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 (8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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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가족을 해치는 것이 아닌 이상 그건 걱정하지 않아. 내 증언이 실제로 어떤 영향이 있을지, 오히려 카일을 더 불리한 상황으로 몰아넣진 않을지 그것만이 염려될 뿐이야. 그들이 볼 때 나는 카일의 옛 연인에 불과할 테니까. 어쩌면 정부로 간주할지도 모르지. 어젯밤 그라츠에서 만난 사실 자체도 얼마든지 불미스럽게 해석할 수 있어. 내가 그를 위해 위증을 한다고 주장할지도 몰라.”

    미카엘은 잠시 말을 잃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때 앤지가 다시 운을 뗐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만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만약 내가 트리에스테에 간다면…… 입국할 때는 네가 있지만 다시 빈터가르로 돌아올 때는? 그때도 별 탈 없이 국경을 넘을 수 있을까?”

    “네가 빈터가르 국민이니 문제없을 거야. 레니에 8세가 서거 전 빈터가르 왕실과 맺은 평화 수교 협정이 있으니까. 협정은 그날 인장을 찍은 직후부터 발동돼.”

    앤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생각이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때 미카엘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사실 내게 하나 더 고백할 것이 있어. 그는…… 카일렉은 사실 내 이복동생이야. 우린 어머니만 다를 뿐, 피를 나눈 형제였어.”

    “뭐? 그게 무슨…….”

    앤지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반문했다. 두 눈에 경악이 가득했다. 미카엘의 기혼 소식을 들었을 때와는 다른 충격이었다.

    “에드워드 님이 유제니아 공작 부인과 결혼하기 직전 내 생모와……. 만취한 상태라서 기억도 못 하고 있었다고 해. 내 어머니 에디스 랜들은 헬퍼였어. 이터니티에 대해 알고 있었지. 임신한 걸 안 순간, 내가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 병에 걸린 척 공작저를 나와서 이모 헤스터의 거처에서 숨어 지냈던 거야. 날 낳고 바로 돌아가셨지만……. 이모가 날 친아들처럼 보살펴 주셨고, 내가 자라면서 내 출생과 이터니티에 대해 조금씩 알려 주셨어.”

    “카일도…… 그도 알고 있어?”

    “알고 있어. 공작저의 사람들 모두. 그는 관례에 따라 지원금과 독립을 종용했지만 나는 공작저에 머물게 해 달라고 했어. 내 권리를 주장할 생각도 없었고, 설령 그렇다 해도 트리에스테는 사생아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

    “나는 그저 두려웠어. 익숙한 환경을 등지고 멀리 떠나는 것이. 섬에 불이 번졌을 때 헤스터 이모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족도 잃고……. 더는 의지할 사람이 없었거든. 그래서 카일렉이 수도의 영지로 떠나서 정착하는 시점부터 나는 테 데움에만 머물며 다른 사람들처럼 묵묵히 일했어. 최대한 그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그럼 카일의 친위대엔 어떻게 소속된 거야?”

    “그림자 친위대는 제롬의 권유였어. 아주 어릴 적부터 헤스터 이모가 늘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말라고 당부해서 그런지, 내 기척은 숨기고 타인의 기를 포착하는 데 능하게 됐거든.”

    “그랬구나…….”

    앤지는 말끝을 흐렸다. 미카엘이 매우 측은하게 느껴졌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친부인 에드워드 님도 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사망했다. 게다가 유일한 가족이었던 헤스터 랜들까지 잃었으니 실제로 달리 선택지가 없었을 터였다.

    “솔직히 형제로서의 우애나 정…… 그런 감정은 없어.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이대로라면, 카일렉 경 자신뿐 아니라 블랙웰 가 자체가 멸문될 수도 있어. 만약 윈스턴 대공이 관습에 따른 두 달간의 추모 기간이 끝나고 왕위를 승계하게 되면, 트리에스테는 그야말로 끔찍한 곳이 되어 버릴 거야.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건 블랙웰 가의 가솔들 모두 같은 마음일 거라 믿어.”

    “알겠어. 널 따라 헤데스타드에 갈게, 미카엘.”

    “정말이야?”

    “혹시 카일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알고 있어? 어제 그라츠에서…… 내 앞에서 각혈을 했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숨겼거든. 이터니티 약물의 부작용이 재발한 것일지도 몰라.”

    “뭐? 전혀 몰랐어.”

    미카엘이 언성을 높였다. 정말 놀란 것 같았다.

    “비공식 친위대라 실제로 마주칠 일은 거의 없어. 하지만 그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었는데……. 별일 아닐 수도 있어. 기침을 심하게 했다거나 폐 쪽에 일시적인 피로가 쌓였다거나.”

    “그럼 정말 다행이야. 만에 하나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구금 중 조치를 받는 것도 확인해야 할 텐데. 만약 끝까지 투옥되면, 일단 빈터가르로 돌아와 모두와 의논해 볼 생각이야. 그때는 다시 국경을 넘어갈 수 있게 도와줄 거지?”

    “당연하지. 그 점은 염려하지 마.”

    노아를 두고 트리에스테에 오래 있을 순 없었다. 물론 노아에 대해서는 철저히 입을 다물 생각이었다. 미카엘은 물론,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을 결심이었다. 그를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기가 더 이상 어떤 위험에도 노출될 염려가 없다고 확신할 때까지는 반드시 함구해야 한다.

