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 (65/106)
  • #65

    빌렘의 시선이 앤지를 향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앤지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마르틴이 이어 말했다.

    “내가 할머니께 3주 후 찾아뵙겠다고 전보를 보낼게. 별일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까 더 신경 쓰는 게 좋겠어. 평소에도 그렇지만 당분간 외출은 자제하고 늘 조심하고.”

    “그럴게. 지금 작업 중인 드레스가 다음 주쯤 마무리될 거야. 그럼 당분간 일을 받지 않고 집 안에만 있을까 해.”

    “그게 좋겠다. 아 참! 전에 황실에서 의뢰 들어온 테이블보는 다 납품됐지? 세상에, 시종장이 의뢰했다고 들었을 땐 누가 장난치는 줄 알았지 뭐야. 이제 왕실에서까지 인정받는 마담 M이라니!”

    “또 의뢰가 들어올지 모르니 아예 멀리 가 있는 걸로 하는 건 어때?”

    “아무래도 그게 낫겠지? 의상실엔 내가 말해 둘게. 마담 M이 휴가 중이니 11월 이후에 다시 청해 달라고.”

    마르틴과 브린의 덧붙임에 앤지가 감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 나도 그 편이 좋을 것 같아. 대신 그동안은 집에서 식구들 옷만 만들게. 마침 빌렘 아저씨 손수건이랑 패트리샤 아기옷 준비를 해 놨어. 내일쯤 원단 재료가 도착할 거야. 두 사람 것도 있는데 그건 비밀.”

    “앗,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벌써 기대된다!”

    브린이 맑게 웃었다. 잠시 무거웠던 테이블 위 공기가 다시 평소처럼 훈훈하게 변했다. 감자와 양배추, 쇠고기를 넣은 스튜에 이어 커다란 훈제 햄,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넙치 요리가 포도주를 곁들여 차례대로 식탁에 올려졌다. 모두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식사를 들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앤지는 빌렘이 들려주는 대륙 간 철도 공사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내심 신에게 빌었다. 부디 이 행복이 깨지지 않기를. 이 가정의 평안이 그녀로 인해 훼손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기만을 빌었다. 그리고 카일 역시…….

    그가 그녀를 완전히 잊었기만을 바랐다. 그의 행복을 빌어 주는 건 불가능했다. 그의 선대가 저지른 죄악, 카일이 앤지의 양부모를 무참히 살해한 만행을 생각하면 그럴 순 없었다.

    다만 그 모든 과거를 진심으로 속죄하고 더는 죄를 짓지 않기를 바랐다. 그게 앤지가 바라는 다였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카이, 노아를 세상에 있게 한 카일렉 로던 블랙웰 공작을 향한 유일한 소망이었다.

    * * *

    시타델 도심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 빈터가르의 수도와 같은 이름을 지닌 황궁은 장엄하고 엄숙한 가운데서도 활기에 넘쳤다. 두 번에 걸친 대륙전으로 절반이 날아갔던 궁성은 예전보다 더 튼튼하고 아름답게 복구되어 있었다.

    까마득히 높은 성채 아래 내려다보이는 도심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여기저기서 치솟는 굴뚝의 연기와 떠들썩한 거리, 하나같이 웃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쇳덩어리의 소음조차 귀에 거슬리지 않고 신문명의 발로처럼 느껴졌다.

    빈터가르는 입헌 군주제 산업 국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트리에스테 왕실 사절단 중 누구도 그 사실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두 나라의 국왕과 수행단이 밤이 깊도록 공식적인 환영 연회를 가지고 있을 때였다.

    황궁과 저만치 떨어진 탑 앞에 트리에스테 근위대 셋이 서 있었다. 클로크를 걸치고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가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그쪽은 달빛도 유독 희미해서 사위는 암흑이나 다를 바 없었다. 경비병 하나가 먼저 운을 뗐다. 혼잣말에 가까울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엿새 후 건국 기념일 시가지 행진을 할 거야. 그때가 적기다. 빈터가르 최정예 근위대는 죄다 거기 몰려 있는 반면 트리에스테의 겁쟁이 왕은 이 궁 안에만 처박혀 있을 테니까.”

