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 (8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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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샬럿은 캐리어에 옷이며 소지품을 쓸어 넣으면서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던스트 부인의 속삭임이 아직도 귓전에 웅웅거렸다.

    -잘 들으렴, 살럿. 애도 기간 직후 윈스턴 대공이 차기 황제가 되는 즉시, 그동안 사생아를 인정하지 않던 현행법이 개정될 거다. 바로 대공 당신의 정부가 낳은 사생아를 호적에 올리고 계승권을 주기 위해서지. 만약 카일렉 님이 돌아가시면 미카엘이 적법한 장자로서 차기 공작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안됐지만 레티샤 마님은 후사가 없으니 혼인이 자동으로 종결되고 공작가를 떠날 수밖에. 그럼 너는 어떻게 되겠니, 살럿. 하루아침에 블랙웰 공작 부인이 되는 거야. 미카엘과 네가 그 자리에 순조롭게 올라갈 수 있도록 내가 최선을 다해 조력할 거란다.

    샬럿의 가슴이 다시 쿵, 쿵 뛰었다. 그녀는 진실에는 철저히 무지한 채 들뜨는 가슴을 누르려 애썼다. 샬럿 랜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그 순간만은 공작 부인으로서의 미래를 꿈꾸며 마음껏 설렐 수가 있었다.

    * * *

    앤지는 기차역 플랫폼 카페에 앉아 편지를 휘갈겨 썼다. 브린은 미카엘을 역에 배웅해 주는 것도 반대했었다.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 가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안톤 아저씨가 마차로 데려다줄 테니 괜찮다, 몇 번이나 이른 뒤에야 간신히 역으로 올 수 있었다.

    노아가 벌써부터 보고 싶어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아이는 오랜만에 엄마 품에 안겨 실컷 재잘대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보모가 노아를 침대에 눕히는 것까지 보고 나서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브린은 뭐가 그리 불안한지, 패티를 안은 채 마차가 떠날 때까지 게이트에서 떠나질 않았다. 마치 그녀의 은밀한 여정을 막연히 예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차에 타면서도 심란했다. 그나마 마르틴이 경시청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가 있었다면 역까지 따라왔을 터였다.

    앤지는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미카엘이 플랫폼에서 표를 구입하고 있었다. 조만간 기차가 출발할 터였다. 일부러 심부름을 청해 먼 가게까지 보낸 안톤 아저씨도 곧 돌아올 것이다.

    사환 몇 명이 신문 가판대 앞에 모여 서 있었다. 앤지는 그쪽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부리나케 달려와 눈을 빛냈다. 앤지가 부유한 집안 아가씨로 보였는지 꽤 두둑한 수고비를 주리라 기대하는 것 같았다.

    “이걸 루벤빌가(街), 이 주소로 가져가서 브린 실바에게 전해 주세요. 반드시 실바 부인에게 직접 전해야 합니다.”

    사환은 앤지가 건네는 돈에 기뻐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통상, 의뢰인에게 받은 선불금의 절반을 도착지에서 받는 게 관행이었다. 그런데 방금 받은 선불만 해도 일반 금액의 두 배였다. 소년은 발에 날개가 달린 듯 신이 나서 역사를 빠져나갔다. 잠시 후 미카엘이 다가와 표를 보여 주었다.

    “앤지, 지금이야. 서둘러.”

    마부 안톤이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그녀는 모자 끈을 단단히 매고 미카엘이 이끄는 대로 기차 위에 올랐다. 시타델을 경유하는 환승 차량은 자리가 이미 절반 넘게 차 있었다. 기차는 뜸 들이지 않고 바로 움직였다.

    앤지는 미카엘의 맞은편에 앉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일부러 1등석 표를 끊었기에, 그와 단둘이 프라이빗 객실에 자리할 수 있었다.

    “앤지. 괜찮아? 안색이 창백해.”

    미카엘이 걱정스레 물으며 일등석마다 구비된 물을 건네주었다. 앤지는 물을 받아 마신 후 모자 끈을 풀어 내렸다. 하지만 갈색 가발은 벗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제는 정말 되돌릴 수 없었다. 노아가 깨어나면 엄마를 찾진 않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제롬 아저씨와도 확실히 연락이 된 거지?”

    “비서관님과는 국경 너머 트리에스테에서 합류하기로 했어. 그 역시 네가 와 준 걸 알면 무척 기뻐할 거야.”

    “그럴까? 새벽에 날 시타델에 데려다줬을 때는 당분간 아미티지가에서 은신하고 있으라 당부했었는데…….”

    “네 안전을 생각해서 그러셨겠지. 그 역시 간절한 심정일 거야. 너도 알다시피 그분만큼 블랙웰에 충성해 온 사람은 없으니까……. 컬리넌 섬에서부터 에드워드 님의 집사로 시작해 지금의 공작 비서관이 되기까지, 카일렉을 극진히 보살펴 왔으니.”

    앤지는 수긍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감을 떨칠 순 없었다. 제발 아무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그녀는 커다란 한숨과 함께 미카엘을 올려다보았다.

    “미카엘. 정말 고마워. 지금은 네게 많은 걸 빚지고 있지만, 언젠가 꼭 은혜를 갚을 날이 있기를 바래. 진심이야.”

