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 (63/106)
  • #63

    “저, 공작님. 실은 마님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셨어요.”

    “이 시간에? 지금까지 깨어 있었나 보군.”

    귀부인들이 으레 그렇듯 레티샤도 아침 일찍 기상하는 법이 없었다. 밤새 살롱에서 남자들과 노닥거리다 온 모양이군. 카일렉은 싸늘하게 지시했다.

    “바쁘다고 해. 실제로 바쁘니까.”

    “아무래도…… 빈터가르에 동행하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카일의 눈에 성가신 빛이 떠올랐다.

    “제정신이 아니군. 내가 폐하와 동행하는 것 자체가 비공식 일정인 걸 모르나? 극비까진 아니라도 최대한 조용히 시타델을 둘러보고 폐하가 평화적인 수교에 적극 임하도록 뒤에서 독려하는 게 목적이야. 관광이라 착각했다면 오산이라고 일깨워 줘.”

    그때 중문 너머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바깥에서 커튼 상태를 본 챔버 메이드가 그의 기침을 알려 준 모양이었다. 카일은 제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옷을 마저 걸쳤다.

    중문 밖으로 나왔을 때는 제롬이 물러간 자리에 레티샤가 서 있었다. 눈 밑이 거뭇한 게 예상대로 밤을 꼬박 새운 듯했다. 서로 내외하는 부부는 타인처럼 서로 마주 보고 섰다. 카일이 차갑게 운을 뗐다.

    “용건은?”

    “카일렉. 나…… 나도 이번 사절단에 따라갈게요. 정말로 조용히, 죽은 듯이 서 있기만 할게요. 빈터가르가 어떤 곳인지 한 번만 직접 보고 싶어요.”

    “놀러 가는 게 아닙니다. 따라와 봤자 수행원만 늘리고 짐만 될 뿐이에요.”

    “전담 시녀들만 데리고 비공식적으로 동행할게요. 입도 뻥긋 않고 얌전히 있을 테니 제발 나도 가게 해 줘요, 카일렉.”

    “…….”

    “지금까지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요. 우리가 내외하는 것, 아이에 대해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철저히 비밀에 부쳤고, 또…….”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습니다. 원한다면 마음껏 발설하고 다니시죠.”

    물론 뒷감당으로 이혼으로 해야겠지만. 레티샤는 그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것까지 명료히 알아들었다.

    “알잖아요. 말할 생각 없어요.”

    레티샤가 입술을 꾹 물었다. 모든 게 밝혀지게 되면 그녀가 공작저 바깥에서 여러 애인을 거느리고 즐긴 것도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이혼하게 되면 사람들은 날 어떻게 보겠어. 백부님이 데르반의 이름에서 파문시키고 헌신짝처럼 버리는 건 두렵지도 않아.

    하지만 봉건제의 잔재로 뒤덮인 이 나라에선 이혼이란 것만큼 큰 허물은 없었다. 여자에겐 더더욱. 위자료를 아무리 많이 받아도 제대로 얼굴 들고 살 수 없을 터였다. 그녀의 속을 읽은 것처럼 카일이 덧붙였다.

    “이혼해도 지금처럼 지내는 건 똑같을 겁니다. 영지 바깥 어디든 원하는 곳에 땅을 주고 저택을 줄 테니까요.”

    어차피 내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데르반 일가에서는 펄쩍 뛰며 난리 치고, 테 데움의 헬퍼들은 재혼을 종용하겠지만 모두 부질없게 될 테니.

    “아니에요. 이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저 한 번만…… 이 갑갑한 곳에서 벗어나 시타델에 한 번 가 보고 싶어요. 아무리 문을 꽉 닫고 교류를 안 했어도 빈터가르가 얼마나 신기하게 변해 가는지 틈틈이 들려오는데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세상이 변하는데 우리만 과거에 머물러 있어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에요!”

    “그런 개인적인 이유로 국빈 사절단에 참여할 순 없습니다.”

    “이번 한 번만 데려가 주면 다신 성가시게 하지 않을게요. 연회에 같이 가 주지 않는다, 생축연에도 오지 않는다, 외로워서 이렇게는 못살겠다, 불평 불만 늘어놓지 않고 당신, 귀찮게 하지도 않을게요. 죽은 듯이 얌전히 살 테니까 제발…….”

    “또한 무고한 하녀들도 건드리지 않아야겠죠.”

    레티샤가 움찔, 입술을 감쳐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순식간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보군요. 말 나온 김에 경고하는데, 조금만 거슬리면 아랫사람들을 함부로 손찌검하는 버릇은 고치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잘못…… 했어요.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레티샤가 죄인처럼 머리를 숙였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험한 짓거리를 들켰다는 수치심과 모멸감보다, 한층 더 차가워진 그의 시선이 더 괴로웠다.

    카일은 무감한 시선으로 처연한 낯을 내려다보았다. 보석 핀으로 촘촘히 고정시킨 금발, 드레스가 미처 가리지 못한 흰 피부가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닮아서가 아니었다. 그저, 아주 조금이라도 그 여자를 떠올리게 하는 게 있다면 자연스레 온 영혼이 장악되기 때문이었다.

