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 (7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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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지는 빵 봉투를 현관 포치 난간에 내려놓고, 우수수 떨어진 이파리며 꽃잎을 주워 한편에 모아 두었다. 아주 옛날, 엄마 릴리안이 이렇게 했던 장면이 기억에 가물거렸다. 섬을 떠난 지 3년, 로르샤와 레반을 몇 차례 방문하는 동안 이제는 옛 기억이 거의 돌아와 있었다.

    무척 따스하고 행복한 유년 시절이었다. 부모님은 외동딸인 그녀를 무척 사랑했고 작지만 정이 넘치는 로르샤 마을은 평화로웠다. 일 년에 두어 번씩 외가를 만나러 방문했던 레반 마을도 그랬다. 시끌벅적, 모두가 서로를 아끼고 귀애했으며 사랑이 충만한 나날들이었다.

    그 평화를 어느 날 산산이 깨부순 것은 전쟁, 그리고…… 카일의 조부, 존 피츠로이 블랙웰 공작이었다. 전쟁의 상흔은 사라져도 후자는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앤지는 허리를 똑바로 펴고 빵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문을 열기 전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바스락, 낙엽 밟히는 소리가 동네를 제집처럼 활보하는 이웃집 고양이의 기척으로 들렸다.

    하지만 기척의 주인은 고양이가 아니었다. 앤지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손에 들고 있던 봉투가 바닥에 툭 떨어지며 말랑말랑한 버터 롤과 레이즌 번이 쏟아졌다.

    울타리 너머에 서서 앤지를 응시하던 남자가 몸을 굽혀 제 발치까지 굴러온 빵을 집어 들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세워 앉은 채 그녀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모자를 벗었다. 앤지의 입에서 확신을 담은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당신은……!”

    * * *

    수도 시타델의 건국 기념일 축제가 끝나고 며칠 후 아미티지가에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빌렘 반 아미티지가 국가에 공헌 중인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시민 계급 중 매년 한 사람에게만 수여되는 훈장을 받을 예정이라는 공문이 날아온 것이다.

    건국 기념일의 훈장은 빈터가르 왕실과 의회가 쌍방 승인하에, 여러 분야 인사 중 우수한 한 명을 선정해 수여하는 방식이었다. 짐작건대 그간 여러 사업으로 산업 혁명을 부흥시킨 성과에다, 기선과 철도 건설에도 혁혁한 공을 세운 수훈을 매우 높이 산 것 같았다.

    “아버님, 축하드립니다. 이러다 정말 내년에는 의원도 되시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빠, 축하해요! 난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도 기쁘지만 다른 의미에서도 정말 기뻐요. 마르틴과 앤지에게도 아미티지란 이름이 보다 확실한 힘이 되어줄 수 있으니까요.”

    빌렘은 공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기쁜 소식임이 분명했지만 하필 이럴 때 앤지가 시골에 피신을 가 있어서 심란한 마음도 있었다. 마르틴과 브린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패트리샤와 노아가 사이좋게 잠들어 있는 아기방에 흘긋 시선을 주었다.

    “그 말이 맞다. 모두를 위해 경사인 건 사실이야. 앞으로 일주일만 더 기다리면 앤지도 돌아올 것이고…… 모두가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트리에스테 사절단 쪽에서는 별 움직임이 없나?”

    빌렘의 시선이 사위를 향했다. 경시청에서 막 퇴근한 마르틴은 아직 제복 차림이었다. 그의 얼굴이 심란함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네. 아주 조용합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좀 이상해요.”

    “그게 무슨 소린가?”

    “무슨 말이야, 마르틴?”

    부녀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물었다.

    “그게 좀……. 평화 수교 협정이 이루어진 것 외엔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요. 황제와 추밀원 귀족들은 물론 블랙웰 공작도 궁 안에만 틀어박혀 두문불출하고 있는 눈치입니다.”

    “그런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마침 시타델 본궁에서 있을 훈장 수여식이 사흘 뒤야. 이 트리에스테 사절단이 떠나기 이틀 전이지.”

    “어쩌면 트리에스테 사절단도 보실 수 있겠군요. 수여식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지만, 만약 무역 협정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검토를 하고 있다면 만찬에는 참여하지 않을까 합니다.”

    “일단 지켜보겠네. 트리에스테의 황제에게 변화할 의사가 있는지 어떤지, 그 자체가 불투명하니 뭐라 속단하긴 어려울 듯해.”

    빌렘의 말에 마르틴과 브린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래에 대한 황제의 생각뿐 아니라, 블랙웰 가문의 행보에 대해서도 불투명한 건 마찬가지였다. 부디 그 끔찍하고 허황된 악습을 이어갈 계획이 아니기만을 바랬다.

    * * *

    “앤지.”

    앤지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 있다 그 부름에 움찔 몸을 떨었다. 이 레반 마을에서 그녀를 앤지라고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빈터가르에서, 그리고 진짜 가족인 캐서린 할머니의 집에서 그녀는 앤지 리즈델이 아닌 앰버 윈이었다.

    “앤지. 걱정 마. 해치려는 게 아냐, 절대.”

    남자는 한 번 더 그녀를 부르며 안심시키듯 몇 발자국 앞에서 멈춰 섰다.

    “내가 어떻게 널 해칠 수 있겠어.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널.”

    “미카엘.”

    앤지의 입에서 커다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미카엘은 펠트 중절모와 느슨한 애스콧타이에 잿빛 코트를 입고 있었다. 마을의 남자들이 외출할 때 입는 복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눈에 띄지 않게 일부러 차림새를 갖췄을 수도 있지만 우연이 마주친 것일지도 몰랐다. 야시장이 열릴 때는 다른 마을 행상들이 대거 건너온다고 들었다.

