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 (79/106)
  • #79

    “앤지, 진심이야? 나를 기다려 주겠다는 말…….”

    음색이 감격에 겨워 조금 더 떨려 나왔다. 차갑고 단단하게 수려하던 카이의 모습이 서서히 3년 전, 앤지가 알던 때의 카이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앤지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가다 아예 멈춰 버린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젖은 시선이 허공을 꿰뚫고 하나로 얽혀 들었을 때였다. 들떠 있던 카일의 심장에 먹먹한 통증이 밀려왔다. 익숙하지만 매번 새롭게 고통스러운 아픔이었다.

    “앤……”

    “카일!”

    앤지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심장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가슴을 쥐어뜯는 공작에게 다가가 앉았다.

    어떤 수작도, 가식도 아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바위처럼 건장한 몸 위로 희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그는 입술까지 파래진 채 이 악물고 고통을 참고 있었다.

    “카일, 왜 이래요? 혹시…….”

    전에 미카엘이 말했던, 에드워드 님이 생전에 시달렸던 발작과 광증이 떠올랐다. 하지만 카일은 섬에 있는 동안 완쾌되지 않았던가? 그때는 레머디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더 이상은 레머디의 피가 없이도 일상생활이 가능할 만큼 완치되었다고 했는데.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었다.

    “혹시 예전의 증세가 재발한 건가요?”

    “아니.”

    카일은 단호히 부정하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애써 참는 듯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는 입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아냐. 갑자기 가슴이 답답했는데 이젠 괜찮아졌어.”

    창 너머로 우레 같은 소음이 들린 건 그때였다. 사람들이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는 소리, 그런 불청객들을 막아서려는 아우성이 한데 뒤섞여 삽시간에 소란이 벌어졌다.

    “밖에 무슨 일이…….”

    앤지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카일이 그대로 있으라고 손짓하며 창가로 다가섰다. 방금 전까지 부여잡고 있던 가슴을 놓은 채였지만 얼굴 한구석엔 고통이 잔재해 있었다. 앤지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카일의 등 뒤에 서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게이트를 강제로 뚫고 들어왔는지, 저택 부지 안에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군인과 경찰로 보이는 남자들이 일제히 말과 자동차에서 내려 저택을 삽시간에 포위했다. 자세히 보니 트리에스테의 근위대는 물론, 빈터가르 왕실 군인과 경찰까지 섞여 있었다.

    “공작님! 큰일 났습니다!”

    문이 벌컥 열리며 제롬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 역시 경찰을 뒤따라 달려왔는지 거칠게 숨을 고르며 주인 앞에 섰다. 너무도 화급한 상황이라 옆에 선 앤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몇 시간 전, 시타델에서 폐하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시신이……?”

    카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열린 문 너머로 저벅저벅, 발소리가 요란하게 이어지더니 누군가 방 한가운데 거침없이 들어왔다. 남자는 트리에스테 황실 사절단의 일행인 추밀원, 머레이 볼터 켄트 공작 겸 황실 고문관이었다.

    “카일렉 로던 블랙웰 공작.”

    과거, 대법관이자 제1 옥새 상서였던 경력답게 그는 준엄하게 말을 이었다. 다른 군화 소리도 문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경을 레니에 러틀랜드 오토 카를슈타인 하르젠 8세, 트리에스테 제국의 황제이자 코토르, 몬테비아, 하일랜드, 오흐리드센의 왕을 시해한 혐의로 긴급 체포한다.”

    “뭐라고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공작님이 그러실 리가……”

    제롬이 노호하며 주인을 변호하고 나섰다. 하지만 문밖에서 몰려오는 근위대 기병들의 무력을 당해 낼 순 없었다. 카일은 순순히 두 손을 들어 올려 기병의 물리적인 제압을 거부했다. 미간이 살짝 일그러지는 가운데, 어쩐지 이 사태를 예측한 것 같은 쓴웃음이 입가에 어려 있었다.

    앤지는 카일이 검거되는 광경을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혼란 속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오래 마주 볼 순 없었다.

    그는 기병이 이끄는 대로 우아하게 끌려가면서도, 앤지를 돌아보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기병들의 발소리와 제롬의 항의 때문에 잘 들리진 않았지만 입술 모양만으로도 충분했다.

    -앤지. 기다려 줘. 약속대로.

    대답을 하고 말고 할 여유도 없었다. 기병들은 그를 에워싼 채 황망히 방을 떠났다. 앤지는 수 초간 멍하니 서 있다가 재빨리 그들 뒤를 따랐다. 3년 만의 만남, 갑작스러운 체포에다 그것도 황제를 시해한 범인으로 연행되다니.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다.

    양국의 근위대는 신속히 움직였다. 카일은 차에 태워지기 직전, 그에게 연행을 명한 켄트 공작을 돌아보았다.

    “잠깐 시간을 주시죠. 제롬에게 뒷일을 잠시 부탁하겠습니다.”

    규칙대로라면 그럴 수 없었다. 머레이 켄트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제 쪽의 사람인 블랙웰 공작이 갑자기 빼도 박도 못한 증거와 함께, 황제 시해범으로 구속이 되었으니 심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앤지는 카일이 제롬에게 뭔가를 이르고 차에 타는 장면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창 너머로 시선이 아주 짧게 얽혔다. 앤지가 석상처럼 선 채 두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차가 출발하고 나서도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다행이군. 분필 가루 덕에 위치 파악이 한결 수월했어.”

