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 (66/106)
  • #66

    스르르 눈이 떠졌다. 덜걱, 희미한 소리가 모든 오감을 자극했다. 섬을 떠나 첫 반년간 단 하루도 푹 자지 못하고 경계를 풀지 못했던 날들로 돌아간 것 같았다. 누군가 침실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작년까지 늘 머릿속에 대비했던 대로 몸이 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침대 아래 준비해 둔 가방을 등에 메고, 곤히 잠든 노아의 요람을 포대기에 감싸 가슴팍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가슴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일 층 창문을 통해 침실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스산한 안개가 어둠을 뚫고 검푸르게 피어올라 시야를 가려 왔다. 앤지는 눈을 깜빡이며 낯익은 윤곽을 바라보았다. 다리가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앤지.

    카일이 눈앞에 있었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검은 머리칼, 순백색 크라바트와 재킷이 밤마다 밀회를 나눴을 때처럼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이었다.

    -앤지, 나는…….

    그는 안개에 둘러싸여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제야 앤지는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환각 같은 그 모습에 품속의 아기를 꼭 끌어안았다. 현실이 아니란 걸 자각했으면서도 공포심에 이가 덜덜 떨렸다.

    -나는 영원히 살고 싶어. 너와 함께…….

    그의 손가락이 요람 속 아기를 가리켜 보였다. 앤지의 가슴이 쿵, 떨어졌다. 두 팔이 보호하듯 노아를 꼭 부둥켜 감쌌다. 그러자 서늘한 저음이 다시 날아왔다.

    -내 아이인가?

    아니야! 아냐…… 노아는 내 아이야!

    목구멍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카일이 서 있던 자리에 다시 안개가 드리워지며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그의 잔상 위로 다른 누군가가 겹쳐 있었다.

    앤지는 미간을 찡그린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알아볼 듯 말 듯 또렷하지는 않았다. 목소리도 쇳덩이에 긁히는 것처럼 거칠게 변해 있었다.

    -앤지. 나는 영원히 살고 싶어. 불멸의 삶을 꿈꾸는 건 모두가 바라는…… 나는…… 이터니티를……

    손이 안개를 뚫고 뻗어 오려는 찰나, 앤지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제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그때 우아앙, 아기 울음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노아!”

    앤지는 벌떡 일어나 바로 옆의 침대에서 아기를 안아 들었다. 아이는 엄마의 비명에 깼는지 엉엉 울다가 히끅거렸다. 앤지가 품에 안고 등을 토닥거리자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아가, 미안해. 엄마가 꿈을 꿨어. 그래서 우리 아기를 놀라게 했네…….”

    아직도 심장이 떨렸다. 10월의 선선한 가을밤, 온기가 감돌아 실내는 따뜻했다. 그런데도 오한이 일며 식은땀이 흘렀다. 아기는 눈을 슴벅거리다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앤지는 다시 잠든 아기를 조심스럽게 눕히고 이마를 훔쳤다.

    왜 갑자기 그런 꿈을 꾼 걸까.

    트리에스테의 황실 사절단이 며칠 내 빈터가르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카일의 꿈을 꾼 것은. 게다가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카일 뒤로 나타난 실루엣은 대체 누구였을까.

    몸서리가 쳐졌다. 앤지는 바짝 움츠리고 있다가 크게 심호흡했다. 단지 꿈일 뿐이다. 꿈에서는 누구도 그녀와 노아를 해칠 수 없다. 그가 시타델에 온다는 정보를 들은 이후 희미한 불안을 느끼긴 했었다. 그래서 그런 악몽을 꾼 것 같았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이다. 초조했던 무의식의 발로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반드시 없어야만 했다.

    바깥은 아직 깜깜했다. 창 너머 비쳐 든 달빛이 크림색 커튼 위로 잔잔하게 스며들었다. 하늘이 희붐하게 밝아 오기까진 한참 남아 있었다.

    * * *

    하늘은 시리도록 청명했고 도심을 떠도는 공기는 신의 축복처럼 포근했다. 노아의 생일을 보름 앞둔 가을날, 거리는 오전부터 건국 기념일 축제 준비로 시끌벅적했다. 사람들은 오후 늦게 거행될 왕실 퍼레이드를 벌써부터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앤지는 퍼레이드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만 해도 브린, 그녀와 마르틴의 아기인 패트리샤, 노아와 다 같이 집에 있었다. 하지만 내일 세례식을 앞둔 아기의 손수건에 문제가 생긴 바람에 부랴부랴 외출에 나서야 했다. 가족 외 마담 M의 실체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의상실 주인이 어제 받은 완성품을 가지고 찾아온 것이다.

    “앰버, 어쩌지? 영사 부인이 다른 건 정말 마음에 드는데 여기, 아기 이름의 철자가 잘못됐대. 오늘 안에 다시 고쳐서 전달해야 할 것 같아.”

    “네? 그럴 리가 없는데……. 아기 이름이 미카엘, Michael, 이 철자가 아니에요?”

    “빈터가르에선 그렇지만 아기의 대부님이 비첸틴 출신이라 그쪽 식으로 지어 줬나봐. 그럼 Mikael이 되거든. 빈터가르에 워낙 이민자들이 많아지니까 똑같은 이름이더라도 철자는 다양할 수 있어. 보통은 Michael, Mikael이지만 트리에스테에서는 Mikyel이나 Mikyle로 쓰기도 하잖아.”

    “아……. 맞아요. 그렇긴 하지요.”

    불현듯 섬에서의 미카엘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의 이름도 Mikyle로 쓰여 있었지. 헤데스타드에서 무사히 잘 지내고 있을까…….