    “일단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증언해 볼 생각이지만……. 되든 안 되든, 해 봐야 알 테니까.”

    앤지가 심지 굳은 얼굴로 말을 마쳤다.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가 다시 정색했다.

    “하지만 이 집 사람들이 네가 가는 걸 찬성할까? 사촌 가족이라 했었지?”

    “응. 아마 반대할 거야. 그래서 기차역에 도착해 편지를 보낼 생각이야. 며칠만 다녀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편지를 보게 되면 말도 없이 덜컥 트리에스테까지 갔다고 큰 소란이 일 터였다. 그녀도 이 계획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인지는 잘 알았다. 하지만 역시 카일의 상황을 이대로 수수방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순 없었다. 그의 손에 묻어 있던 피만 아니었어도 거기까지 가겠다고 나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잠깐만 바깥에서 기다려 줘. 간단한 짐만 챙겨서 널 기차역까지 배웅해 주겠다고 할 테니까.”

    “앤지. 정말 고마워!”

    미카엘이 그녀의 두 손을 잡고 활짝 웃었다. 재회하고 처음으로 보는 과거의 미소였다. 선하고 따스한, 햇빛처럼 맑고 환한 웃음이다. 미카엘은 주택가 너머 공원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하곤 저택의 게이트를 나섰다.

    앤지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별관을 나와 아기방으로 먼저 향했다. 어림잡아 일주일, 적어도 며칠간은 또다시 노아와 떨어지게 된다니 가슴이 아팠다.

    노아와 패티는 방에 없었다. 패트리샤는 한참 전에 깨어나 브린의 품에 안겨 젖을 먹고 있었다. 노아도 보모 품에 안겨 있다가 그녀를 보자마자 손을 크게 휘저었다.

    “엄마!”

    아이는 꺄아, 환희의 비명을 지르며 그녀에게 곧장 안겼다.

    “노아, 잘 있었어? 삼촌, 숙모 말씀 잘 듣고 패티랑 잘 놀았어?”

    “으응. 엄마 왜 이제 왔어? 보고 싶어써…….”

    “미안해, 노아. 우리 아기…… 엄마가 정말 미안해.”

    앤지는 노아의 얼굴 여기저기 입을 맞추곤 정수리에 코를 폭 묻었다.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노아, 아빠에게 잠시만 다녀올게. 만약 아빠가 정말 엄마에게 말한 그대로라면…… 엄마가 믿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그럼 노아도 아빠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 * *

    테 데움의 공작저에는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평소에도 활기 없이 고적한 곳이었지만 그날은 더더욱 괴괴한 공기에 휩싸여 있었다.

    루이스 던스트는 은밀하게 전해진 서신을 뜯어 읽고 얼굴을 굳혔다. 편지는 각각 제롬에게서, 그리고 미카엘로부터 와 있었다. 전자는 카일렉이 황제 시해 및 모반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절망적인 내용이었다. 다행히 후자는 그 위기를 상쇄시킬 희망이 엿보이는 서신이다.

    “미카엘. 역시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어.”

    그녀는 저택 내 모든 헬퍼들을 불러 모아 대략적인 상황을 알리고 수도로 가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미카엘의 처, 살럿을 불러 신속히 짐을 싸라고 지시했다.

    “네? 저도 수도에 간다고요?”

    “가문이 무너질 수도 있는 전례 없는 위기 상황이다. 야스민과 다른 집사들은 테 데움을 지키고, 나와 몇 명은 헤데스타드 본저로 가서 공작님이 처한 상황을 알아봐야겠어.”

    “하지만 미카엘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미카엘 역시 수도의 영지로 오기로 했다. 오늘 안에 출발한다고 했으니 해지기 전에는 도착할 거다. 비록 이런 상황이긴 하지만 너와 미카엘에게 큰 변화가 있을 거란다.”

    루이스는 주위를 둘러보고 그녀와 단둘뿐인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샬럿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루이스의 얘기를 듣는 내내 샬럿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동요를 숨길 여유조차 없었다. 샬럿은 다람쥐처럼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엄청난 변화라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동시에 양심의 가책도 들었다. 그 가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카일렉 님이 풀려나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니.

    “내가 보기에 카일렉 님은 가망이 없어. 불충한 말이겠으나 어쩔 수 없다. 우리는 가문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고 차선책을 궁리해야 하니까.”

    “…….”

    “그렇게 멍하니 있을 시간이 없어. 어서 가서 준비해. 방금 들은 말은 절대 발설해선 안 된다. 확실해지기 전에 잘못 입을 놀렸다간 네 목숨이 위험해질 거야.”

    “네, 알겠어요. 던스트 부인. 반드시 함구하겠습니다.”

    샬럿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황급히 방을 나갔다. 그녀가 말한 대로 큰 위기 상황이었다. 만약 체포당한 공작님이 시해범으로 확정되어 제국법에 따라 교수형에 처해지게 된다면.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떨렸다. 모든 면에서 전지전능, 완벽해 보이던 공작님이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니.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그녀와 미카엘에겐 엄청난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공작님께는 너무도 죄스러운 일이 되겠지만 그들 부부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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