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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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카엘……! 미카엘이요?”

    앤지가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그 뒤를 따라 일어나 서재 문을 열었다. 그들로서는 레티샤 블랙웰의 끄나풀이 아닌지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헬렌은 주인 나리가 묻기 전에 먼저 답을 들려주었다.

    “게이트에서 몸수색을 철저히 마쳤고 트리에스테 제국 시민 신분증과 빈터가르 체류 인장도 받아 두었습니다.”

    “만나 볼게요. 미카엘은 제 친구예요. 컬리넌 섬에서도 절 도와줬고, 방금 말씀드렸듯 어젯밤에도 제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에요.”

    카일렉 쪽 사람도 암살자를 동시에 막았다고 했으나 그것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앤지는 모두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마디 덧붙였다.

    “제 생명의 은인이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헬렌 아주머니. 제가 금방 건너갈 테니 건너편 찻집에서 기다려 달라고 해 주시겠어요?”

    “아니 들어오라고 해, 헬렌. 앤지, 별관의 접객실에서 만나는 게 좋겠어. 그 편이 우리로서도 안심이 될 것 같아. 바깥에 경비를 세워 두고 나도 대기하고 있을게. 브린과 아버님은 여기 계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마르틴의 말에, 앤지는 더 토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직접 차를 준비해 서둘러 별관으로 향했다.

    미카엘은 그녀를 보자마자 깊은 안도감부터 표했다. 앤지가 캐서린 할머니의 집 앞에서 그렇게 홀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그 역시 뒤늦게 인지하고 있었다.

    “곧바로 빈터가르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었어. 네가 남긴 편지를 보고 레티샤의 다른 첩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는 마침 카일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고, 앤지가 이동 중 뿌렸던 분필 가루가 추격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음을 언급했다. 그녀는 내심 자책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카일이란 사실을 알고 간 거야. 그의 필체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어. 하지만 그가…… 날 해칠지, 어떻게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흔적을 남겨 둬야 했어. 그때는 내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어떨지 확신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해해, 앤지. 나 역시 큰 충격을 받았어. 어제는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나는 사실 그의 친위대 중 한 명이야. 레티샤가 갑자기 네가 만든 레이스를 보여 주면서 널 찾아내라고 비밀 지시를 내렸을 때만 해도…… 널 해치려고 할 줄은 몰랐어. 널 만나면 멀리 떠나라고 설득하겠다고만 했었거든.”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집은 경비가 무척 삼엄해. 당분간 외부와 격리되어 생활할 테니 레티샤가 크게 두렵지는 않아. 나 때문에 이 집 사람들에게 해가 갈까 그것만이 걱정될 뿐……. 솔직히 카일도 걱정돼.”

    앤지가 미카엘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제롬은 카일이 정치적인 누명을 썼다고 하던데, 그게 맞는 거지? 그럼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누명을 벗고 풀려날 수 있는 거겠지?”

    “그건 누구도 알 수 없어. 나도 해가 지기 전까지는 트리에스테로 돌아가야 해. 블랙웰 공작가의 사병 소속이니까 지금 상황으로 봐서…… 만약 오늘 안에 귀국하지 않으면 나 역시 체포되어 취조를 당할 수도 있어. 황제 시해에 어떤 식으로든 가담을 했는지 여부를 철저히 조사하겠지.”

    “그런…… 그쪽 상황은 전혀 모르지만 어떻게든 누명을 벗어야 돼. 어제 그라츠에서 카일이 분명히 말했어. 그는 더 나은 국가를 위해, 레니에 8세를 오랜 기간 설득해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고……. 올해 안에 황실이 폐지될 것이고, 이터니티도 완전히 없앨 거라고. 지금까지 그를 위해 레티샤와 정략혼을 맺었고 이터니티를 이어 갈 것처럼 공작저의 헬퍼들을 안심시켜 왔다고 했어. 나는 그 말을 믿어.”

    미카엘의 보랏빛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그 밝은 빛이 반가움인지, 다른 어떤 감정인지 정확히 읽어 낼 순 없었다. 하지만 뭐가 됐든 악의는 아닐 터였다. 그가 어떤 이유로든 카일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다면, 굳이 섬의 화재 이후에도 블랙웰 공작가에 남아 그의 친위대가 되진 않았으리라.

    “어제 그라츠에서 그런 얘기를 나누었구나. 그는 여전히 널 잊지 못하고 있었어. 그렇지? 확실히…… 지난 3년 내내 레티샤와 남남처럼 내외하는 눈치였어. 언제 이혼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앤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어제 정식으로 이혼할 뜻도 밝혔어. 황실이 폐지되면 빈터가르처럼 내각제를 도입해 바람직한 입헌 군주제로 거듭나게 만들 거라 했었고……. 이터니티에는 처음부터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고 해. 그 말 역시 믿어. 그가 정말 이터니티를 이어 가고자 했다면 레티샤와…….”