    하지만 더 상념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었다. 매들린 부인이 그녀를 부드럽게 독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 나랑 작업실에 가서 이름만 다시 수놓아 줄 수 있을까? 집에서 쉬고 있는데 정말 미안해. 하지만 다섯 시 전에는 꼭 끝낼 수 있게 도울 테니 퍼레이드를 못 보는 일은 없을 거야! 나도 굉장히 기대 중이거든.”

    “아, 아니에요. 그건 괜찮아요.”

    앤지는 애써 당혹감을 감추며 웃어 보였다. 퍼레이드를 보긴커녕 바깥에 일절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 이유를 말할 순 없었다.

    “금방 끝낼 수 있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런데 마침 작업실에 파란색 실이 떨어졌거든요. 반드시 그 색깔로 해 달라고 하셨으니까 아무래도 의상실에 직접 가야 할 것 같은데…….”

    그 때 브린이 패트리샤를 보모에게 넘겨주고 끼어들었다.

    “그건 안 되지! 마담 M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매들린 부인 뿐인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라도 하면…….”

    “어머,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축제 첫날인데다 퍼레이드도 있어서 아까 일찌감치 퇴근시켰어. 가게엔 나뿐이야.”

    “그래요? 그럼 거기서 마무리할게요. 영사님 댁이 가까우니까 가져다드리는 건 사환 아이에게 부탁하면 되겠네요. 브린, 빨리 다녀올 테니까 노아 좀 부탁할게. 세례식이 내일이니까 오늘 안엔 꼭 넘겨드려야지.”

    “어쩔 수 없네. 대신, 걷지 말고 안톤 아저씨 마차를 타고 가. 바로 준비시킬게.”

    앰버는 가발 위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케이프를 두른 후 매들린과 마차에 올랐다. 거리는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다들 일찌감치 일과를 마쳤는지 가족과 광장에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길거리 행상 가판대 앞에서 샌드위치와 파이, 밀크티에 루트비어를 먹고 마시는 사람들도 많았다. 분수대 아래 돌바닥엔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 떨어뜨린 설탕 가루가 눈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머나, 저 머핀 노점도 오랜만에 나왔네? 저기 머핀이 정말 부드럽고 맛있거든. 앰버도 먹어 본 적 있어?”

    “아, 아뇨. 저는 아직…….”

    “저번 달에 새 직원이 사왔길래 한 번 먹어 봤어. 그 직원이 트리에스테 출신인데 거긴 여기하곤 정말 다른 분위기래. 여긴 자유롭고 활기찬데, 거긴 길거리 음식도 금지되어 있고 날이 저물면 외출을 금지시킨다나? 어휴, 삭막해서 어떻게 살아?”

    “트리에스테에서……. 수도 헤데스타드에서 오셨대요?”

    앤지가 애써 동요를 감추고 물었다. 가족 외 사람에게서 그쪽 이야기를 들으니 공연히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있었다.

    “응. 전쟁 때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빈터가르에 망명을 왔는데 얼마 전 그쪽 친척과 연락이 닿은 모양이야. 편지만 가끔 주고받았는데 그마저도 작년부터 끊겼다나. 이런, 벌써 다 왔네.”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앤지는 마부에게 30분 후 데리러 와 달라고 이른 후 매들린과 의상실로 들어섰다.

    * * *

    빈터가르의 왕실은 일 년에 여러 차례, 수상 퍼레이드와 시가지 행렬 등을 통해 국민들과의 교류를 꾀했다. 이번 건국 기념일의 도심 퍼레이드도 그 일환의 하나였지만, 국빈인 트리에스테의 황실은 보안상의 이유로 행렬은 불참하게 되었다.

    두 나라 간 평화 수교 협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양국 중 어느 쪽도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 전운이 감도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는 만큼 그 부분에서는 두 왕실이 완벽하게 한마음 한뜻이었다. 하지만 경제 수교 및 무역 개방 등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할 부분들이 많았다.

    “폐하가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어.”

    “그렇습니까. 무역 통상만이라도 합의를 봐야 할 텐데요.”

    제롬이 주인의 외출 준비를 거들며 덧붙였다. 그는 이제 블랙웰 공작의 정식 비서관이 되어 있었다.

    “우리 쪽만 결단을 내리면 빈터가르도 바로 응할 거야. 아직까지는 내각 의회보다 왕실의 입김이 더 센 편이지만, 이번 현안에 대해서만은 왕실과 의회 양쪽 다 통상을 원하고 있으니까.”

    카일이 라운드 재킷을 벗고 롱코트를 받아 들며 말을 이었다.

    “아직 시간이 2주 있으니 두고 봐야겠지. 그보다…… 그쪽은 아직인가?”

    앤지의 행방에 대한 물음이었다. 제롬은 시선을 내리깐 채 고개를 저었다.

    “네, 아직 이렇다 할 연락이 없습니다.”

    카일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라 더 논할 것도 없었다. 뭔가 있었다면 진작 보고를 들었을 터였다.

    그는 롱코트를 걸친 뒤 제롬이 건네는 핀으로 크라바트를 고정시켰다. 목에는 담회색 모피 머플러를 두르고 머리에는 격식을 갖춘 톱 해트 대신 볼러 해트를 썼는데 보온을 위해서라기보단 얼굴을 최대한 가리기 위해서였다. 행렬의 맨 끝, 마차 안에만 있겠지만 창문 너머로 바깥 풍경을 보고 있을 터라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마님의 준비는 끝났는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카일은 손에 장갑을 끼며 한쪽 눈썹만 치켜올렸다. 공작 부인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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