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 (78/106)
  • #78

    앤지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카일의 입에서 노아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누군가 제 심장을 바위로 내려친 것 같았다.

    “이미 다…… 알았군요.”

    앤지가 조용히 숨을 토해 냈다. 다행히 그는 노아가 브린의 아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긴 무리도 아니다. 브린과 마르틴은 물론 집안에 상주하는 가솔조차 패트리샤와 노아를 남매처럼 대했고,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일꾼들은 두 아이가 실제 오누이라 여기고 있었다.

    “네 본명은 앰버 윈. 마르틴 실바의 본명은 헨리 베케트, 네 어머니 쪽 사촌이지. 역시 3년 전 그날, 빈터가르 범선에 구조되어 시타델에 머물게 되면서 만나게 된 건가? 기억을 조금씩 찾았다고 했으니까.”

    앤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섬에서부터 꿈을 통해 교류한 것, 어떻게 목숨을 구했는지 과정까지 일일이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그 집안에 남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었어. 적어도 너와 다른…… 관계에 있을 거라 짐작되는 놈은.”

    카일이 숨을 삼키며 자제하는 게 느껴졌다. 적어도 그녀의 남편이나 연인이라 짐작되는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었다.

    “외부의 마담 M으로서도 없는 것 같았는데……. 아닌가?”

    “그것까지 알아냈군요. 의상실까지 탐문한 건가요?”

    “네가 만든 레이스가 빈터가르 왕실에까지 흘러왔더군. 레티샤가 그걸 보고 네가 여기 있다고 확신한 모양이야. 그래서 살수들을 보내 널 찾아 해치라고 지시했고. 그 중엔 미카엘 랜들도 있어.”

    “미카엘은 내 생명의 은인이에요. 레반에서 암살자가 날 공격하기 직전 그가 막아 줬어요. 레티샤가 배후에 있다는 것도 다 말해 주고……. 끝까지 날 도와주려고 했어요. 당신이 캐서린 할머니를 어딘가 데려가고 그런 편지를 남기기 전까지는 말이죠.”

    “미카엘이 없었어도 넌 죽지 않았을 거야. 레반에서 널 마차에 태워 자동차까지 데려다 준 마부가 내 쪽 사람이니까. 그가 암살자의 등 뒤로 독침을 날렸고 그게 미카엘의 단도보다 더 빨랐어.”

    앤지는 흠칫 놀랐다. 미카엘과 동시에, 그의 수하도 그녀를 지켜 준 것이었다니. 그 점은 전혀 몰랐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레티샤는 당신과의 이혼을 원하지 않아요. 그렇죠? 날 죽이려 하면서까지 당신과의 결혼을 지키고 싶어 하는 걸 보면.”

    앤지는 서늘하게 말을 이었다. 자꾸만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그녀도 나름대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내가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죽임을 당한다면…… 그건 결국 당신 때문일 거예요. 카일. 내 목숨을 위협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당신의 미련이니까.”

    “앤지!”

    “당신이 날 포기하지 않는 한 레티샤는 또다시 자객을 보낼 거예요. 설령 이혼을 한다고 해도, 그 후로도 복수심에 계속 날 노리지 않을까요.”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아. 절대로.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내 곁에 있으면 가장 안전해. 그러니까 나와 함께 가자는 거야, 앤지.”

    “카일.”

    앤지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모자를 벗었다. 그 바람에 갈색빛 가발까지 한 번에 벗겨지고 말았다. 머리가 엉망이 되어 있을 것 같았지만 다듬고 싶은 마음도,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마구 뒤엉킨 금발은 흐트러져 있어서 더 아름다웠다. 황금빛 실 가닥이 정교하게 뒤얽힌 것처럼 보였다. 카일은 한순간 넋 놓고 그 찬란함을 응시하다 앤지의 다음 말에 시선을 흩뜨렸다.

    “모르겠어요? 난 지금 이대로 행복해요. 간신히 내 나라, 내가 원래 있었어야 할 곳에 다시 정착해 평온한 나만의 세계를 구축한 지 오래예요.”

    “앤지. 나는…….”

    “당신이 볼 때는 하찮고 보잘것없겠지만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일상이라고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대도, 그 어떤 권력과 명예를 준다 해도 그것과 바꿀 생각이 없어요.”

    앤지는 차분하게, 동시에 단호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3년 전처럼 처연하고 부러질 듯 가늘어 보였지만 3년 전보다 훨씬 더 견고한 내면이 느껴졌다. 세월의 흐름 동안 그녀는 확실히 더 단단해져 있었다.

    아니, 본래부터 그런 여자였다. 지금 그녀의 단호함이 더 범접할 수 없이 와닿는 것은 그녀가 그를 보다 명확히 밀어내기 때문일 터였다. 카일은 눈앞의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파도처럼 일렁이는 심장을 억눌렀다.

    너는 이렇게 변한 것이 없는데……. 마른 가지처럼 올곧고 꽃처럼 아름다우며 장미 가시처럼 고집 센 앤지 리즈델. 나의 앤지. 나를 언제든지 살게도, 죽게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앤지. 나를…… 사랑하지 않아?”

    결국 멍청한 질문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조금만 감정의 무게를 내려놓으면 눈물이 후두둑 떨어질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붙잡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목이 메이며 눈가가 뜨거웠다.

    “말해 봐. 이제는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에 대한 감정은 이제 실낱만큼도 남아 있지 않다고. 그러면 놓아줄게. 이대로 보내 줄게.”

