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 (84/106)
  • #84

    섬에서의 마지막 날, 배를 타기 며칠 전쯤이었던가.

    비가 올 것처럼 잔뜩 흐린 초저녁이었다. 당시에 토마스란 이름의 심부름꾼이었던 그는 볼일을 마치고 지름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공작저와 연결된 숲을 가로질러 노스 쇼어 절벽으로 내려가면 좀 더 빨리 갈 수 있었다.

    소년은 숲 안쪽 깊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어디가 아픈 건지 걱정되어 등 뒤로 가까이 다가섰다가, 짙은 피비린내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소년은 덫에 걸려 버둥대는 작은 동물들의 목을 하나씩 잘라 내고 있었다. 목이 잘 잘리지 않을 때는 짐승의 가슴팍에 깊숙이 단도를 찔러 넣는 듯했다. 야생동물의 괴이한 신음과 단말마의 비명, 콧노래가 한데 섞인 끔찍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소년은 분명히 그 행위를 즐기고 있었다. 그가 있는 쪽을 등지고 앉아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희미하게 흐르는 콧노래와 몸짓으로, 소년이 얼마나 즐거워하고 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섬뜩함에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소년을 찾는지 다급한 발소리가 저만치서 들려왔다. 마르틴은 재빨리 거목 뒤에 몸을 숨겼다. 다행히도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며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클로크를 뒤집어쓴 여자가 소년의 팔을 잡아끌며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퍼석, 삽이 비에 젖은 땅을 파헤치는 소리가 연신 들렸다. 하지만 빗줄기가 점점 거세어지는 바람에 마르틴은 제대로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들키면 안 될 것 같다는 위기감 속에서, 그는 여자와 소년이 동물의 사체를 땅에 대강 묻고 그 자리를 뜰 때까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더라. 맞아. 왠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한 마디도 발설하지 않았지. 당시 레머디의 부모 역할을 했던 양부모에게도 입을 꾹 다물었었다.

    그저 무서웠던 것 같았다. 그보다 몇 살 어려 보였지만 왜인지, 웅크리고 앉아 살육을 자행하던 소년의 뒷모습으로부터 어떤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마르틴은 코트를 집어 든 채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모자챙 아래 살짝 보였던 보랏빛 눈동자, 반듯한 콧대 아래 단정하던 입술, 불량기 하나 없이 공손하던 몸짓과 돌아서던 뒷모습. 그 모든 것에서 기묘한 기시감이 일어났다.

    뇌리 한구석에서는 트리에스테 황제의 시신이 발견된 현장, 증거에 대해 경시청에서 들었던 브리핑이 떠올랐다. 황제는 피 묻은 손가락으로, 최후의 최후까지 자신이 알아챈 범인의 정체를 남기고자 애썼다. 그 결과 kyle, 네 글자가 나무 위에 획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현장에 있었던 근위대장이 경시청장에게 그림을 그려 보이며 의문을 표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손목이 이렇게,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각도가 이렇게 꺾인 것을 보면 글자를 첫 칸이 아니라 중간부터 채우려고 한 모양새입니다만…… kyle앞에 다른 글자가 더 있었는데 잉크가 닳아 버려 다른 펜으로 중간부터 쓴 것 같다고나 할까요. 이 경우에는 잉크가 핏자국이겠지요. 어쨌거나 이미 범인이 잡혔다니 저희로서는 더 문제를 제기할 이유가 없긴 합니다.

    마르틴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7년째 경시청에 몸담아 바닥부터 차곡차곡 올라온 연륜이, 어떤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브린은 기차역 사환에게서 서신을 받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편지를 뜯으면서도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배웅 나간 역에서 갑자기 편지라니…… 급하게 가져다 달라 부탁할 게 있는 걸까?”

    편지를 읽어 내려감에 따라 브린의 호기심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차분하던 얼굴도 혼비백산한 표정이 되며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앤지……!”

    「브린, 그리고 마르틴.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 나는 이미 트리에스테 국경을 넘는 기차에 타고 있을 거야. 미카엘을 뒤따라 헤데스타드에 가서 카일렉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고 그의 건강 상태도 호소해 보려고 해. 말도 없이 혼자 결정하고 저질러 버려서 정말 미안해. 한 번만 더 노아를 부탁할게.

    미카엘이 옆에 있으니 별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일주일이 넘어도 기별이 없으면 빈터가르와 트리에스테의 평화 수교 협정에 의거해 정식으로 수색을 요청해 줄 수 있을까?」

    브린은 눈을 깜빡였다. 무슨 뜻인지 그녀는 바로 이해했다. 레니에 8세가 암살되기 전에 체결되었던 양국 간 평화 수교 협정은 각각의 자국민이 상대편 국가에서 실종되거나 사고를 당했을 때, 자국 공권력과 연계시켜 수색 및 협력에 적극 임하겠다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범죄를 저질렀을 때 신병을 인도하는 사법적 절차의 협정 또한 그중 하나였다.

