 늘어졌다. 미카엘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금빛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휘감기를 반복했다. 본색을 드러낸 보랏빛 동공에는 섬뜩한 만족감이 떠올라 있었다.

    * * *

    헤데스타드의 블랙웰 공작저에는 며칠째 암운이 드리워져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저택에 면한 탑, 블랙웰 타워 1층에는 두 남녀가 암울한 분위기 속에 앉아 있었다. 사무엘 데르반 남작과 공작 부인 레티샤였다.

    레티샤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정신없이 배회했다. 손톱을 하도 물어뜯어 그 위에 바른 장미 파우더가 바닥이며 티 테이블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백부님,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카일렉은 대체 언제까지 취조를 받아야 하죠?”

    “상황이 좋지 않아. 그나마 모반 혐의는 증거 불충분으로 저택 수사까지 이어지진 않으니 다행이지. 자칫했다간 우리까지 큰일 날 뻔했다.”

    “일주일 후 황제의 국장이에요! 그때까지 카일렉이 풀려나지 못하면 우리 모두 큰일 나는 거 아닌가요?”

    그때 굳건히 닫혀 있던 살롱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모종의 회담을 나눌 때 쓰이는 타워라 레티샤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잔잔한 노크 소리는 귀에 익은 것이었다.

    “루이스입니다.”

    레티샤가 문을 벌컥 열고 그녀를 맞이했다. 하지만 문 앞에 선 자는 던스트 부인이 아니었다. 회색빛 두건을 뒤집어쓴 거대한 인영이 손에 들고 있던 뭔가를 빠르게 휘둘렀다.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레티샤는 그게 제 가슴에서 나온 것임을 몇 박자 늦게 깨달았다.

    “허……억……!”

    핏발 선 두 눈이 괴한의 등 뒤를 훑었다. 탑 앞에 서 있던 보초병들이 보이지 않았다. 레티샤는 가슴을 움켜쥐며 컥, 피를 한 번 더 토해 냈다. 쓰러지는 등 뒤에서 다른 비명이 울렸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었지만 그게 백부의 것임은 명백했다.

    남작과 공작 부인이 쓰러진 자리는 삽시간에 피 웅덩이로 변해 있었다. 괴한들은 피 묻은 검을 천으로 닦아 내고 벽난로의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

    암살은 우스울 만큼 단시간에 끝났다. 아무리 무방비하고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곤 해도, 공작의 영지 내에서 이런 습격이 가능할 리 없었다. 내부자의 소행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 끝났습니까?”

    뒤쪽으로 물러서 있던 루이스 던스트가 클로크의 모자를 내리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증거를 일절 남기지 말고, 앞서 이른 대로 시신은 영지 밖에서 처리하시오. 왕성에 다녀오다 반 공작파 무리에 당한 것처럼.”

    괴한들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들 모두 카일렉의 등 뒤를 늘 그림자처럼 수호하던 일명 그림자 친위대였다. 그중 알렌 하디와 미카엘 랜들, 두 사람만이 각자의 이유로 그 자리에 없었다.

    루이스는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떠나 본관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 테 데움에서 받아 본 미카엘의 서신이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 오늘 중 한 명만 더 마무리되면 그녀도 테 데움으로 돌아가야 할 터였다.

    어차피 수도의 영지는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었다. 주된 자산은 공작이 오래전부터 차근차근 국외 거점지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가문의 가장 값진 보물, 보석, 그리고 블랙 매스에 대한 기록은 모두 테 데움에 있었다.

    「루이스. 지금 테 데움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아쉽지만 공작님은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블랙웰 가문만은 반드시 지켜야겠지요. 돌아가신 에드워드 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대로 말입니다. 대대적인 정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 ‘정리’에는 이터니티는 물론 공작가 자체에도 호시탐탐 야욕을 드러냈던 사무엘 데르반 남작, 그리고 이터니티에 무용한 존재로 낙인찍힌 두 여자가 있었다. 3년 가까이 결혼 생활을 지속하고도 후사가 없던 레티샤 공작 부인, 그리고 샬럿 랜들이었다.

    아이의 부재는 둘 모두의 책임이 아니었으나 그 진실은 철저히 간과되었다. 루이스는 차디찬 돌바닥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야 확신이 섰다. 카일렉 님은 이터니티에 뜻이 없었다. 영생에 욕심이 없어서든, 당신 자신이 실험체가 되면서까지 시도해 볼 마음이 없어서든, 그 이유야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이터니티에 쓸모가 없는 장기말은 모두 버려져야 한다. 그게 설령 퀸일지라도. 퀸의 대체가 있으면 진짜 퀸이 없어도 상관없으니까. 다행히 그들에겐 카일렉 님을 대체할, 완벽한 또 하나의 후계자가 있었다.

    “에드워드 님이 당신 자신도 모르게 남겨 두고 가신 장자…… 법률상으론 서자지만 윈스턴 대공이 법안을 개정하면 적자로 올라설 수 있으니까.”

    루이스는 본관 서재로 돌아와 Kylek, 카일렉이 자수로 수놓인 책상 커버 천을 거뒀다. 그리고 다른 천을 꺼내 초크로 새로운 자수가 놓일 자리에 Mikael을 표시했다. 그러다 손으로 문질러 지우고는 옛 철자법으로 다시 썼다.

    하얀 천 위, Mikyle이란 글자에 희미한 푸른색이 덧입혀졌다.

    한 시간 뒤, 샬럿 랜들은 침실 바닥에 쓰러져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찻잔을 부술 듯 움켜쥔 손가락 사이, 한옆으로 기울어진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메이드복 앞섶은 방금 마신 찻물로 흥건히 젖어 있다.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뺨을 적시고 있었다.

    “흐윽…… 헉……”

    샬럿은 소리 없이 흐느꼈다. 벌벌 떨리는 두 눈동자에는 목에서 시작해 몸 안쪽까지 타들어 가는 고통, 죽어 가고 있다는 공포감 외에 다른 감정도 깃들어 있었다.

    대체 왜……. 누가 나를…… 무엇 때문에…….

    이유도 모른 채 독살당하는 서러움이 고적한 방 안에 처절한 메아리를 자아냈다. 믿어지지 않았다. 가까운 미래에 차기 공작 부인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었건만 지금은 황천길을 앞두고 있다니.

    목을 잡고 있던 샬럿의 손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얼굴 역시, 두 눈을 크게 홉뜬 채 카펫에 눌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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