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 (7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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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티샤 블랙웰은 극도로 예민한 상태에 있었다. 손톱을 어찌나 잘근잘근 깨물어 뜯었는지, 기껏 장밋빛 파우더로 윤을 낸 것도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다. 폐하의 갑작스러운 실종도 충격이었지만 그보다 더 심기를 괴롭히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별궁의 레이디 체임버에 있었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네 개의 촛대가 실내를 은은하게 밝힌 가운데, 한 남자가 공작 부인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레티샤가 초조한 듯 발을 구르더니 다시 사내 앞까지 걸어와 섰다.

    “앤지 리즈델을 찾아. 카일렉보다 더 빨리 찾아내야 돼. 내 느낌이 맞다면 마담 M이란 가명으로 살고 있을 거야. 여기, 이 레이스도 가져가서 수색에 이용해.”

    레티샤가 왕녀에게서 받은 레이스 식탁보 장식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역시 아무리 봐도 컬리넌 섬에서 봤던 앤지의 것과 동일했다.

    “마님. 하지만…….”

    “상관없잖아. 어차피 빈터가르에 있을 동안 네 임무는 공작 부처, 특히 날 집중적으로 호위하는 거야. 그럼 내가 내 안위를 위해 지시하는 대로 해야지!”

    레티샤의 낯이 험악해졌다. 어제 시가지 퍼레이드 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방금 미카엘에게 죄다 털어놓은 후였다. 그 역시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뒤늦게 평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레티샤는 그의 얼굴에 스쳐 간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어차피 너희 친위대는 그림자란 이름처럼 비밀스럽게 움직이니까, 내 주위를 지키는 대신 바깥에 나가서 그 여자를 찾으란 말이야. 카일렉이 아무리 별궁을 폐쇄하라 지시했어도 분명 너 하나쯤은 빠져나갈 방법이 있겠지. 안 그래?”

    “…….”

    “왜 그래? 뭘 망설이는 거야? 이제 결혼까지 한 몸인데 미련이 남아 있기라도 해?”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거짓말!”

    짝, 그녀의 한 손이 매섭게 공기를 갈랐다. 뺨을 후려친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미카엘은 죄인처럼 시선을 떨구고 기울었던 몸을 똑바로 폈다. 얻어맞은 부위가 피멍이 든 것처럼 발개져 있었다.

    “너 그 계집애 좋아했잖아. 기억 안 나? 3년 전 예배당에서 내가 그년을 족칠 때 네가 앞을 막아서서 감싸고 돌았잖아. 꼭 뭐라도 된 것처럼. 하지만 루이제가 목격한 건 사실이었어. 그때는 왜 말을 뒤집었는지 몰라도 앤지 리즈델은 밤마다 내 약혼자, 내 남편이 될 남자를 홀려서 창녀 짓을 했다고!”

    “…….”

    “네가 앤지에게 조금이라도 미련이 남아 있다면, 그래서 그 애가 다치지 않길 바란다면 내 남편보다 먼저 찾는 게 좋을 거야.”

    “해칠 의도가 아니시라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뻔하잖아. 여기 숨어 살고 있던 걸 카일렉이 알았으니 멀리 떠나게 만들어야지. 시타델이 아닌 곳에 이주할 수 있게 넉넉히 돈도 줄 거야. 아예 비첸틴이나 아제르반, 아니 가능한 한 더 멀리 떠나면 고맙겠지만.”

    거짓말. 미카엘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여전히 발아래 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공작 부인이 원하는 대답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혼자 움직이긴 어렵겠지? 심복을 하나 붙여 줄 테니 거처에서 대기해.”

    미카엘이 나간 뒤 한참 후 누군가가 체임버에 들어왔다. 남자는 트리에스테 사절단 근위대 기병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친정인 데르반 가문에서부터 백부, 사무엘 데르반 남작을 섬겨 온 심복 중 하나다. 탁월한 살수이기도 했다.

    “프란츠.”

    “부르셨습니까, 마님.”

    “잘 들어. 미카엘 랜들은 앞으로 보름, 트리에스테에 돌아가기 전까지 날 호위하는 대신 어떤 여자를 수색하게 될 거야. 너도 수색에 합류해서 그를 돕게 될 거야. 그리고…….”

    레티샤의 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아무리 표독스러운 그녀라도 누군가의 암살을 지시하는 건 처음인지라 긴장으로 목까지 메어 왔다.

    “미카엘이 그 여자를 찾는 즉시 그녀를 죽여. 미카엘 역시.”

    기병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결국 명에 승복했다.

    “알겠습니다, 마님.”

    레티샤는 보석함에서 작은 사파이어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크기는 작아도 기병의 몇 년 치 연봉에 상당하는 가치가 있었다. 남자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가, 감사합니다. 마님!”

    “돌아오면 더 큰 것을 주마. 반드시 성공해야 돼.”

    “네,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

    프란츠는 보석을 품에 넣고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린 후 방을 나갔다. 그는 발걸음도 가볍게 복도를 돌아 홀 너머로 사라져 갔다.

    체임버 건너편의 기둥 너머, 옷자락이 펄럭였다. 기둥 뒤에서 프란츠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인영 역시,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 * *

    황제는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어 댔다. 송진내와 섞인 썩은 나무 냄새가, 인중부터 턱까지 단단히 두른 천 안에까지 풍겨 왔다. 어둠 속에서 새카만 그림자가 그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고 있었다.

    “흐……. 흐으으……. 어아아아……. 우우…….”