    “그런가. 그럼 그날 왕과 공작 부처까지 셋 다 한 번에 보내야겠군.”

    “명심해. 암살자는 반드시 빈터가르인인 척 증거를 남기고 처리해야 돼. 그래야 윈스턴 대공이 전쟁이나 단절의 명분을 내세울 수 있다. 현재의 빈터가르는 너무 막강한 데다 주변국들과 휴전 협정으로 동맹을 맺은 상태야. 지금 상태에서 싸워 봤자 질 건 뻔하니 트리에스테 쪽에선 최대한 전쟁을 피하려고 할 거다.”

    “그럼 역시…… 막대한 보상금만 뜯어내고 다시 문을 걸어 잠그겠다 이거군.”

    “그렇지. 윈스턴 대공과 추밀원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영원한 계급 사회니까. 귀족이 떵떵거리며 군림하고 그 아래 평민들은 영원히 뼈 빠지게 일하다 죽는 나라. 우린 돌아가는 꼴을 보고 한몫 두둑하게 챙겨 타국으로 도망가면 그뿐이고.”

    “망명국으론 이 빈터가르도 나쁘진 않은 듯해. 귀족이 아닌 시민들이 내각제 의원이 되어 왕실과 동등하게 된다니. 트리에스테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나도 동의하네. 왕실이 다 몰살이라도 당하지 않는 한 트리에스테는 더 이상 미래가 없어. 근데…… 어이, 그림자. 설마 졸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림자라 불린 사내는 내내 침묵만 지키고 있다가 두건을 쓴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탑의 울타리에 기대 서 있다 몸을 일으켰다. 스산한 안개가 걷히며 사위가 좀 더 밝아졌다. 처음 입을 열었던 우두머리 격의 사내가 담합을 갈무리했다.

    “어쨌든 명심해. 엿새 후 임무는 완수될 거야.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구름이 달을 스쳐 가며 두건 아래 얼굴이 드러났다. 수려한 이목구비 사이, 두 눈이 은은한 어둠 속에서 달빛을 머금고 있었다. 사내 중 하나가 이질감을 느끼고 뭐라 알은척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특이하군. 보랏빛 눈은 처음 보는데……?

    * * *

    며칠이 분주하게 흘러갔다. 코린트식 기둥이 늘어선 회랑 끝에는 빈터가르 왕후가 머무는 로열 레이디 챔버가 있었다. 시가 행렬을 하루 앞둔 밤, 두 나라의 레이디들은 다 같이 챔버로 이동해 취침 전 여자들만의 시간을 가졌다. 레티샤도 그중 하나였다.

    “세상에……. 여기도 너무 아름답네요. 정말 어디 눈을 둬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빈터가르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왕성과 왕궁, 로열 챔버 모두 화려하고 웅장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트리에스테의 황궁뿐 아니라 블랙웰 공작저만 해도 이곳 못지않게 크고 호화로웠다.

    레티샤가 감탄한 것은 황궁 내 밝고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어둡고 음울한 트리에스테와는 달랐다. 경직되고 억압된 고국 왕실과는 닮은 것이 없었다.

    와 보길 잘했어. 트리에스테도 언젠가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걸까? 부디 빈터가르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되면 좋겠어.

    가슴이 들뜨고 설렜다. 레티샤의 철없는 마음에 한 줄기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우리도 입헌 군주제를 도입해 이렇게 발전하면 좋을 텐데. 내각제가 생기고 시민 계급이 활성화된다고 귀족이 하루아침에 당장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힘만 좀 약해진다뿐이지 왕실은 그대로니까 공작가도 지금처럼 똑같이 살면서 산업만 발전시키면…….