    「여러 가지로 늘 폐만 끼쳐서 정말 미안해.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분명 화를 낼 거라 생각하지만……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노아를 부탁해도 될까? 내가 패트리샤를 내 친딸처럼 사랑하는 만큼, 두 사람도 노아를 그렇게 여긴다는 걸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런 부탁은 정말로 염치가 없는 것이지. 하지만 노아가 한 사람의 어른으로 자랄 때까지 믿고 맡길 사람은 세상에 둘 뿐이니까 내 마음을 헤아려 주길 바랄게.」

    “앤지, 세상에. 제정신이 아니야. 어떻게…….”

    브린은 편지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노아를 패티와 함께 양육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어차피 늘 보모의 도움을 받고 있었고, 만에 하나 미래에 앤지가 누군가와 결혼을 하게 될 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녀와 마르틴이 노아를 계속 맡아 키울 생각까지 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앤지의 무모한 행동과 안위일 따름이었다.

    “기껏 거기서 빠져나왔는데 왜 다시 제 발로 가려는 거야, 앤지!”

    브린의 입이 커다란 탄식을 뿜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 이유가 충분히 짐작되었다. 앤지는 아직도 카일렉을 사랑하고 있었다. 공작가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 때문에 치를 떨고 영원한 작별을 고했었지만, 결국 이렇게 조우하게 된 이상 진짜 감정을 부정할 수만은 없었을 터였다.

    앤지는 아직 그를 사랑해. 공작 쪽이야 말할 나위도 없고.

    카일렉은 자신이 호송되는 중에도 앤지에게 불똥이 튀지 않게 현장을 철저히 수습했고, 빈터가르 측 근위대의 입막음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쓴 모양이었다. 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위기에서도, 최선을 다해 앤지의 존재를 숨겨서 그녀를 보호하고자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짜고짜 그 무서운 곳에 발을 디디면 어떡해! 차기 황제가 될 대공이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라고……. 절대 군주제로 되돌리려 혈안이 되어 있다는데. 게다가 그 윈스턴 대공이 황제의 암살 배후에 있다는 설까지 유력한 마당에!”

    브린은 편지를 손에 쥔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당장 아버지의 사무실에 사람을 보내고 마르틴에게도 기별을 줘야…….

    “브린!”

    그때 마르틴이 문을 박차고 황망히 들어섰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것이, 마차나 차를 타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려온 것 같았다.

    “마르틴? 이 시간에 무슨 일…… 아니, 마침 잘 왔어. 이 편지를 좀 봐!”

    “앤지는? 지금 어디 있어?”

    “기차 안에! 어서 이 편지부터 보라니까!”

    마르틴은 앤지의 필체를 곧장 알아보곤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의 미간이 무섭도록 험악해졌다. 그리고 곧장 운전사를 호출해 차를 준비하라 일렀다.

    “기차역에 가 봐야겠어.”

    “나도 함께 가! 애들은 시터가 보고 있으니까…… 가면서 얘기할 것도 있어.”

    브린을 말릴 틈도 없었다. 마르틴은 옆자리의 브린이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그가 경시청에 간 후, 앤지가 미카엘 랜들과 별채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그를 기차역까지 배웅해 주러 간 정황을 설명했다.

    “이를 어쩌지? 미카엘이란 사람이 옆에 있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니. 그 남자가 옆에 있어서 오히려 더 걱정이야, 브린.”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는 위험한 사람이야. 그리고 내 예감이 맞다면…….”

    마르틴이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마른세수를 했다.

    “트리에스테의 황제를 시해한 범인은 그 남자일 거야. 블랙웰 공작이 아니라.”

    “뭐? 그게 무슨…….”

    “트리에스테 사절단 명단 중 kyle이 있는 이름은 단둘뿐이었어. 하나는 카일렉(Kylek), 다른 한 명은 미카엘(Mikyle). Mikyel, Mikyle 둘 다 쓰이니까.”

    그때 기차역이 목전에 보였다. 마르틴은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플랫폼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하루에 한 번, 트리에스테 국경을 넘나드는 차편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트리에스테 제국민증을 지닌 사람과 그 동행인만 탑승이 가능한 기차였다.

    부부는 텅 빈 플랫폼을 나란히 바라보다 돌아섰다. 브린이 입술을 깨물다 운을 뗐다.

    “너무 걱정하지 마, 마르틴. 일단 당신이 경찰국을 통해 트리에스테에 공문이 가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버지께도 연락할게.”

    “그래야겠어. 공문을 넣고 허가를 받으면 내가 직접 트리에스테에 갈 생각이야.”

    마르틴은 기차 레일이 끝없이 이어진 지평선을 응시했다. 의식도 못 하는 새, 그는 신에게 간절히 빌고 있었다.

    제발 앤지에게 아무 일 없길……. 신이여,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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