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 (64/106)
  • #64

    카일렉은 3주 동안이나 비공식 동행을 자처했어. 혹시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면 자신의 동반을 거절했을 텐데.

    “그렇잖아. 정부 삼으려는 계집애를 찾으러 가는데 본부인인 내가 있으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제 억측이 헛된 망상이거나 자신이 있든 말든 카일렉이 개의치 않거나. 만약 후자라면 정말로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그녀가 그에게 의미 없는 존재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레티샤는 꽉 말아 쥔 주먹에 힘을 실었다. 만약 앤지 그년이 살아 있다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갈기갈기 찢어 줄 거야. 과거, 심부름꾼이 컬리넌 섬의 공작저에서 목격한 것은 진짜였다. 왜인지 진술을 뒤집었지만 결국은 그게 사실이었던 거다.

    앤지, 네가 정말로 살아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야. 카일렉 몰래.

    * * *

    따사로운 가을 미풍이 시타델 공원 한가운데를 꿰뚫고 휘감았다. 밝은 햇살이 붉고 노란 나뭇가지 사이로 이파리와 하나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한동안 쌀쌀하던 공기가 한 달 전으로 회귀한 것처럼 훈훈했다.

    앤지는 보모에게서 아기를 받아 안고 귀여운 보닛 모자를 살짝 젖혀 주었다. 햇빛의 따스함을 잠깐이나마 느껴 보길 바라서였다. 아이는 기분이 좋은지 까르르 소리 내서 웃으며 옹알거렸다.

    “어어마! 저기- 저기……. 장미…….”

    “으응. 장미. 장미가 아주 많이 피었네. 예쁘다.”

    “응. 예뻐어. 엄마 같아. 패티…… 패티도 예뻐.”

    “맞아. 패트리샤도 예뻐. 내일은 브린 숙모랑 패트리샤랑 다 같이 놀러 오자.”

    “응. 좋아.”

    아이가 앙증맞게 혀 짧은 소리를 냈다. 그래도 22개월 유아치고는 꽤 또랑또랑한 편이다. 앤지가 활짝 웃으며 아이를 보듬어 안았다. 날이 너무 좋으니 공원의 풀밭도 밟아 보길 바랐다. 하지만 아기는 졸린 지 하암, 크게 하품을 하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졸리구나, 우리 노아.”

    앤지는 능숙하게 아기의 등을 토닥거렸다. 노아는 금세 잠이 들었다. 보모인 엘리가 작게 속삭였다.

    “저녁때가 다 되니 슬슬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제가 안을게요.”

    “괜찮아요. 금방이니 제가 안고 갈게요. 아 참, 작업실 건물에 잠깐 들러야겠어요. 패트리샤에게 줄 모자를 완성했는데 관리인 부인께 보여 드리고 가져온다는 걸 깜빡했네요.”

    “그럼 제가 가져올 테니 먼저 들어가세요. 1층 라운지 맞죠?”

    “아……. 감사해요. 천천히 가고 있을게요.”

    앤지는 아기를 포대기에 감싸 타운하우스로 향했다. 마르틴과 브린, 가끔씩 들르는 빌렘 반 아미티지까지 이제는 모두가 가족처럼 익숙했고 제집처럼 편안했다.

    순간 등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에 몸이 흠칫 굳었다. 노아를 안은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앤지는 방향을 틀어 일부러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바짝 다가오던 중년 여성 두 사람이 재잘대며 나무 옆을 스쳐 갔다. 그제야 앤지의 긴장이 풀어졌다.

    3년 가까이 지났지만 경계심은 그대로였다. 등 뒤에서 발소리만 들리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블랙웰 공작가에서 보낸 괴한이 그녀를 위협하거나 노아를 빼앗아 가진 않을까 늘 불안했다. 그래서 이렇게 집 근처 공원에 나오는 게 다였다.

    한 달에 두 번, 아이를 데리고 캐서린 할머니를 보러 가는 여정에도 늘 주의를 기울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막막했지만, 마르틴과 아미티지 씨가 들려주는 정보를 들으면 잠시나마 희망이 샘솟기도 했다.

    -블랙웰 공작 부부에겐 아직 아이가 없는 모양이야. 일부러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인지, 자연적으로 생기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어. 문제는 블랙 매스를 아직도 이어 가려 하는지 여부인데, 그 부분은 여전히 미지수야. 트리에스테 자체가 워낙 베일에 싸여 있어 아무것도 정확히 알아낼 수 없으니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지난 3년간 미성년자 실종 사건은 보고된 바가 없다는 것일세. 적어도 빈터가르 안에서는 전무해. 우리 회사에서 재단을 만들어 빈터가르 전역의 고아원 시설을 재정비한 뒤로는. 소위 레머디의 수급이 끊겼다는 것인데……. 공작가가 수도로 이동한 후부터 그 의식을 아예 접은 것이 아닐까?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섬이 갑자기 불타 버렸으니 거기서 재배했던 이터니티 원재료를 더 이상 얻을 수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게 아닐까요. 이유야 어쨌든 그 야만적인 생각을 버렸다면 다행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앤지, 노아 모두 앞으로는 마음 놓고 안전하게 살 수 있을 테니까요.

    -자네는 이제 안전하다고 보네. 이제 10년이 넘었으니 섬을 탈출한 이스케이피를 더 이상 쫓진 않을 거라 생각하네. 하지만…… 앤지 양은 아직 모르겠어. 당분간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게 좋겠네.

