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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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헌 군주제를 옹호해 왔던 블랙웰 쪽 귀족들은 말끝을 흐렸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들과 정치적 신념상 대척점을 이루던 윈스턴 대공 쪽 가신들이 뭐든 만들어 냈을 터였다. 어쩌면 혈흔의 증거조차 그들이 조작해 낸 게 아닌가 의심이 갔으나, 시신의 발견 현장에는 빈터가르 왕실 근위대도 있었기에 그 가능성은 접어야 했다.

    윈스턴 대공에게 뭔가 흑막이 있는 것임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폐하가 혈흔으로 남긴 글자에 대해서만은 그들도 영문을 몰랐다.

    레니에 8세는 빈터가르로 떠나기 전까지도 그들과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무역과 문화적 교류의 전면적인 개방과 같은, 세부적인 협정에 대해서는 망설이고 있었지만 내각제의 도입으로는 그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의견이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었다.

    “송구하지만 다들 물러가 주셔야겠습니다. 잠시 후 용의자 심문이 있을 예정입니다. 아시다시피 황제 시해와 같은 중죄는 재판 없이 비공개 심문만으로 다스려집니다. 자백을 받아 내면 바로 집행일이 정해지게 되겠지요.”

    버틀랜드 공작이 근위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정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재차 이어진 축객령에, 가신들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착잡한 얼굴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사무엘 데르반 남작, 레티샤의 백부이자 블랙웰 가의 방계도 있었다. 그는 낭패감 어린 얼굴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같은 블랙웰 쪽이라도 다들 남작을 평소 경계하고 불신했기에, 외따로 떨어진 모습이 이상해 보이진 않았다. 마지못해 용의자를 호송해 와야 했던 머레이 켄트 공작이 일행을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큰일이군요. 카일렉 경이 잘 버틸 수 있을지……. 여기서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까지 행해질 겁니다.”

    하지만 그가 자백할 리 없었다. 그동안 레니에 8세와 블랙웰 편에서 평화로운 국가 전복을 꾀해 왔던 귀족들은 카일렉이 무고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카일은 지금 덫에 걸려 있었다. 어떻게 해야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나마 심문을 맡은 버틀랜드 공작은 중립파였지만, 윈스턴 대공의 입김에도 그 입장을 고수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가신들은 어두운 얼굴로 서로 시선만 교환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다들 불안에 떨고 있었다.

    황제는 서거했고, 그가 시류에 맞게 트리에스테를 이끌게끔 보조하던 오른팔은 졸지에 살인 용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 모든 흑막 뒤에 있는 자는 틀림없이 윈스턴 대공이었다.

    그는 나라를 엄격한 신분제 봉건 체제로 되돌려 애쓰는, 철저한 절대 군주 옹호자였다. 레니에 8세가 죽은 지금, 그 절대 군주가 누가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켄트 공작은 다시 무겁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큰일이군요. 전례 없던 위기입니다.”

    블랙웰 공작뿐 아니라 자칫하면 그들 모두, 나아가 나라 전체가 몰락할 위기에 있었다. 지금이라도 진짜 시해자를 색출해 낼 수 있다면 상황은 반전될 터였다. 하지만 이미 공작이 범인으로 확정되다시피 한 지금, 무슨 수로 진범을 찾는단 말인가.

    * * *

    앤지는 그날 밤 제롬의 도움으로 시타델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수도로 가는 길에 레반에 들러 캐서린 할머니와 리네 아주머니의 안전을 제일 먼저 확인했다.

    캐서린 베케트는 잠에 취해 처음부터 아무것도 몰랐고, 리네 아주머니는 갑자기 등유 램프가 확 꺼지더니 그 직후 정신을 잃었다고 말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집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고 램프도 켜져 있었노라 얼떨떨한 얼굴로 털어놓았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 갑자기 쓰러졌다가 나도 모르게 소파에 가서 누웠던 걸까? 요새 두통이 간간이 있긴 했지만 이런 증상이 있을 수도 있는지. 참, 별일이 다 있구나.

    앤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두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다음 달에 브린과 마르틴, 노아와 패티까지 다 데리고 오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미카엘은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 어디 있는지 궁금했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제롬이 붙인 사설 호위병 때문인지, 시타델에 도착하기까지 누구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앤지 역시, 모자를 꾹 눌러쓴 채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레티샤가 언제 다시 자객을 보낼지 몰랐다.

    가슴에 납덩이가 가라앉은 것 같았다. 생명의 위협에 대한 공포, 노아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일념 외에도 누군가의 잔상이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평소처럼 서늘하고 의연한 태도로 경찰에게 호송되던 카일의 뒷모습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앤지는 아미티지 가의 저택에 들어서고 나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마침 빌렘 아미티지 씨까지 모두가 집에 있었고 브린은 그녀를 보자마자 와락 끌어안았다.