    앤지가 잠시 틈을 두었다. 차마 그 말까지 아무렇지 않게 나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최대한 간접적인 표현으로 에둘러 말했다.

    “레티샤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이터니티를 계승하려 했겠지. 그래서…… 레티샤와 이혼하고 둘 사이가 완전히 정리되면, 그때 돌아오라고 했어.”

    “돌아오라고 했다고?”

    “응.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떳떳이 돌아올 수 있을 때 와 달라고 했어.”

    앤지가 괴로운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를 사랑해.”

    “…….”

    “그와 절대 함께할 수 없다 생각했어. 그의 선대와 가문이 저지른 악행 때문에, 도저히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믿었어. 하지만…….”

    “어제 깨달았구나. 그에 대한 감정이 여전하다는 걸.”

    앤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엘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를 볼 낯이 없었다. 섬에서 그에게 고백을 받았던 순간, 저택에서 탈출하게 도와줬던 것, 바로 어제만 해도 레티샤의 지시를 어기고 그녀의 목숨을 구해 준 일이 뇌리에서 주마등처럼 차례대로 스쳤다.

    “미안해, 미카엘. 내 마음을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감정이란 것 자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이렇게 괴로울 일도, 번민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새삼 운명의 기구함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3년 만에 다시 만나 이렇듯, 그녀 자신도 애써 부정해 왔던 감정을 재차 깨닫게 된 순간 그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다니.

    “아냐. 혹시 전에 내가 했던 고백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러고 보니 네게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어. 실은…….”

    미카엘이 담담하게 자신의 신변 얘기를 털어놓았다.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예전같이 소년처럼 해맑은 웃음은 아니었지만 앤지를 보는 눈에는 여전히 온기가 어렸다.

    “난 2년 전에 이미 결혼했어. 정확히는 2년 반 전.”

    “뭐……?”

    앤지는 하마터면 찻잔을 엎을 뻔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카일에 대한 불안도 잊고 눈을 크게 떴다. 미카엘이 결혼했다니, 전혀 몰랐었다. 하지만 그가 말해 주지 않았으니 몰랐던 게 당연했다. 빈터가르에 있는 동안 그가 어떻게 트리에스테에서 살았는지 애당초 알 도리가 없었다.

    “결혼했다고? 그게 정말이야?”

    “응. 메이드 중 샬럿이란 아가씨가 있었어. 처음부터 헤데스타드의 영지에 있던 메이드니까 너는 전혀 모를 거야. 아직 아이는 없지만 어쨌든……. 나도 이제 어엿한 가정을 이룬 건 사실이야. 어제는 이런 얘기를 할 경황이 없었지.”

    “미카엘, 정말 잘됐어. 늦었지만 진심으로 축하해!”

    진심이었다. 그에게 새로운 인연이 나타나 사랑을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됐다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미카엘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랐다.

    “네가 아직 귀환하지 않아서 아내 분이 더 걱정하고 계실 것 같아. 오늘 안에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시겠지?”

    “샬럿은 테 데움에 있어. 남쪽 스카보르 영지의 호숫가 별장인데 던스트 부인과 야스민, 섬에서의 헬퍼 대부분 그곳에 있지.”

    “그렇구나.”

    앤지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때는 좋은 사람들이라 생각했지만, 기실 던스트 부인과 야스민이야말로 레머디를 수급하고 관리했던 메인 헬퍼들이었다. 카일의 계획대로 이터니티 의식 역시 확실히 사라진다 해도, 그들이 행했던 일까지 무로 돌아갈 순 없었다. 그들 역시 어떤 식으로든 속죄해야 할 터였다.

    “이제 레머디는 어디에도 없어, 앤지. 헬퍼들도 결국은 이터니티를 포기할 거야.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하고 섭리대로 따르게 되는 건 결국 시간문제일 뿐이니까.”

    “그럴 거라고 믿어. 모든 게 결국은 순리대로 풀려 갈 테니까. 카일만 풀려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어쩌지? 어떻게 해야 그를…….”

    그녀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진심으로 번민하는 그 모습에, 미카엘이 불쑥 제안했다.

    “앤지. 그럼 나와 트리에스테로 가지 않겠어? 네가 헤데스타드 황궁에 가서 그를 변호하는 데 힘을 실어 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야. 블랙웰가의 편인 추밀원 귀족들, 대법관을 알현해 어제 그라츠에서 그가 한 얘기를 증언해 줘.”

    앤지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언뜻 듣기엔 허황된 말이었다. 그녀가 뭐라고 그들 앞에서 증언을 해 준단 말인가. 그녀의 속을 읽은 듯 미카엘이 좀 더 열띤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레니에 8세와 블랙웰 쪽 가신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거야. 레티샤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마. 네가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내가 널 철저히 호위할 테니 안전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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