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 (7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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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반 호수 앞에서 내릴 때 말이야, 시종처럼 보이던 남자가 팁을 줬어. 마차 삯의 다섯 배가 되는 금액을 팁으로 주면서 당부를 하더란 말일세.”

    “뭐어? 다섯 배? 이 사람, 어쩐지 오늘 술을 사겠다고 한 이유가 있었군?”

    “허허. 씀씀이가 보통이 아닌 걸 보니 귀족이 맞았나 보군. 대체 뭘 당부했길래 그만한 돈을 준 건가?”

    마부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뻔하지. 오늘 자기들을 레반까지 태워 준 사실을 어디다 발설하지 말라고 하더군. 그냥 기억 속에서 잊어주면 고맙겠다는 거야.”

    “허! 이제 알겠네. 야밤의 도주 같은 여정, 여시종을 거느린 귀족 여인, 역시 시종처럼 보이는 남자……. 딱 봐도 밀회나 사랑의 도피구만.”

    “엑? 난 무슨 범죄에 연루된 사연으로 생각했는데?”

    “지체 높은 귀족 아가씨와 비루한 신분의 남자의 사랑이지. 뻔해. 밀회를 나누기 위해 그 깡시골까지 간 거야. 어쩌면 불륜일지도 모르고.”

    “하, 이 사람 요즘 비첸틴에서 흘러들어 온 통속 소설이라도 읽은 겐가? 마누라 읽는 걸 뺏어서 틈틈이 읽기라도 한 거야?”

    “들어 보니 일리가 있는 것도 같은데? 우리가 하루 이틀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십 년 넘게 별별 사람들을 다 접했는데 우리만큼 눈썰미 있는 치들이 어디 있겠나?”

    “하긴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구만. 어라, 뭔가 묘하다! 느낌은 확 왔지만 남녀 간 치정 이런 쪽은 생각을 못 했는데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네, 허허.”

    “그런데 발설을 해 버려서 어째. 그만한 돈을 받았으면 기억에서 깡그리 지웠어야지 말을 하면 어떡하나.”

    “자네들을 안 믿으면 누굴 믿어? 미치 그 양반이 그런 요상한 손님들을 태웠수다- 어디 가서 누구에게 말을 퍼뜨린다고.”

    “하긴 그렇지. 그럼 술 한 잔씩 더 사게나.”

    마부는 흔쾌히 그러마 하고 서빙하는 여인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들 뒤에 홀로 앉아 있던 남자는 버터 바른 빵을 마저 입안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듯 마부들을 다시 돌아보곤 찻집을 나섰다.

    같은 시간, 올리비아는 의상실에 찾아온 경감의 취조에 응하고 있었다. 하루 더 휴가를 내기 위해서 홀로 작업을 마무리하던 차에, 경감이 신분증을 꺼내 보여 주며 수배령이 내려진 누군가에 대해 탐문을 청해 온 까닭이었다.

    “그러니까 올리비아 버나드 양은 마담 M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군요.”

    “네, 네……. 의상실 주인인 매들린 슐츠 부인이 늘 의뢰를 받고 물건을 전달하기 때문에 저는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그 여자를 만나 본 적도 없고 멀리서 본 일조차 없어요.”

    “맹세할 수 있습니까? 잘 대답해야 합니다. 거짓 진술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돼요.”

    “네, 맹세할 수 있어요! 정말입니다.”

    올리비아는 어깨를 한껏 움츠렸다. 결백을 주장하듯 두 손을 꼭 맞잡는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약혼자인 남자에게 사기 전과 기록이 있다 보니 공권력 앞에서 저도 모르게 경직되는 버릇이 남아 있었다.

    “마담 M이 정말 안 좋은 일에 연루되어 있다면, 저보다는 슐츠 부인을 탐문하는 것이……”

    “자칫했다간 경시청에서 마담 M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어 나갈 위험이 있으니까요. 방금 버나드 양도 말했듯 매들린 슐츠 부인이 마담 M과 정말 가까운 사이라면 몰래 귀띔해 줄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일부러 더 믿을 만한 사람인 버나드 양에게 물어보러 온 것입니다.”

    “아아…….”

    올리비아의 눈에 안도감이 설핏 퍼졌다.

    “어쨌든 알겠습니다. 마담 M이 시타델 내에서 활동 중이며 얼마 전 한 달간 휴가를 떠나니 그동안 일을 받을 수 없다고 알려 왔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과가 있었습니다. 알고 있겠지만 이 얘기는 슐츠 부인은 물론,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경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조하듯 천천히 덧붙였다.

    “어쩌면 슐츠 부인도 공범자로 조사를 받게 될지 모르니까요. 만에 하나 그렇게 되더라도 버나드 양은 수사에 협조해 준 대가로 포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의상실에 재취업도 알선해 줄 테니 염려 마십시오.”

    “어머, 정말이세요? 그렇게까지…… 걱정 마세요. 절대 말하지 않을 테니까요.”