    그때 말에 오르던 경찰 중 누군가가 무심히 말했다. 남자는 빈터가르 경시청의 문양이 새겨진 모자와 제복 차림이었다.

    “레반 마을에서 옛 정부를 강제로 끌어낸 모양이던데……. 그 여자가 도로에 조금씩 뿌려 놔서 바로 추적할 수 있었어. 그나저나 블랙웰 공작은 엄청난 인물이었군. 수행원으로 모셔 온 제 나라 주군을 타국에서 암살하고 결혼 전 옛 여자를 찾다니.”

    히힝, 말 울음소리와 함께 기병들도 하나둘씩 부지를 떠났다. 근위대와 경찰은 처음 왔을 때처럼 떠날 때도 썰물처럼 삽시간에 빠져나갔다. 제롬과 수하들, 저택의 사용인들이 뒤늦게 달려왔지만 앤지는 아랑곳 않고 꼭 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내가 흘린 그 분필 가루 때문에 추적할 수 있었구나. 나 때문에……. 게다가 그 피는.

    카일이 스스로 차에 타기 전, 제롬에게 뭔가 긴밀히 이를 때 손바닥이 언뜻 비쳐 보였다. 피가 묻어 있었다. 그가 방을 나서기 전, 발작처럼 가슴을 움켜잡고 입을 막았던 왼손이었다. 그녀 앞에서는 피를 토해 낸 걸 감쪽같이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한 것이다.

    역시 재발한 걸까? 왜 아무렇지 않은 척…….

    앤지는 차디찬 돌바닥 위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 다가와 부축해 줄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 * *

    카일렉 로던 블랙웰 공작은 황제 시해 혐의와 더불어 국가의 반란을 꾀한 역모 죄, 쿠데타 모의 죄까지 더해져 트리에스테의 황궁 취조실로 이송되었다.

    황가 직계에 대한 암살과 반역은 트리에스테의 제국법상 가장 엄격하고 가혹하게 처벌되었다. 황제 시해는 절대적인 죄악으로 간주되어 일정 기간 조사가 끝나면 곧바로 사형에 처해지는 게 규정이었다. 제국법상 크게 유형과 투옥, 사형으로 처벌이 정해지는 재판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블랙웰 공작 편에 선 추밀원 귀족들은 공작의 알리바이를 주장하고 나섰다. 레니에 8세의 시신이 부검 결과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았고, 공작은 그 시간에 이미 그라츠에 와 있었다고 거세게 항변했다. 하지만 사법 회의에선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어차피 자객을 보냈겠지요. 직접 손을 더럽힐 리 없지 않습니까. 물론 공작이 직접 시해했을 가능성도 농후하고요. 그가 왕실 퍼레이드 중 갑자기 이탈해 종적을 감췄으니까요. 그 시간 동안 폐하는 인근 창고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시간이 절묘하게 맞아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건 우리도 의문입니다만, 그렇다고 공작을 범인으로 확정하는 것은…….”

    “게다가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직접 증거품을 보여 드리지요.”

    현 대법관인 버틀랜드 공작이 냉정하게 옆 테이블을 가리켜 보였다. 증거품을 늘어놓은 탁자 위에는 혈흔이 눌러붙은 나무 조각이 유리 상자에 들어 있었다. 현장에서 그 부분의 나무 바닥을 통째로 들어내 톱으로 썰어 온 것이다. kyle, 네 글자가 피로 희미하게 쓰여 있었다.

    “블랙웰 공작의 이름, Kylek의 첫 네 글자입니다. 폐하가 숨이 다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단서를 남겨 놓으신 거죠.”

    “하지만 그것만으로 범인을 단정하는 건 무리입니다. 만약 자객을 썼다면 그 배후가 공작임을 고인이 어떻게 아셨단 말입니까. 애당초 단서라는 것이 존재했을 가능성 자체가 지극히 낮습니다.”

    “독이 묻은 공작의 펜이 폐하의 안쪽 주머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납치되기 전에라도 언제든 펜을 쓰셨다면 손가락을 통해 중독되셨을 겁니다.”

    “그 또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바보가 제 이름이 새겨진 물건을 시해하려는 대상이 갖고 있도록 하겠습니까. 너무 뻔해서 웃음이 날 지경입니다!”

    블랙웰 쪽 다른 후작이 헛웃음을 지었다. 치밀한 조작이 아니라는 점에서, 윈스터 대공과 그 무리의 작당에 더 기가 찼다. 빼도 박도 못하게 확실한 증거를 만들지 않은 이유는 분명 따로 있으리라. 대공이 시해를 빌미 삼아 블랙웰 공작에게 원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터였다.

    “물론 이뿐이었다면 말씀대로 공작을 범인으로 지목하기 어렵겠지요. 하지만 모반의 증거들도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빈터가르에 가시기 직전까지 왕정 폐지, 내각제 도입 중 양자택일하라는 공작의 강권에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다는 증언들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대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증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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