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 (77/106)
  • #77

    앤지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노아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앞으로도 몰라야 했다. 절대 알게 해선 안 된다. 그녀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이만은 반드시 지킬 것이다.

    “이제 말해 보세요, 도련…… 공작님. 제게서 뭘 원하세요?”

    앤지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몸가짐으로 앉았다. 안으로는 심장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도 집에 가고 싶으니 보내 달라고, 이러지 말아 달라고 당장이라도 애원하고 싶었지만 이성을 잃지 않고자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설마 여전히 저를 정부로 원하는 건 아니시겠지요.”

    “앤지. 넌 누구의 정부도 되지 않을 거야.”

    카일은 그녀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상체를 기울여 왔다. 그녀가 살짝 달아날 기미만 보여도 한달음에 테이블을 넘어와 달려들 것 같았다.

    “너는 내 아내가 될 거야. 레티샤와는 늦어도 올해 말 정식으로 결별하게 될 테니까. 이렇게 널 찾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던 이혼이었어. 단지 시기가 확정되지 않았을 뿐, 언제고 절차를 밟을 수 있게 서류는 늘 준비되어 있었다는 뜻이야. 결국은 모든 게 내가 3년 전에 약속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는 거지. 계획대로.”

    네가 날 떠나겠다, 끝났다고 관계를 종결지으려 하고 기어이 절벽에 떨어져 사라져 버린 것, 그 두 가지만이 변수였을 뿐이야.

    그의 덧붙임에 앤지가 무릎 위 양손에 힘을 주었다. 총소리, 그녀를 부르던 부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스러지던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럼 그것도 계획된 것이었나요? 내 양부모님을 죽인 것도.”

    문득 궁금해졌다. 두 분의 시신은 제대로 매장이 되었을까. 혹은 섬에 화재가 났을 때 그대로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었을까…….

    “앤지. 그건…… 내가 잘못했어. 그들이 네게 어떤 짓을 하려 해도, 절대 네 눈앞에서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카일의 그린 듯한 이목구비에 균열이 일었다. 두 눈에 후회감이 어려 있었다. 가식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앤지에게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말을 이어감에 따라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네게 망각제를 먹이려고 했어.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리셋되어 버리는 약을, 널 속이고 먹이려고 했기 때문에 도저히 그대로 둘 수가 없었어.”

    “뭐라고요? 그게 대체 무슨…….”

    “내가 그날 노스 쇼어에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도 네 기억은 이미 리셋되었을 거야.”

    “무슨……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엄마, 아빠가 내게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려고 했단 거죠? 나도 그들이 내 진짜 부모가 아니었다는 건 알아요. 빈터가르에 와서 그 섬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알았고, 섬에 끌려가기 전의 기억도 찾았으니까요.”

    그녀의 마지막 말에 카일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선대 공작이 저지른 만행, 이터니티에 대한 끔찍한 일들을 앤지가 알아 버렸다는 현실에 잠시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분들은 날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친딸처럼 아껴 주고 걱정해 주었……”

    “그래서였어. 널 친딸처럼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에 네가 섬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도, 섬을 떠나 헤데스타드로 가는 것도 바라지 않았던 거야.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그들 곁에 영원히 붙들어 두려 했던 거지.”

    앤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극심한 혼란으로 몸속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엄마 아빠가 어떻게 그럴 수가. 결국 섬의 모두가 미쳐 있었던 걸까. 블랙웰 하이츠 공작저의 헬퍼들, 부모 역할을 하던 사람들, 마을의 어른들까지.

    제정신인 사람은 오직 레머디뿐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를 포함해, 아무것도 모르고 조작된 기억으로 살아가던 가엾은 아이들. 그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갈 기회마저 완전히 잃고서 섬의 잿더미 아래 잠들어 있었다.

    모두 존 피츠로이 블랙웰, 카일의 조부 때문이었다. 그리고 카일은 그 수혜를 입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와 카일은 결코 함께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노아의 아버지라 해도,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해도 그것은 정해진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우린 함께 할 수 없어요, 카일.”

    그 역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감정을 앞세워 과거를 되돌리려 해도 소용없다. 그러기엔 그의 가문이 저지른 죄가 너무도 컸고, 앤지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건 하나뿐이에요. 블랙 매스- 그 끔찍한 의식을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고 선대가 저지른 과거를 진심으로 속죄하는 것. 그게 다예요.”

    “지난 3년 동안 그 과정을 밟아 왔어, 앤지. 그 악습을 내 대에서 완전히 뿌리 뽑을 힘을 얻기 위해 레티샤와 결혼한 거야. 이터니티를 추종하는 카일룸교의 수장, 사무엘 데르반 남작과 아직 공작저에 남아 있는 헬퍼들의 헛된 희망을 불식시킬 만한 힘을……. 그래서 레티샤와 혼인했지만 서류상으로만 부부일 뿐 타인이나 다름없어. 아이가 생길 만한 가능성을 처음부터 철저히 배제한 거지. 물론 그녀와 부부로 지낼 마음 자체가 없었지만.”

    “…….”

