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 (70/106)
  • #70

    “빈터가르 왕실도 그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이쪽의 초대가 선행되었던 만큼 우리 쪽에 발생하는 모든 불미스러운 사태에 도의적인 책임감을 느낄 테니까요. 만에 하나, 차후 범행이 우리 쪽 내부자의 소행이 드러난다 해도 그 부담감은 그대로일 겁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불신하고 의심하는 것보다는 협조를 최대한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외교적으로 유리하게 활용하는 게 현명한 대처라 사료됩니다만.”

    누구도 그 의견을 반박하지 못했다. 적의 우두머리를 초대해 화해의 연회 중 시해하는 것은 오랜 옛날 이교도의 세력 다툼에서나 벌어졌던 만행이다. 트리에스테와 빈터가르는 적대 관계도 아니었고 전쟁 중 대치한 전력이 없었다.

    “따라서 트리에스테에는 이 일을 일단 극비로 하되, 경들께도 당분간 근신을 요청드리겠습니다. 안전을 위한 것인 만큼 별궁 밖으로 외출을 삼가 주시고 궁 내에서도 반드시 호위병을 대동하시길 바랍니다. 저녁 만찬에서 다시 뵙죠.”

    오만한 축객령에 다들 찍소리도 하지 않고 홀에서 물러갔다. 평소 블랙웰 공작가에 호의적이지 않던 귀족들조차 다음 타겟은 자신이 될까 봐 잔뜩 겁먹은 기색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공작이 왕의 대리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 모두 공작의 지시에 군말 없이 따랐다.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자존심보다 더 우위에 있었다.

    카일은 제롬과 단둘이 남게 되자 가면을 벗고 제 초조함을 드러내었다. 앤지를 찾는 것에 이어, 이제는 난데없이 사라진 황제의 행방까지 더해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윈스턴 대공 쪽이 의심스러워. 비공식적인 일정이라 알려지진 않았지만, 폐하는 퍼레이드와 축제가 끝나는 대로 국왕 부부를 알현할 계획이셨다. 내달 트리에스테의 왕정 폐지와 국민 선거에 힘을 실어 달라고 말이야.”

    “결국…… 그렇게 결정을 내리셨던 것이군요.”

    레니에 8세는 제 한 몸을 지키기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남은 여생을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만, 마음은 언제 친인척에게 암살당하고 국민에게 처형당할지 모를 불안에 시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삶을 만끽하는 쪽으로 말이다.

    하긴 그는 마흔이 넘는 지금까지도 충분히 괴로운 삶을 살아 왔다. 겉으로만 일국의 황제로 추앙받을 뿐, 황후가 죽은 후에도 신부 가문으로부터 시해당하진 않을까 두려움에 재혼도 하지 않고 극심한 의심과 불안에 휩싸여 살았으니.

    심지어 이제는 이터니티 의식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레니에 8세가 가진 삶에 대한 애착은 절대 권력을 영원히 누리게 해 줄 불멸의 영생이 아닌, 그저 하루하루 근심 걱정 없이 즐겁게 살아가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듯했다.

    “그래서 타이밍이 매우 기괴해. 하필 그렇게 결심한 다음 날인 오늘 갑자기 사라지다니. 폐하는 그 결정에 대해 추밀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을 거라 했지만 장담할 순 없어.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누군가 그를 밀실에서 끌어내 어디론가 은닉해 둔 모양새니까. 빈터가르 왕실의 귀에 그 의향이 들어가기 전에 재빨리 막으려 한 거지.”

    제롬은 그의 말에 심각한 얼굴로 고개만 수그렸다. 공작의 말대로였다. 그렇다면 트리에스테에서부터 데려온 사절단 중 윈스턴 대공의 끄나풀이 있다는 뜻인데 대체 누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애당초 사절단 명단에 친 블랙웰 공작파만 넣었기 때문에 모두가 의심에서 배제되면서도 동시에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일단 폐하의 수색 작업에 만전을 기하고 앤지에 대한 것도……. 그건 그것대로 진행해.”

    “알겠습니다, 주인님. 마님께서도 불안에 떨고 계시니 안심시켜 드리고 보안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카일은 알아서 하라는 듯 대꾸하지 않다가 심복을 다시 불러 세웠다. 뭔가 떠오른 눈빛이었다.

    “그자는 아직 이곳에 있나?”

    “혹 미카엘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예. 왕궁 내에 있습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공작님 부처를 호위하는 것이 그림자 친위대의 임무니까요.”

    “그의 기척은 느껴 본 적 없어. 다른 네 명과는 달리. 그래서 물어본 거야.”

    카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의 승인하에 미카엘을 그림자 친위대에 영입한 것은 제롬이었다. 제롬 역시 처음에는 서자인 미카엘을 꺼려 했지만 그의 실력에 대해서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카엘은 검과 총, 모두에 뛰어났고 군인으로서 출중한 재능이 있었다. 카일 도련님만큼 타고난 기민함이 있지는 않았지만, 친위대로서 활용되지 않으면 아까울 정도의 능력이긴 했다. 생전의 존 피츠로이와 에드워드 님도 훌륭한 무인이었는데 그 유전자가 두 아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이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도련님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일 년 전쯤 미카엘이 그에게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루이스 던스트의 끄나풀을 떼어 내 준 것도 그를 친위대에 영입한 이유 중 하나였다. 당시 미카엘이 던스트 부인의 첩자에 대해 귀띔해 준 덕에 첩자를 제때 변방으로 보낼 수가 있었다. 그때 미카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었다.