    “여긴 어떻게……”

    “이웃 마을 에벤호프에 볼 일이 있어서 온 김에 여기도 들렀다가……. 아까 널 봤어. 호수 건너편 마을 회관에서. 머리 색이 다르길래 닮은 사람인가 긴가민가해서 빵집에서 여기까지 따라왔다가 지금 확실히 알게 됐어. 머리가 가발인 것 역시.”

    3년 만의 재회였다. 그때와 똑같이 보였지만 엄밀히는 같지 않았다. 미카엘은 얼굴에 늘 떠돌던 소년티를 물씬 벗고 어엿한 한 사람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미카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앤지를 뚫어져라 보는 보라색 눈동자에는 이채와 감탄의 빛이 서려 있었다.

    “어떻게 빈터가르에…… 컬리넌 섬이 불타서 다들 헤데스타드로 이주했다고 들었어.”

    “맞아. 헤데스타드에 정착한 지 꽤 됐어. 지금은 빈터가르에 일이 있어서 잠깐 와 있는 거야.”

    앤지의 눈이 좀 더 커졌다. 양국 간 교류가 단절된 지금, 개인이 트리에스테에서 빈터가르에 와 있을 일은 국가적인 공무나 개인 통상에 관련된 사안 외엔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더는 블랙웰 공작가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일까?

    “더는 공작저에서 일하지 않는 거야? 다른 일을 하고 있어? 아 참, 그보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미카엘. 섬이 그렇게 되었다는 얘길 뒤늦게 전해 듣고 많이 걱정했었거든.”

    “고마워. 걱정해 줘서.”

    미카엘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앤지. 난 두 시간 후 에벤호프의 숙박지로 돌아가야 돼. 그래서 말인데, 레반 호수 맞은편의 여관 알고 있지? 1층 식당에 칸막이 자리를 예약해 뒀어. 조용히 식사하고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거든.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거기서 얘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

    시간이 없었다. 인근 마을의 의사를 매수해 식중독에 걸린 척 독방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해 두었다. 그에게 딸린 레티샤의 심복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길어야 두 시간, 그 안에는 반드시 방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앤지. 날…… 믿지?”

    앤지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다시 물었다. 지금 시간이 촉박하다는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다. 블랙웰 공작과 공작 부인이 각각 다른 이유로 그녀를 찾고 있다는 걸 알면 패닉에 빠질지도 모른다.

    “알았어, 미카엘. 그 전에 리네 아주머니…… 할머니를 돌봐 주시는 분에게 잠깐만 외출하고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갈게. 먼저 가 있어.”

    “그래. 천천히 와.”

    앤지는 흙투성이가 되어 버린 빵을 줍기 위해 몸을 굽혔다. 하지만 미카엘이 좀 더 빨랐다. 그는 앤지를 저지하고 직접 빵을 주워 봉투에 넣고는 한 손에 들었다.

    “이건 내가 가다가 버릴게. 미안해, 나 때문에 다 못쓰게 됐네.”

    예전의 다정하고 친절했던 미카엘 랜들 그대로였다. 앤지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문 안으로 사라졌다. 충격도 잠시,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으며 안정을 찾아 갔다.

    별일 아닐 거야. 우연히 이 마을에 왔다가 마주친 거잖아. 게다가 블랙웰 가문과는 이제 완전히 무관해 보였어.

    그러니 그가 갑자기 나타난 것은 카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퍼레이드 중 그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것 또한.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앤지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리네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캐서린 할머니는 낮잠에서 깨어나 제라늄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창 너머로 본격적인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 * *

    3년. 세월의 더께가 앤지 리즈델만 비켜난 것 같았다. 그녀는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아니, 3년 전보다 더 아리땁고 매혹적이었다. 투명하디 투명한 우윳빛 피부에 그린 듯한 이목구비, 에메랄드 보석을 박아 넣은 것처럼 반짝이는 녹색 눈, 한층 더 무르익은 미색이 감돌았다.

    그 깊고 성숙한 느낌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앤지는 이제 소녀에서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 자신이 이제 한 사람의 사내가 된 것처럼.

    미카엘은 먼저 여관에 가지 않고 골목 귀퉁이의 벤치에 앉아 앤지를 기다렸다. 날이 저물었지만 호수 광장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웃음소리, 수레바퀴 끄는 소리 등 주변은 낮보다 활기를 띠어 가기 시작했다. 야시장이 열릴 준비, 구경 갈 채비로 마을 전체가 들떠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북적이는 분위기에다 외부인도 많을 테니 만에 하나 앤지와 그의 만남을 누가 보더라도 크게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미카엘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생각에 잠겼다. 다행히 제때 찾아냈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레티샤 뿐 아니라 카일렉의 수색에서도 앤지를 보호해야 했다. 그는 퍼레이드에서 앤지를 보았고 눈이 마주쳤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분명 제롬 쪽에서 수하를 풀어 앤지를 찾고 있을 것이다.

    카일렉은 3년 동안 꾸준히 앤지를 찾고 있었다. 아무리 표면적으로는 철저히 숨긴다 한들, 늘 가까이에서 동향을 살피는 그림자 친위대가 그 사실을 모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앤지를 어디로 보내야 할까.

    일단은 그녀를 놀래키지 않으려 우연히 마주친 척, 오랜만에 얘기를 나누자는 식으로 앤지를 불러냈다.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곧바로 짐을 꾸려 피신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이 레반 마을뿐 아니라 에벤호프, 로르샤보다 더 멀고 누구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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