    제발 살려줘.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줄 테니.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하겠다! 제발 목숨만 살려 다오. 내가 이렇게 빌지 않느냐.

    하지만 목 깊은 곳에서 울리는 건 뜻 모를 신음, 흐느낌이 다였다. 레니에 8세는 눈물과 땀에 젖은 눈을 분주히 깜빡이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는 자신의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쇠락해 가는 제국이라도 일국의 황제일진대, 대체 어떤 놈이 감히 그를 납치해 이런 창고에 묶어 놓고 며칠째 방치하고 있단 말인가.

    의식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며칠이 흘렀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빈터가르 별궁의 침실에 별안간 괴한이 들이닥쳐 수면제가 묻은 천을 입에 누른 것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닥친 일 같지 않았다. 아주 질 나쁜 악몽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으으, 으으아아아! 흐으…….”

    황제의 재갈 물린 입에서 커다란 괴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떨리는 동공이 날붙이를 포착해 냈다. 그의 앞까지 다가선 인영은 한 손에 무섭도록 날카로운 단도를 쥐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 으흑…….”

    레니에 8세는 두 눈을 꾹 감아 버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는 본능적으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눈앞에 한 구의 비참한 시신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죽은 몸뚱이였다.

    “잘 가시오, 황제.”

    그 말을 끝으로 두건을 뒤집어쓴 괴한은 단도를 쥔 손을 위로 치켜올렸다.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날렵하게 휘둘렀다. 황제에게 최후의 순간, 신에게 참회하고 내세를 호소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심장이 꿰뚫리며 피가 솟구쳤다. 사지가 묶여 있던 몸은 천천히 바닥으로 기울어져 널브러졌다. 트리에스테의 황제는 타국의 버려진 폐가 안, 낡디낡은 창고에서 나무 톱밥을 무덤 삼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형 집행인은 그의 가슴에서 단도를 훅 빼냈다. 그리고 축 늘어진 시신의 품 안쪽, 주머니 속에 펜을 구겨 넣었다.

    그 순간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새카만 그림자는 재빨리 창고의 비밀 문을 통해 그 자리를 떠났다. 계획대로였다면 시신의 뒤처리를 했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두건을 뒤집어쓴 암살자는 멀찌감치 고목 뒤에 서서 창고 앞을 배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문을 열려 애썼지만 결국 포기했는지 왔던 길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내는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가 사체 처리를 하려다가 결국 마음을 바꾸었다.

    창고 안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면 관리인이나 경관을 부를 수도 있었다. 잘못했다간 간발의 차이로 꼬리를 밟힐지도 모른다. 암살자는 유유히 뒤돌아섰다. 빠르면 오늘 중, 늦어도 이삼일 안에는 시체가 발견될 터였다. 그리고 황제의 품에 있는 물건 역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증거품이지만 범인으로 밀어붙일 빌미는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대공도 증거에 굳이 공들일 필요는 없다고 여겼으리라.

    * * *

    해 질 무렵이면, 기차역 대합실을 낀 간이 찻집은 왁자지껄한 시장통이 되었다. 평범한 여행객들은 도착 즉시 목적지로 이동하거나, 대합실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여행객들을 상대해 생계를 꾸리거나 기차역을 중심으로 업을 이어 가는 사람들은 거의 간이 찻집에서 그날의 일과를 마치곤 했다. 일종의 만남의 광장으로 쓰이는 공간이었다. 마부와 역사 직원, 화물 운반인과 심지어 항구에서 온 부두 노동자, 창고 인부들까지 손님들은 술 한 잔, 혹은 차 한 잔과 간단한 저녁거리를 동료들과 나누며 소소한 즐거움을 만끽하곤 했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전이던가 뤼베크 중앙역에서 묘한 손님을 태운 적이 있어. 젊은 숙녀 둘과 남자 한 명이 처음엔 로르샤로 가달라고 하다가 저희들끼리 뭘 의논하더니 레반으로 가 달라고 말을 바꾸더군.”

    기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뤼벡 출신 마부가 걸걸하게 말을 이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동료 마부로 보이는 중년 남자 둘이 앉아 있었다.

    “숙녀 한 명은 모자 베일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는데 한눈에도 뭐랄까, 고상하고 품위가 흐르는 게 귀족 영애가 일부러 수수하게 차려입은 것 같았지. 다른 여자와 남자는 아가씨의 시종들이고 말야.”

    “그게 뭐가 묘한가? 나도 귀족 나리를 심심찮게 태우곤 하는데.”

    “휴양 도시에 간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레반이나 로르샤 모두 깡시골 아닌가. 여기저기 길도 나고 한창 개발되고 있긴 하지만 빈터가르에서 가장 발전이 더딘 변방 지역 아닌가 말이지. 그래서 오지랖을 떨어 물어보고 싶어서 입술이 간지럽다 못해 잇몸까지 근지럽지 않았겠나. 아니 귀하신 분들 같은데 그 촌구석까지는 무슨 일로 가십니까요?”

    “하여간 호기심은. 그럼 물어보지 그랬나?”

    “분위기가 어쩐지 너무 엄숙해서 그럴 수가 없었어. 그 새벽에 외진 시골까지 가는 것도 특이해서 기억에 오래 남아 있네그려.”

    “뭔가 사연이 있나 보지. 별 특이한 것도 아니구만.”

    “사실은 말이야…….”

    마부가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켠 잔을 내려놓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 전에 주위를 흘깃 돌아보며 눈치를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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