    레티샤는 왕후의 말에 경청하는 척, 시선은 소파 위 쿠션과 침구, 드레스를 빠르게 훑었다.

    저것 봐. 저 세련된 레이스와 프릴. 재봉틀이란 최신 장비로 만들었겠지? 심지어 식탁보까지 너무 예쁜 걸? 잠깐, 저 레이스…….

    레티샤는 시종장이 티팟을 채우는 동안 식탁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기퓌르 레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흔하지 않은 패턴이 눈에 익었다. 활짝 피어난 매리골드 꽃송이 무늬가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게 얽혀 있는 문양이었다. 분명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와아, 이 어려운 걸 이틀 만에 다 했단 말이야? 대단하다, 앤지! 한 올도 흐트러진 데가 없어!

    -너무 고급스러워! 꼭 황실 티타임에서나 볼 법한 레이스 식탁보야.

    레티샤가 눈을 깜빡였다. 몇 년 전 컬리넌 섬에서의 자수 모임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소녀들의 재잘거림도 귓가에 선명히 재생되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시종장의 옷소매를 붙잡고 물었다.

    “저, 이 식탁보…… 어디서 산 거죠? 혹시 트리에스테에서 넘어온 건가요? 무역이 끊기기 전에…….”

    “네? 아, 아닙니다. 시내 의상실을 통해 주문한 것입니다.”

    “블랙웰 공작 부인께서 좋아하시는 스타일인가 봐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똑같은 것으로 구해서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빈터가르의 엘리제 왕녀가 밝게 웃어 보였다. 레티샤의 당황을 감탄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아, 아닙니다! 말씀만으로도 정말 황송합니다. 그저…… 예전에 누가 만든 것과 너무 똑같아서요.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의상실 마담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이름은 뭔지…….”

    레티샤는 시종을 다시 돌아보았다.

    “송구합니다. 저도 직접 본 적은 없고 마담 M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M은 아마 이 무늬의 꽃인 매리골드 머리글자가 아닌가 추측만 하고 있습니다.”

    “아아……. 마담 M이 그것이었군요.”

    -언젠가 안개가 걷히고 세상이 안전해져서 바깥세상으로 갈 수 있게 되잖아? 그럼 앤지는 의상실을 차려도 될 것 같아. 아주 유명해지지 않을까?

    -맞아. 의상실 디자이너는 보통 마담을 붙여서 예명을 쓰니까 앤지도 하나 만들어서. 네 이름을 따서 마담 앤젤? 마담 앤즈? 아, 마담 매리골드는 어때? 이 꽃을 일종의 시그니처로 만다는 거지!

    레티샤의 뇌리에 소녀들의 수다가 빠르게 스쳐 갔다. 머리는 아득해지는데 가슴은 선득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매리골드 무늬 레이스를 들고 맑게 웃던 앤지의 얼굴이 너무도 또렷했다. 심장이 쿵, 쿵, 뛰었다.

    설마…… 설마 앤지가 이곳에?

    “참,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도 내일 시가지 행렬에 참여하시기로 했답니다. 비공식적 참여로 대중에겐 드러나지 않으니 마차 안에서 맘 편히 도심을 둘러보실 수 있을 거예요.”

    “어머, 그럼 우리와 함께 가시겠군요. 잘됐어요!”

    왕후의 말에 왕녀도 반가운 듯 손뼉을 쳤다. 레티샤가 퍼뜩 고개 들고 화답했다.

    “네, 아무래도 폐하 대신 시타델의 분위기를 한 번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벌써부터 무척 설렌답니다.”

    정신 차려.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매리골드는 트리에스테뿐 아니라 빈터가르에서도 흔한 꽃이잖아. 우연일 거야.

    레티샤는 애써 미소를 띠며 대화에 다시 동참했다. 입가에 가져간 찻잔이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을 가려 줘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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