    빌렘 아저씨의 조언이 아니었더라도, 온전히 긴장을 늦추지는 못했을 것이다. 3년이 흐른 지금은 습관적으로 꾸던 악몽도 사라지고 훨씬 안정되긴 했지만, 과거의 그림자가 일으킨 트라우마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유일한 남자, 굳게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어쩌면 노아까지 잃었을지 몰랐을 시간은 아직도 깊이 패인 흉터 같았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후벼 파여 괴롭고 슬펐다. 아무리 부정해도 가슴 한편에 남은 그리움까지 더해질 때면 더더욱 힘이 들었다.

    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는 어김없이 그와의 순간이 떠올랐다. 헤네랄리페 정원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곧장 품에 뛰어들기 직전까지 두근거리던 심장 박동, 가슴이 벅차오르던 기쁨과 설렘, 세상의 환희를 다 그러쥔 듯했던 감동. 꿈처럼 스쳐 가는 그 모든 기억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니.

    하지만 분명히 실재했던 일이었다. 카일은 정말로 실존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를 정말로 사랑했다. 그가 블랙웰 공작가의 후계자라서가 아니라, 그녀의 심장과 하나로 일치했던 카이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만의 그윽한 체취와 듣기 좋은 저음, 따스한 온기가 선명해 가슴이 먹먹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엄마 아빠를 향해 총구를 당기던 모습을 떠올리면 먹먹하던 가슴은 무너질 듯 아파 왔다. 통증은 그와 그 옆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을 공작부인, 미래에 태어날 둘 사이의 아이를 떠올리면 더욱 극심해졌다.

    언젠가는 이 기억에서 오롯이 벗어날 수 있을까? 그에게서 온전히 벗어난 나만의 삶, 노아의 행복과 가족의 안녕만을 생각하는 날들……. 언제쯤 그런 일상을 누릴 수 있을까.

    아기를 생각하자 시선이 품속의 온기로 향했다. 그녀는 노아를 제 품으로 살며시 더 당겨 안았다. 곤히 잠든 정수리에서 달콤한 우유 냄새가 났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온기, 색색거리는 숨결과 살짝 꼬물거리는 발짓에 그녀의 마음도 안정되어 갔다. 노아는 기적 그 자체였다. 모든 엄마에게 아이의 존재가 다 그렇겠지만 앤지에겐 더 그랬다.

    푸른 보석처럼 광채를 띤 눈동자, 여전히 솜털이 보송보송한 우윳빛 피부. 머리카락은 지금은 반짝이는 금갈색에 가깝지만 점차 잿빛 도는 흑발이 될 조짐이 보였다. 투명한 뺨, 길게 뻗은 속눈썹은 붓으로 그린 것처럼 섬세하기 그지없었다. 인형처럼 예쁘고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세 살 얼굴은 과거 사진으로 봤던 제 아빠, 어릴 적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아들을 볼 때마다 심장이 후벼 파는 고통이 밀려왔다. 사랑하는 아들을 보는 환희는 여전히 고통과 절망감을 동반했다.

    네 아빠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럼 너도 다른 아이들처럼 아빠의 애정을 듬뿍 받으며 자랄 수 있었을 텐데.

    앤지는 아기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포대기를 고쳐 안았다. 저만치서 옷 꾸러미를 들고 오는 보모가 보였다. 두 사람은 저택을 향해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천천히 기울었다. 소용돌이 모양의 돌바닥을 빨아먹던 햇살이 황금빛 석양에 밀려나고 있었다.

    트리에스테 왕실의 방문에 대해 들은 것은 저녁 직전, 노아와 패트리샤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고 경관들이 가스등을 하나씩 켜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장기 출장에서 돌아온 빌렘 반 아미티지는 저녁 식탁에 앉자마자 그 소식을 들려주었다.

    “일주일 뒤 도착 예정이고 3주간 빈터가르 황궁에 머물 예정이라는군. 표면적으로는 건국기념일 행사 초대에 응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커다란 의미를 시사하고 있어. 두 나라간 수교가 맺어지면 트리에스테에 커다란 전환점이 될 테니까.”

    “쇄국 정책을 접고 문을 조금씩 열겠군요. 하긴 그동안도 정말 오래 버텼습니다. 레니에 8세가 드디어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인지……. 왕실 수행단에 누가 있는지도 미리 알 수 있을까요?”

    마르틴이 장인에게 물으며 앤지를 살며시 돌아보았다. 그녀도 다소 긴장한 얼굴로 아미티지를 보고 있었다. 빌렘은 빙빙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대답을 들려주었다.

    “의원들이 귀띔해 준 명단에 블랙웰 공작은 없었네. 윈스턴 대공 부부만 제외하고 왕실 전체가 움직이니 대규모의 근위대에다 추밀원 원로 여럿만 동행할 모양이야.”

    앤지의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그녀는 시선을 눈앞의 접시로 되돌리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제야 긴장했던 몸을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브린이 불쑥 물었다.

    “건국 기념일 거리 행렬에도 참여할까요? 작년 비첸틴 왕가도 동맹 수교를 맺고 폐하의 생축연 행렬에 동참했으니까요. 안전상의 이유로 모습은 드러내지 않고 마차 안에만 타고 있었지만.”

    “그러진 않을 것 같구나. 소문에 듣자 하니 레니에 8세가 얼마 전 농민 시위대에 당할 뻔해서 트라우마가 깊은 모양이야. 아무튼 그동안엔 조심하는 편이 좋겠어. 캐서린 할머니께 가는 일정도 3주 후로 미루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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