    잠이 들었을 때조차 앤지 리즈델의 심상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꿈과 악몽을번갈아 넘나들며 그의 의식과 무의식 모두, 철저히 지배했다.

    “일정 내내 황궁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이번만 허락하죠.”

    “저, 정말요?”

    레티샤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성숙한 여인이라기보다 덜 자란 아이 같았다.

    “도심 풍경은 창 너머로만 봐야 하고 거리 행렬에는 참여할 수 없습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감사해요, 카일렉. 정말로 고마워요!”

    카일은 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만 나가 보라는 신호에 레티샤는 발걸음도 가볍게 총총 걸어 나갔다. 그는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그쪽을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하긴 저 여자도 가엾은 희생물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레티샤 데르반도 무고한 양이었다. 3년 전 컬리넌 섬의 예배당에서 앤지에게 손댄 것 하나만 제외하면.

    그 예쁜 머리칼을 잡아당기고 곱디고운 뺨에 멍을 들게 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당장 레티샤에게 달려가 앤지에게 닿은 손을 잘라 내고 싶을 만큼 분노로 들끓었었다.

    결국 이 서류상의 결혼 생활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내년 안으로 왕정이 폐지되든, 쿠데타가 일어나 나라가 무너지든 일어서든, 어떤 식으로든 이 가련한 소국 트리에스테에는 커다란 변화가 밀려올 터였다. 누구도 그 파도를 피할 수 없었다.

    블랙 매스와 이터니티를 향한 맹신도 결국 허물어지겠지. 그때가 오면 레니에 8세와 헬퍼들이 그토록 오매불망 바라는 불멸, 그 허상도 완전히 물거품이 되리라 믿었다.

    카일이 소파에 팔을 뻗어 재킷을 집어 들려 할 때였다. 심장 쪽에 통증이 밀려오며 한쪽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몇 번의 기침 끝에 그가 입을 막았던 손을 펼쳤다. 손바닥 위로 선혈이 점점이 튀어 있었다.

    젠장…….

    카일을 이를 악물었다. 고통은 흐려졌지만 각혈은 각혈이다. 기침을 하는 빈도와 피를 토하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제롬은 물론 의료진에게도 내색하지 않아 왔지만 이대로라면 더 버티기 어려웠다.

    하지만 버텨야 돼. 이제 와서 왜 증세가 재발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완쾌됐다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열일곱에서 열아홉으로 넘어가는 동안 겪었던 증세 중, 하나만이 조금씩 다시 발현되고 있었다. 햇빛을 오래 쬐어도 끄떡없고 여전히 기운은 넘쳤지만, 간간이 빈혈과 각혈이 나타나고 있었다.

    왜? 어째서……. 이제는 레머디의 혈액 없이도 멀쩡히 살 수 있다 믿었는데.

    카일은 괴로움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조만간 이터니티의 부작용 증상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으면 짐승의 피라도 쥐어짜 삼켜야 하나. 그럼 ‘그것’이 되어 버린 조부, 광증을 참지 못해 어두운 숲을 쏘다니다 스스로 사지를 결박해 두곤 했던 아버지와 다를 게 뭐지.

    그는 헛웃음을 삼키고 피 묻은 손바닥을 손수건에 문질렀다. 그러고는 벽난로 안에 던져 넣었다. 천이 완전히 불살라 재로 변하는 걸 보고 나서야 카일은 방을 나섰다.

    다시 카일렉 로던 블랙웰 공작으로 돌아온 얼굴에는 한 점의 균열도, 감정도 없었다. 대기하던 시종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

    그랜드 홀의 창 앞에 있던 레티샤는 이름만 남편인 남자가 성큼성큼 마차로 향하는 광경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금 전 펄쩍 뛰며 좋아하던 것도 잠시, 얼굴이 수심에 잠겨 있었다. 멀리서 봐도 눈에 확 띌 만큼 근사한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창가의 벽에는 그녀에게 한창 구애 중인 신진 화가가 그린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다른 어떤 남자에게도 흥미가 당기지 않았다. 가질 수 없는 보물을 눈으로 보고 탐해야 하는 갈망처럼 자꾸만 갈증이 일어났다.

    더는 연회에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다들 눈치채고 있으면서 눈빛으로만 동정을 표하는 그 분위기를 모른 척, 억지로 웃는 것이 고역이었다. 간혹 랜돌프 백작 부인처럼 은근한 굴욕감을 느끼게 만드는 화법의 여자들도 지긋지긋했다.

    카일렉이 날 봐 준다면……. 나를 아내로 사랑해 주고 진짜 부부로 살 수만 있다면. 그럼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앤지가 죽었다는 걸 인정만 해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닌데.

    레티샤는 마차가 사라지자 창가에서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데 없는 귀부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도 스스로가 초라해 보였다. 자괴감이 그녀를 발아래로 한없이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앤지가 정말 살아 있는 건 아닐까. 어딘가에……. 혹시 빈터가르에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래서……?

    갑자기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무심코 흘렸던 의혹이 갑자기 또렷한 형태를 띠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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