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 (69/106)
  • #69

    “앤지.”

    이번엔 마르틴이 브린보다 한발 앞서 정색하고 나섰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길 일은 절대 없어. 너와 노아 둘 다.”

    “내일 오후 우리 쪽 사람들을 로르샤 마을에 보내 놓겠네. 캐서린 베케트와 앤지의 거처를 중심으로 마을에 수상한 움직임은 없는지 철저히 지켜보고 보호할 것을 지시해 둘 거야. 그러니 아이는 걱정 말고 잠시 시골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생각해.”

    “감사합니다, 빌렘 아저씨.”

    “내가 경시청에 휴가를 내고 레반까지 따라갈게.”

    “아, 그럼 나도……”

    “당신은 여기서 노아와 패티를 맡아 줘야지. 당신까지 오면 더 눈에 띌 거야.”

    “알았어. 대신 가기 전에 꼭 깨워 줘야 돼! 인사도 없이 가는 건 안 돼.”

    앤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논의는 끝났다. 이제 간단히 짐을 챙기고 새벽에 떠날 준비만 하면 된다. 그녀는 모두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재차 인사한 뒤 요람 속 노아에게 향했다. 아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작고 귀여운 동물처럼 두 손을 앙증맞게 모으고 발그레한 한 쪽 뺨을 베개에 댄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늘 사이좋은 여동생 패트리샤도 노아와 등을 딱 붙인 채 쌍둥이처럼 곤히 자고 있었다. 앤지는 두 아이가 함께 덮은 이불을 목까지 꼼꼼히 올려 주었다.

    이토록 소중하고 고귀한 아기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공작가가 노아의 존재를 알게 되어 제 품에서 앗아 간다면…….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앤지는 입술을 꼭 깨물고 열기로 시큰거리는 눈가를 손등으로 눌렀다.

    걱정하지 말자. 마르틴의 말대로 우리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게도, 내 아가에게도.

    * * *

    가스등이 하나둘씩 켜졌다. 거리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세 시간 전까지 퍼레이드로 축제 분위기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고적했지만 헤데스타드, 제 나라의 수도처럼 스산하진 않았다.

    카일은 말에 탄 채 이를 악물었다. 사위는 어두웠고 시야는 절망감에 혼탁했다. 행렬을 이탈하자마자 뒤를 쫓아오던 제롬에게서 말을 빼앗아, 온 도심을 미친 사람처럼 헤맨 지 세 시간째였다. 오롯이 낯선 지역만 아니었다면 여자 하나 추격해 잡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젠장! 앤지…… 대체 어디 숨은 거야.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어느새 제롬과 친위대가 어쩌지도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수색을 명해 봤자 소용없었다. 국빈으로 초청받아 와 있는 마당에, 타국의 인가를 일일이 뒤져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평화 수교를 맺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아 그 협정에 금이 갈 수도 있었다.

    “도련님.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더 이상 여기 계셔서는 안 됩니다. 이만 황궁으로 돌아가셔야…….”

    제롬이 다른 말을 탄 채 그의 등 뒤로 다가섰다. 그의 입에서 사적인 칭호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으나 카일은 그에 대해서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제롬이 뭔가 깨달은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도련님, 혹시……”

    “앤지를 봤어.”

    역시. 심복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카일이 다시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어두운 강변과 불 꺼진 건물 어딘가에 고정된 채였다.

    “앤지였어, 분명히. 닮은 사람도 아니고 잘못 본 것도 아니야.”

    “그럼 역시 이 빈터가르에…….”

    “고동색 가발에 집 앞에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평상복에 가까운 차림새였어. 시타델 중심가에 살고 있는 게 분명해.”

    “죄송합니다. 이미 시타델에 심어 둔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동안 찾아내지 못했군요. 날이 밝는 대로 몽타주를 새로 만들어 철저히 수색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트리에스테로 귀국 전까지 앞으로 보름. 그 안에 반드시 찾아야 돼.”

    카일의 저음이 일갈을 억누르듯 한층 낮아졌다.

    “비용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찾아내.”

    “알겠습니다. 찾는 대로 왕궁 외부에 안가를 마련해 그곳에 먼저 모셔 두겠습니다. 아무래도 마님이 계신 만큼 왕궁은…….”

    “상관없어.”

    카일이 말고삐를 당겨 광장 쪽으로 돌아섰다.

    “앤지를 찾는 즉시 레티샤 블랙웰…… 아니, 레티샤 데르반과는 이혼 절차를 밟을 생각이야. 처음부터 결혼은 3년 정도만 유지될 거라 언질을 주었고, 어차피 수개월 내 그럴 계획이었으니 한두 달 앞당긴다 해서 문제 될 건 없어.”

    그때였다. 저만치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뭐라고 대꾸하려던 제롬이 재빨리 말고삐를 당겨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주인을 엄호하듯 앞을 가로막는 순간, 낯익은 트리에스터 친위대 기병 하나가 달려와 황급히 보고했다.