    “앤지! 걱정했었어! 어젯밤 꿈자리가 너무 사나웠거든. 별일 없는지 막 편지를 보내려던 참이었어. 트리에스테 사절단 중 일부가 오늘 새벽 헤데스타드로 떠났대! 혹시 알고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거야?”

    “실은 어젯밤 사건이 있었어……. 그 전에 노아를 먼저 보고 올게.”

    “그렇게 해. 아기방에서 패티와 자고 있어. 엄마 보면 깜짝 놀랄 거야. 가끔 엄마를 찾을 때마다 손가락을 접어 가며 몇 밤 남았다고 달래곤 했거든.”

    포동포동한 두 아이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한 살 된 아기 패티는 사지를 대자로 벌리고 색색거렸고, 노아는 그 옆에 반쯤 엎드려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댄 손가락이 너무도 앙증맞고 사랑스러웠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며 눈물이 차올랐다. 앤지는 꼭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조심조심, 노아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패티에게도 똑같이 해 준 다음 그녀는 브린을 따라 방을 나섰다. 아이의 아빠에 대해 나눌 얘기가 벌써부터 마음을 무겁게 했다.

    네 사람은 찻잔 속 차가 싸늘하게 식도록 대화에 깊이 골몰해 있었다. 다들 레니에 8세가 시해되고 카일렉이 그 용의자로 수배령이 내려졌던 것까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밤 그라츠에서의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던 바였다.

    잠시간의 침묵 후 빌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앤지가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가장 현실적인 조언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레티샤 공작 부인이 다시 자객을 보낼 수는 없을 거야. 블랙웰 공작가가 지금 위기에 빠져 있으니 그녀도 운신이 자유롭지 않을 거고, 친정인 데르반 가문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을 거다. 그래도 일단 보안을 강화해 둘 테니 앤지도 당분간 집 안에만 있는 게 좋겠어.”

    “그래, 앤지. 작업실도 비워 두는 게 좋겠어.”

    “작업 의뢰도 받지 말자. 의상실 쪽에는 마담 M이 가족 일로 고향에 돌아갔는데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말해 놓을게.”

    브린과 마르틴도 빌렘을 거들어 한마디씩 보탰다.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앤지의 안전이었다. 하지만 앤지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래도 제가 당분간 떠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캐서린 할머니가 계신 레반이나 로르샤는 안 되고……. 더 먼 곳으로 가야겠지요. 빌렘 아저씨 말씀대로 레티샤가 더는 뭘 어떻게 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이 집에 대해서는 모를 수도 있고요. 하지만 만약을 늘 생각해야 하니까요.”

    카일은 브린과 마르틴, 모두에 대해 알고 있다. 만약 레티샤가 그에게도 첩자를 붙여 뒀다면 그녀도 앤지의 가족들을 인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카일렉이 부디 누명을 벗고 하루빨리 위기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마음도 절실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가족과 노아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두 사람만 괜찮다면…… 이번에도 노아를 부탁해도 될까? 나 혼자 조용히 떠나 있는 편이 여러모로 최선이라 생각해. 나 때문에 혹시 이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난 절대 견딜 수 없을 거야.”

    “앤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야! 그냥 우리와 함께 있어. 여기가 제일 안전해. 혼자 떠났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는 우리가 견디지 못할 거야. 그렇죠, 아버지? 노아를 생각해, 앤지.”

    브린의 말에 빌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먼저 말하기도 전에 마르틴이 불쑥 나섰다.

    “나도 브린과 같은 생각이야. 당장 오늘부터 외부 일꾼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상주하는 피고용인들과의 교류도 제한하고……. 만전을 기하면 돼. 여기는 빈터가르야. 아무리 트리에스테의 실세라도 쉽게 접근할 수 없어.”

    “하지만 트리에스테의 황제도 시해됐어.”

    앤지가 긴장감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일국의 황제가 사절단으로 온 타국에서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다니. 대외적으로는 카일렉이 범인으로 지목돼서 트리에스테 내부 정쟁으로 일단락이 지어진 듯하지만, 황제의 반대파 세력일 게 뻔하잖아.”

    “윈스턴 대공 쪽이겠지. 증거만 없을 뿐.”

    빌렘이 말을 맺기 무섭게, 집사 헬렌이 서재 문을 노크했다.

    “주인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앤지 양을 찾는 손님이 왔습니다. 미카엘 랜들이라고 하면 알 거라고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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