    “진심이야, 앤지. 나는 괴물로 소멸한 할아버지, 그 광기의 희생양으로 이십 년간 고통에 시달렸던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생각이 없어. 내가 정말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제 아이를 산 제물로 바쳐서 제 안위를 꿈꾸는 그런 끔찍한 인간이라고……?”

    “전에 당신이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어요. 영원히 살고 싶노라고……. 기억해요?”

    ‘도련님의 소원은 뭐예요?’

    ‘소원……?’

    ‘네. 건강해지는 것 외에 다른 소망,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요. 몸은 반드시 나으실 테니까요.’

    ‘영원히 사는 거야. 앤지, 나는 영원히 살고 싶어…….’

    “너와 영원히, 언제까지나 함께 하길 원한다는 말이었어. 이 세상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라도.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디든, 너만 이대로 내 옆에 있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간절히 소원한다는 의미였어. 지금도 그래, 앤지.”

    “……”

    “날 믿어 줘. 그럴 수만 있다면 심장을 갈라서라도 내 진심을 보여 주고 싶어.”

    악문 잇새로 고통스러운 맹세가 이어졌다. 그 처절함에 앤지는 귀를 막고 싶었다. 동시에, 그 말이 진심이길 바라는 염원 때문에 귀를 막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은 믿을게요. 하지만 카일…… 우린 더는 함께 할 수 없어요. 현실을 직시하고 이제 날 레반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난 내가 원래 있었어야 할 곳……. 이 빈터가르로 돌아와 빈터가르 사람으로 살고 있어요.”

    “아니. 난 너를 보낼 수 없어, 앤지. 지난 3년 동안 널 미친 듯이 찾아 헤맸어. 내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너 하나 때문이었는데……. 이제야 겨우 찾았는데 어떻게 널 보낼 수가 있겠어.”

    서늘한 어조 아래 숨길 수 없는 고통이 보였다. 그저 처절했다. 죽지도, 살지도, 함께할 수도, 떨어질 수도 없는 이 연(緣)이 그저 운명의 저주 같았다.

    문득 캐서린 할머니와 수도의 가족에게 생각이 미쳤다. 3년 전, 그와 헤데스타드로 가지 않는다고 버텼을 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내가 끝까지 당신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여기 가둬 둘 건가요? 또다시 날 감금하고 속박할 작정이에요? 순순히 말을 듣겠다고 할 때까지…….”

    “아니. 그러지 않을 거야. 이제는 그러지 않아.”

    하지만 이젠 네가 있는 곳을 알았으니까. 네 세계 안에 들어왔으니 절대 포기하지 않아.

    앤지는 그가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은 의중까지 파악했다. 직접 구속하진 않겠지만 감시를 붙일 게 뻔했다. 그녀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그의 귀에 들어가게 될 터였다.

    안 돼. 그랬다간 노아의 존재가 언제고 드러나게 될 거야.

    그가 이터니티의 종말을 꾀해 왔으며 선대 공작, 존 피츠로이 블랙웰의 뒤를 따르지 않을 거란 말은 믿었다.

    물론 카일은 처음에 알던 대로의 남자는 아니었다. 그녀가 제 뜻대로 되지 않자 강제로 감금, 난폭하게 범하고 리즈델 부부를 눈앞에서 가차 없이 죽이는 잔혹한 면모도 있었다.

    아이에 대해서는 어떨지. 카일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남자였다. 늘 달콤하고 다정했던 미소 뒤로 악마 같은 이면이 있었음을 결코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그가 정말 이터니티를 뿌리 뽑고 파괴하는 데 뜻을 두고 있다면.

    그게 진실이라면, 적어도 제 아이를 해할 살인귀는 아니지 않을까. 열여섯 살부터 알아 온 도련님, 그녀의 카이는 그 정도로 끔찍한 짐승으로 타락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노아의 안전을 장담할 순 없었다. 트리에스테의 카일룸교는 건재했으며, 교리의 실현을 고대하는 블랙웰 가의 헬퍼들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는 아직 이터니티를 완전히 종식시키지 못했고 레티샤와 부부 관계로 묶여 있었다.

    “카일. 이제는 나만의 세계가 있어요. 나는 그 안에서 평화롭게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길 바라요.”

    “하지만 넌 나를 아직 사랑해. 내가 그런 것처럼. 비록 네 감정이 내 마음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해도.”

    그의 단언이 비수처럼 심장을 찔러 왔다. 앤지는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부정할 수가 없어 가슴이 막히고 목이 메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정할 순 없었다.

    “3년이 지났어요, 카일. 그동안 내게…… 누군가 생겼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나요?”

    불현듯 마르틴과 브린, 빌렘 아저씨가 떠올랐다. 카일이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지 조바심이 들었다. 그녀의 본거지가 캐서린 할머니의 집이 아니라 수도 시타델의 아미티지 본저라는 것까지 알고 있을까. 제발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내겐 가족이 있어요.”

    “알아.”

    카일이 담담한 수긍이 이어졌다.

    “빌렘 반 아미티지. 그의 딸 브린 메이어 실버와 사위 마르틴 다 실바.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인 패트리샤 실바와 노아 실바. 네게 고마운 사람들이지. 내게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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