    새빨간 거짓말이다. 설령 그렇게 말한다 해도 그녀를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결심을 되돌리고 마음을 다시 얻을 때까지, 아무리 많은 시간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앤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제 무릎께로 떨어뜨린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카일의 가슴 속 깊은 곳에 환희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 기쁨도 조금씩 더 커졌다.

    그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앤지 리즈델이든 앰버 윈이든, 눈앞의 여자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그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 사실을 어떤 말보다도 더 확실히 입증하고 있었다. 그는 앤지의 입술이 열리지 않기만을 바라다 마침내 적막을 깨뜨렸다.

    “트리에스테에 곧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될 거야. 나는 모든 걸 다 버릴 각오도 되어 있어. 공작 작위와 영지, 그 모든 재산, 공작저의 사람들……. 트리에스테 안의 모든 걸 다 내려놓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 너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

    “여러 가지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군주제가 폐지되는 대로 결국 둘 중 하나가 될 거야. 수 세기 전 한 나라였던 빈터가르와 합병되거나, 트리에스테를 노리는 나라와 빈터가르 간에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거나. 어느 쪽이든 나 역시 트리에스테를 떠나 타국으로 이주하게 될 거야.”

    막대한 해외의 자산과 부동산 및 사업체는 이미 빈터가르 연방 은행을 중심으로 대륙 여기저기 거점을 만들어 두었다. 또다시 세계 대전이 벌어지지 않는 한, 블랙웰의 이름은 사라져도 그동안 축적하고 그가 몇 배로 부풀려 둔 재산은 요지부동일 것이다.

    이 또한 앤지를 위해서, 그녀를 지키기 위한 힘의 일환으로서였지만 그것까지 말하진 않았다. 그녀가 분명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어떤 명예나 돈과도 지금의 일상, 간신히 이뤄 낸 평화를 바꿀 수는 없다고.

    “네 일상…… 네 세계를 버리고 내게로 오라는 것이 아니야, 앤지. 내가 갈게.”

    “…….”

    “네가 날 받아 주면…… 너의 세상 안으로 날 들여보내 주면 안 될까.”

    앤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시선이 무릎을 향해 있지도 않았다.

    “그럼 그 뒤에 와요.”

    여름의 초목을 담은 눈동자가 말갛게 젖어 있었다.

    “트리에스테가 실제로 변하고……. 이터니티의 잔재도 말끔히 사라지고 다시는 재현되지 않게 카일룸교가 뿌리 뽑히고, 그에 관련된 사람들도 모두 공작가를 떠나고……. 그리고 레티샤와 정식으로 이혼하고, 그녀의 심신 모두 당신을 완전히 놓았을 때. 모든 게 실제로 끝났을 때 돌아와요.”

    “…….”

    “기억해요? 섬에서도 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어요. 섬에 있을 테니 정략혼이 끝나면 돌아오라고. 몇 년이 걸리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결혼을 끝내고 돌아오면 그때는 함께하겠다고…….”

    “앤지.”

    “하지만 당신은 레티샤와 첫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그 말을 할 수 없었어요. 아이가 있는 한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략혼은 결국 진짜 결혼으로 굳어지게 될 거라 믿었거든요.”

    앤지의 뇌리에 노아가 떠올랐다. 아이는 제 아빠를 너무도 많이 닮아 있었다. 둥글고 견고한 턱, 우아하고 반듯하게 자리 잡은 콧대, 점점 짙은 흑발로 변해 가는 갈색 고수머리에다, 한쪽 눈썹만 위로 치켜올리는 버릇이 든 긴 속눈썹, 커다란 바다색 눈동자,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아직 아기인 지금도 그런데, 자라면서 얼마나 더 닮게 될지 가늠도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당신의 말대로, 레티샤와 그럴 가능성이 없었고 이혼 전까지 앞으로도 없을 거라면…… 그러면 기다릴게요.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아이가 생길 일말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았어. 이터니티에 희생시킬 수 없었으니까.”

    카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려 나왔다. 차마 앤지에겐 말할 수 없었지만, 처음에는 레티샤에게 제 아이를 낳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의식이든 뭐든, 마음대로 가져다 쓰라고 헬퍼들에게 던져 줄 각오까지 했었다. 영생에 하등 관심이 없어도 당시에는 그렇게 해야만 시간을 벌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결국 그럴 수가 없었다.

    레티샤와 손끝 하나 닿아야 하는 자체가 치 떨리게 싫었고, 막상 아이가 태어나면 도저히 산 제물이 되도록 방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비록 조부인 존 피츠로이가 숨겨 뒀던 장남, 헨리 데이빗을 제 희생양으로 삼았지만 부친 에드워드는 그렇지 못했던 것처럼.

    그는 존 피츠로이가 카일의 쌍둥이 형인 로이드를 희생시켰음을 앎과 동시에, 사랑하던 아내 유제니아를 잃었다. 그리고 태어난 순간부터 이터니티 약물에 중독되어 버린 다른 아들, 카일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중 어떤 것은 도덕과 윤리에 어긋난 행위였다. 아들과 그 자신의 생명을 위해, 헬퍼들이 선대 때부터 꾸준히 데려온 레머디의 피를 결국 취해야만 했었다.

    어차피 죽임을 당할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것, 그 자체가 죄악이 아닌가. 아이는 없어.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아니, 평생 없어도 좋아. 앤지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그녀 하나만 안전을 보장받고 행복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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