    “공작님! 크, 큰일 났습니다! 지금 빈터가르 왕궁에서……”

    “무슨 일이냐.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제롬의 독촉에 기병은 들릴락 말락 단숨에 말을 뱉어 냈다.

    “폐하께서 실종되셨습니다.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시지 않아서 빈터가르 근위대의 도움을 받아 궁 안을 샅샅이 찾고 있습니다만……. 시종들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뵌 것이 퍼레이드가 끝나갈 무렵이었다고 합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제롬이 언성을 높일 뻔하다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카일 쪽을 보았다. 그도 꽤 놀랐는지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세 사람은 고즈넉한 어둠 속, 타국의 시가지 한복판에 서서 수 초간 시선만 교환할 따름이었다.

    윈스턴.

    카일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트리에스테의 제 2 황자이자 레니에 8세의 동생, 윈스턴 대공이었다. 심약한 형을 이제나저제나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제가 차지하려는 열망, 그 은밀한 탐욕을 제대로 잘 숨기지도 못했던 교활한 낯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그는 더 지체하지 않고 왕궁 쪽으로 말을 몰았다. 섬뜩한 한기가 느껴졌다. 마침내 앤지를완전히 되찾게 될 거라는 안도감도 잠시, 불길한 예감이 오한처럼 전신에 엄습해 오고 있었다.

    * * *

    트리에스테에서 온 사절단은 꼬박 밤을 새웠다. 왕궁은 긴장과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빈터가르 국왕 일가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국빈으로 모신 데다 이제 동맹국까지 된 이웃 나라의 황제가 별안간 증발하다니,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시가지 퍼레이드가 한창이던 늦은 오후, 레니에 8세는 침실에서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방 안으로 깨우러 들어갔을 때, 후원의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침실 창문만이 활짝 열려 있었다는 게 시종들의 증언이었다. 귀빈용 별궁 곳곳에 보초를 서고 있던 기병들, 침실 문을 지키던 근위대는 침입자가 일절 없었노라 증언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창은 보안 문제로 실내에서 굳게 잠겨 있었다. 난투극을 벌이거나 저항한 흔적도 없었다. 모든 정황상 레니에 8세 본인이 직접 창을 열고 밀실에서 빠져나가 호수로 들어갔거나, 호수를 통해 바깥으로 나간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럴 리 없다는 게 트리에스테 사절단의 주장이었다.

    “빈터가르 왕실의 인가가 떨어졌으니 지금 이 순간부터 궁성을 폐쇄해. 트리에스테인은 폐하를 찾을 때까지 추밀원과 근위대 가리지 않고 단 한 명도 나가지 못한다. 서신과 전서구, 외부인과의 교류도 철저히 차단하도록. 근위대의 책임은 이후에 엄중히 묻고 다스리겠다.”

    카일이 제롬을 통해 냉엄한 지시를 내렸다. 사절단 귀족들은 당장 트리에스테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 주장은 단칼에 일축되었다.

    “알려 봤자 아무 의미 없습니다. 빈터가르 왕실 측에서 대규모의 사병을 풀어 수색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으니 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만에 하나 폐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본국에서 알아 봤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겠죠.”

    “그, 그런……!”

    그 냉정한 언사에 사절단이 입을 쩍 벌렸다. 최악의 경우 레니에 8세가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고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침 모레까지 건국 기념일 축제가 이어져서 도심이 시끌벅적할 테니 수색은 더 수월할 겁니다. 사병들이 곳곳에 보여도 시민들의 보안을 명분 삼으면 이상할 게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카일렉 경. 나는 빈터가르 왕실을 믿어도 될지 모르겠네. 폐하는 왕실 일가가 대거 참여한 시가지 퍼레이드 중에 사라지셨어. 하필 빈터가르의 최정예 왕궁 근위대가 바깥에 있을 동안 말이야.”

    황제의 고문관인 머레이 켄트 공작이 의견을 피력했다. 카일은 그를 돌아보았다. 연로한 상대를 대하는 몸짓은 좀 더 정중했으나 냉담한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이쪽의 소행일 리 없습니다. 자칫하면 심각한 갈등이 야기되고 전쟁까지 갈 수도 있는 사안입니다. 빈터가르 왕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아요. 경께서도 그동안 직접 보고 느끼신 게 있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방금 하신 말씀도 역으로 뒤집어 보시죠. 빈터가르 최정예 근위대가 바깥에 포진해 있는 동안, 이 국빈용 별궁은 우리 쪽 트리에스테 기병들로 철저히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럼 암살이든 납치든 어느 쪽의 범행일 가능성에 더 무게가 실리겠습니까.”

    켄트 공작은 물론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제야 내부자의 소행일 가능성에 생각이 미친 듯했다. 카일의 어조는 한결 더 신랄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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