    “그런 말 하지 마, 앤지. 나 역시 트리에스테가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고 빈터가르처럼 변화하길 원해. 이번에 빈터가르에 와 본 뒤 절실히 깨달았어. 카일렉 역시 혐의가 벗겨져 풀려나고 계획대로 내각제가 자리 잡고…… 너 역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앤지.”

    “고마워, 미카엘.”

    그 순간 레티샤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카엘, 처음 레반에 온 게 레티샤의 명령이라 했었지? 결국 그 명에 불복하게 된 상황인데…… 괜찮겠어?”

    앤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와서 그의 안전에 생각이 미치다니 미카엘을 볼 낯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전혀 상관없어. 어차피 내 주인은 공작이었지 공작 부인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앤지.”

    그리고 다시 섬에서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

    “모든 게 잘 될 거야, 앤지. 마음을 편히 가져.”

    앤지는 그의 위로에 엷은 미소로 화답했다. 기차가 속도를 높여감에 따라 창 너머의 풍경도 빠르게 스쳐 갔다. 11월을 코앞에 둔 시타델 강변은 푸른 수면에 낙엽이 드문드문 남은 가지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하지만 앤지의 가슴은 그 평화로운 광경을 보면서도 좀처럼 진정되지 못했다. 자꾸만 엄습하는 불안감을 누를 수가 없었다. 제 발로 괴물 소굴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처럼 가슴이 묵직하게 막혀 왔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카일렉의 편이 훨씬 더 많다고 했으니까 반드시 누명을 벗고 풀려날 수 있어.

    앤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가슴께를 꼭 누르고,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미카엘은 그런 그녀를 말없이 응시했다. 입가 한쪽이 보일 듯 말 듯, 엷게 호를 그리고 있었다.

    * * *

    경시청은 오전부터 떠들썩했다. 트리에스테의 사절단이 황제의 시신, 시해범으로 지목된 블랙웰 공작의 신병을 확보해 국경을 넘어갔다는 소식을 마르틴도 재차 전해 들은 차였다.

    “전대미문의 사건 아닌가. 사절단 방문 중에 그런 국가적인 참변을 당했으니 빈터가르 왕실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야.”

    “그나마 유일한 용의자가 내부자였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빈터가르는 물론이고 비첸틴, 아제르반 같은 인접국의 자객이었다면 제3차 대륙전이 선포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나저나 범인이 그 블랙웰 공작이라니 정말 놀랍긴 하군요. 트리에스테의 고위 귀족에다 황제의 오른팔 격인 인물이었다니.”

    다들 업무도 미뤄 두고 혀를 내두르며 사건에 대해 갑론을박하기 바빴다. 마르틴은 시끄러운 탕비실을 홀로 나와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아까 오전에 찾아왔던 사내가 자꾸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짧게 인사를 나눌 때는 중절모를 눌러 쓰고 있어서 자세히 보지 못했다. 마침 지나가던 경시청 차가 빵빵거리며 그를 불렀던 탓에, 사내가 게이트 앞에서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는 것도 미처 보지 못했다. 집사 헬렌의 말로는 인상이 매우 서글서글하고 온화한 인상의 미남이라 했었다.

    미카엘 랜들이라고 했던가. 이상해.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지. 분명 낯이 익은 것 같은데 어디서 봤을까.

    그 순간 마르틴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두 눈이 뒤늦게 진실을 깨우치고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빈터가르에서 본 적이 없다면 당연히 컬리넌 섬에 있는 동안 봤겠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기억의 실마리가 거짓말처럼 술술 풀려 나갔다. 그는 두 손을 깍지 끼고 팔꿈치를 책상에 짚은 채 과거에 집중하려 애썼다. 열여섯, 11년 전 배를 타고 탈출하기 전까지 공작저나 마을에서 만났던 남자아이들을 생각해 봐.

    미카엘이란 남자는 아무리 많게 봐도 20대 초중반, 그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였다. 그러니 자신이 열여섯이었을 때 그는 열두세 살 정도였을 것이다.

    기억 속 여러 장면이 환시처럼 차례대로 나타났다 스러지길 반복했다. 과거의 잔상은 어느 봄날을 훑어 내리다 거기서 멈췄다.

    나붓하게 자리한 언덕, 그 아래 베어 낸 듯한 야트막한 절벽, 살랑살랑 불던 봄바람을 맞으며 그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날이었다. 고개를 숙이면 아래쪽 마을, 집 마당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거기 앉을 때마다 늘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양지바른 곳에 옹송그리고 앉은 고양이라든가, 의자에 앉아 뜨개질감을 손에 든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낙, 그리고 늘 홀로 앉아 있던 소년이 그랬다.

    지그시 감고 있던 마르틴의 눈이 확 떠졌다. 마을 끝자락에는 늘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열두세 살 남짓한 소년이 있었다. 알비노 병을 앓았던 흔적이라 했던가, 눈 색깔이 무척 특이했었다.

    보라색 눈동자였어.

    깊숙이 눌러쓴 중절모 아래, 언뜻 비쳤던 눈 색깔은 분명 옅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마르틴은 저도 모르게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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