    올리비아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경감을 문밖까지 배웅하고 가게 안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일거리를 찾아 수도로 올라온, 전형적인 시골 출신 아낙이었다. 정교하게 위조된 경감의 신분증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그저 한시름 놓으며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세상에. 마담 M…… 도대체 무슨 조사를 받고 있는 걸까? 그렇게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인물이더니 역시. 가만, 매들린도 혹시 연관되어 있다면 앞으로는 거리를 두는 게 좋겠어. 공연히 휩쓸렸다가 불똥이라도 튀면 안 되지.”

    올리비아는 작업도 미뤄 두고 차를 새로 끓였다. 추후 상황에 어떻게 대비하는 게 좋을지 이런저런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 * *

    황제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질척한 피가 차디찬 전신에 들러붙다 못해 곧 시신이 될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사람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아직도 숨이 붙어 있었다. 전신의 피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은데 아직도 의식이 남아 있다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은 모든 힘을 오른쪽 손가락에 죄다 집중하려 애썼다. 끈적거리는 피가 손가락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온 힘을 다해 검지에 힘을 주었다. 피가 간신히 여섯 글자를 그려 냈다. 황제가 피에 젖은 눈을 끔벅였다. 하지만 실패였다. 처음 두 글자는 손톱 쪽 살갗으로 잘못 긁어 아무것도 쓰이지 못했다. 다시 힘을 줘서 앞 글자를 메우려고 했지만 숨이 다하고 있었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이렇게 타국에서 비참하게 개죽음을 당할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그것도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그런 놈에게. 최후의 힘을 다해 범인의 정체라도 밝혀 보려 했건만, 신은 끝까지 그의 편이 아니었다.

    * * *

    평온한 가운데 긴장을 놓을 수 없던 며칠이 흘렀다. 날이 부쩍 짧아져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앤지는 레반 호수를 가로질러 캐서린 할머니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람이 싸늘했지만 아주 춥지는 않았다. 확실히 수도 시타델보다는 따뜻한 편이었다. 평소 조용한 호수와 광장은 해가 저물면 본격적으로 시끌벅적해질 터였다. 격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야시장이 오늘 밤 있을 거라고 리네 아주머니가 오전에 알려 주었다.

    한 손에 들린 봉투에서 갓 구운 빵 냄새가 흘러나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화덕에 올려 두고 수프를 끓일 생각이었다. 그럼 할머니가 낮잠에서 깨어나신 후에도 따뜻하게 드실 수 있으리라.

    교각 저편, 어느 집 창문 너머 아이를 안고 달래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발걸음이 저절로 속도를 줄이며 코끝이 시큰거려 왔다. 노아가 떠올랐다.

    노아. 잘 지내고 있겠지? 앞으로 일주일만 더 있으면 되니까 조금만 기다리렴. 올해는 엄마 없이 생일을 보내야겠지만 금방 갈 테니까, 우리 아가…….

    하필 며칠 후가 노아의 세 번째 생일이라 애틋한 마음이 더했다. 지난 일주일간 수도의 가족과 서신을 한 번씩 주고받을 수 있었다. 마침 캐서린 할머니를 보살펴 주는 리네 아주머니의 동생, 피엘 아저씨가 수도에 볼일이 있어 짧게 왕복할 일이 있던 덕분이다. 아저씨는 앤지의 서신을 브린에게 직접 전달해 주었고 답장도 받아 와 주었다.

    「브린. 여기까지 데려다준 안톤 아저씨, 마리안으로부터 이미 들었겠지만 나는 지금 레반에 있어. 로르샤로 가던 길에 캐서린 할머니에게 들러 인사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할머니가 그때 와병 중이셨거든. 감기 몸살이셔서 심각한 건 아니지만 편찮으신 게 좀 나아지면 로르샤로 갈 생각이야. …… (중략)」

    어쩌다 보니 일주일이 흘러 버렸다. 캐서린 할머니는 꽤 좋아졌지만 아직 기침을 하고 있어서 로르샤로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무래도 남은 일주일도 여기 있다 시타델로 귀경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브린의 편지가 떠올라 눈가가 젖어 들었다. 노아는 평소처럼 잘 먹고 잘 자고 있었다. 처음 이틀간은 엄마를 찾으며 울기도 했지만 마르틴과 브린이 잘 달래 준 모양이었다. 걱정하던 마음은 한결 가라앉았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그리움은 점점 더 커져 가고 있었다.

    제발 아무 일 없기만을 바랐다. 일주일 후 모든 것이 예상대로 흘러가야 비로소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블랙웰 공작을 포함한 사절단 모두 트리에스테로 떠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쩌면 처음부터 공연한 기우였을지도 몰랐다. 그녀를 닮은 사람이라 결론을 내렸거나, 설령 그녀임을 알아봤더라도 결국은 흘려 버렸을 수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후자의 가능성에 더 무게가 실렸다. 그래. 그편이 훨씬 신빙성이 있어. 그는 이미 나를 잊었을 거야. 3년째 결혼 생활을 지속해 오는 동안 레티샤에게 진심이 되었을지도.

    가슴 한쪽이 서걱거렸다. 앤지는 그 찌릿한 전율이 무지근한 통증으로 번지기 전에 마음을 수습하고 발길을 재촉했다. 가을꽃과 낙엽이 서서히 저물어 가는 아담한 농가와 주변의 집들 모두 한 폭의 그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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