    -저는 누구의 끄나풀도 아닙니다. 던스트 부인이 제게 예외적인 호의를 보이시는 건 사실이지만, 그를 이용해 주인님을 배신하거나 가문에 해가 될 일에 동조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루이스 던스트의 꼭두각시는 아님을 확인하여, 안도한 건 사실이었다.

    “실은 미카엘은 지금 레티샤 님 쪽에 있습니다. 빈터가르에 있는 동안은 마님을 호위하는 편이 더 나을 듯해서 그렇게 조치했습니다.”

    카일의 심기를 거슬릴까 싶어 그리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미카엘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배다른 동생과 그 부인의 수발을 들며 이렇게 가솔 노릇을 하느니, 차라리 거액의 독립금을 지원받아 공작가와 접점 없이 사는 게 더 나을 텐데.

    도련님은 차갑고 냉혹한 사람이었다. 때론 섬뜩할 정도로 무자비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옹졸하고 비열한 성정은 아니었다. 그는 미카엘이 원하는 것 이상의 자금을 기꺼이 내줄 것이다.

    도련님이 현재 미카엘에게 품고 있는 비호감과 경계심은 과거, 앤지 리즈델과 얽힌 일 때문일 뿐 미카엘이 가문의 서자라서가 아니었다. 카일렉 님의 감정을 통제하고 있는 근간은 적자로서의 우월감이나 견제 심리보다, 제 여자를 향한 절대적인 소유욕과 독점욕에 있었다.

    “미카엘 랜들만은 궁을 빠져나가도 모른 척하되 사람을 붙여 둬. 그림자 중 가장 오래된 알렌 하디가 좋겠군.”

    “예? 하지만…….”

    “빈터가르에 있을 동안은 그렇게 조치해 둬.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비상 상황이야.”

    “예, 알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점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도록 조치해 두겠습니다.”

    제롬은 즉시 대답했다. 도련님의 심리를 알 듯 말 듯했지만 그가 미카엘을 여전히 믿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이해했다. 하긴 자신도 아직은 온전히 그를 신뢰할 수 없으니 무리도 아니다.

    “빈터가르 국왕 부처께서 주인님만 단독으로 저녁 만찬에 초대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만약을 대비해 논의하려는 거겠지. 그들도 심기가 편치 않은 눈치야. 일단 준비할 테니 나가 봐.”

    제롬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려 할 때였다. 카일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고꾸라졌다. 심장에 서늘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팍을 부여잡고 카펫 위에 한쪽 무릎을 짚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카일이 악문 잇새로 신음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어지러웠을 뿐이야. 간밤에 잠을 못 자 피로가 쌓인 거겠지. 쉬면 나아질 테니까 신경 쓸 것 없어.”

    설렁줄을 당기려던 제롬이 멈칫했다. 도련님은 평소에도 의원을 보는 걸 질색했다. 어릴 적부터 늘 약과 치료에 시달려서 그런지,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거나 기절하기 전까지는 좀처럼 진료를 받지 않았다.

    “나가 봐도 돼, 제롬.”

    카일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낮게 한숨을 뱉었다. 그제야 심복도 마지못해 다시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카일의 허리가 다시 꺾였다. 두 손이 카펫을 거세게 누르며 쓰러질 뻔한 상체를 간신히 버텨 냈다.

    제롬이 나갈 때까지 억지로 눌러 참은 기침이 터져 나왔다. 붉은 소용돌이 문양의 카펫에 도 다른 붉은 점이 흩뿌려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이 가슴을 꿰뚫고 들어와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카일은 헐떡임 속에서 지그시 이 악물고 통증을 참았다. 무지근한 격통에 시야가 하얗게 바래고 척수에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 벽을 짚었다. 입을 틀어막았던 한 손이 태피스트리 벽화를 누르자 검붉은 얼룩이 인장처럼 찍혀 버렸다.

    발작 주기가 몇 달에서 몇 주, 이제는 2주에 한 번꼴이 되어 있었다. 긴장이 흐트러지지 않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각혈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치료를 미룰 수는 없을 터였다.

    버텨야 돼. 앞으로 보름……. 앤지를 찾아서 트리에스테에 돌아갈 때까지만이라도.

    사라진 레니에 8세도 뇌리에 떠올랐다 이내 스러졌다. 어떤 기묘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하고도 스산한 전율이 등줄기를 훑어 내리고 있었다.

    만약 그 예감이 맞다면 레니에 8세의 운명은 여기까지일 터였다. 그리고 그 흑막 너머에 윈스턴 대공이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이 직감대로 흘러갈 경우, 트리에스테에는 엄청난 파란이 일 것이다.

    카일은 재킷 깃의 브로치를 똑바로 고쳐 꽂았다. 블랙웰 가를 상징하는 순백색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쳐 날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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