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 (62/106)

#62

런드리 메이드 출신인 아내, 샬럿 또한 그 사실을 몰랐다. 문득 샬럿의 사슴처럼 까만 눈망울, 윤기 흐르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가 떠올랐다.

귀여운 여자였다. 메이드 중 가장 미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미카엘이 자신을 택했을 때 기쁨을 참지 못하고 그를 먼저 끌어안았다. 결혼 생활 내내 샬럿은 아이를 간절히 바랐다. 혹 자신 쪽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토로하며 눈물짓기도 했다. 물론 그럴 때도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내가 미안해 할 이유는 없겠지. 나 역시 희생자니까.

이 모든 것은 이터니티가 지닌 부작용의 일환이었다. 조부 존 피츠로이와 친부 에드워드는 이터니티에 각자의 첫 아이, 헨리 데이빗과 로이드의 피를 섞어 장기간 복용했다. 그 결과 심신 모두 끔찍한 부작용으로 고통을 겪다 죽었다.

카일렉은 이터니티 자체만으로도 성장 과정에서 여러 육체적인 부작용을 겪었다. 그 역시, 이모 헤스터가 빼돌린 이터니티를 어릴 적부터 취했다. 조카를 위해서 벌인 일이었지만, 카일이 부작용에 시달리는 걸 보고 나서야 미카엘에게도 먹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이런 식으로 신체에 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자네는 아마 후사를 볼 수 없을 걸세. 생식 활동은 가능하지만 몸에서 그 맥이 느껴지지 않아.

친부 에드워드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헤스터를 따라 공작저에 들어가기 전 그는 심하게 열병을 앓았다. 당시 마을 의원은 그렇게 진단을 내렸다. 입이 무거웠던 그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다가 섬이 불타던 날 연기에 질식사해 죽었다.

-네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면 내 마음도 놓이겠지. 단, 아이를 가져선 안 돼. 만에 하나 아이가 생기는 즉시 독립할 자금을 받고 조용히 떠나도록.

3년 전 카일렉이 내걸었던 조건은 사실상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복형제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굳이 제 치부를 드러낼 이유가 없었다. 지금 루이스 던스트가 그에게 호의적이고 은밀한 지지를 표하는 것 또한, 하등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 또한 밝힐 이유는 없겠지. 언젠가 그녀의 호의를 활용할 때가 올지 모르니.

샬럿의 잔상이 사라진 수면 위로 또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밝은 벌꿀색 금발, 에메랄드를 연상케 하는 녹색 눈이 어제 만났던 것처럼 선명했다.

앤지. 넌 죽지 않았어. 그렇지……? 어딘가에 분명 살아 있을 거야.

배가 어느덧 선착장에 닿아 있었다. 미카엘은 사공에게 작별을 고하고 배에서 내려섰다. 그가 이번 빈터가르행에 적극 동참한 데는 다른 개인적인 목적도 있었다.

* * *

미처 막아들 새가 없었다. 그녀의 동작이 한 끗 차이로 빨랐다.

창백한 칼날이 그보다 더 희끄무레 투명한 목 위를 가로질렀다. 보드라운 살갗 위로 순식간에 붉은 선이 생겨나 있었다. 뜨거운 피가 빗물 위로 역류하며 솟구쳐 올랐다. 피를 토하듯 자지러지는 비명이 온 섬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남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여자의 시신을 끌어안고 마구 흔들었다. 다시 노호하는 천둥 소리가 울부짖는 비명과 운율을 함께 했다.

카일은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두 인영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폭우 속 윤곽만으로도 낯이 익었다. 어떤 확실하고도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남자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여자는…….

툭, 무릎이 꺾이며 비에 젖은 돌바닥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몸이 물방울처럼 서서히 사라져 가며 눈앞에서 오열하는 남자에게 동화되었다. 비명은 이제 제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앤지! 앤지- 안 돼! 아아악! 제발! 죽으면 안 돼, 이대로 죽으면 나는…….

“……련님, 도련님!”

“……!”

“도련님, 괜찮습니다. 앤지는 죽지 않았어요. 어딘가 살아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정신 차리세요.”

제롬이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제야 손수건을 찾아들고 땀을 닦아 주는 낯이 평소처럼 진중해져 있었다. 호칭도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공작님. 요즘 너무 무리하신 듯합니다. 이틀 후 빈터가르로 가시기 전까지는 최대한 업무에서 손을 떼시고 휴식을 취하셔야…….”

“3주 동안 일이 밀릴 텐데 그럴 순 없지. 휴식은 거기서 취하면 돼.”

제롬은 더 토 달지 않고 한숨을 삼켰다. 국내의 업무만 잠깐 중단될 뿐 쉬실 수 있을 리가 없다. 시타델 황궁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내내 긴장의 연속일 터였다.

레니에 8세와 블랙웰 공작을 노리는 적들은 어디에든 있었다. 평화적인 수교를 원하는 빈터가르 황궁 안이라도 안심할 순 없었다. 트리에스테에서 데려가는 수백 명의 최정예 근위대, 비밀리에 움직이는 그림자 경호단에 둘러싸여 있어도 긴장을 늦출 순 없을 것이다. 거기에다 앤지의 수색까지 직접 관여하시게 되면 더 무리가 될 터였다.

“앤지의 행방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수배령을 접고 마을마다 사람을 심는 방식으로 바꿔 보려 합니다. 수색팀도 몽타주 수배는 별 효과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앤지가 만약…….”

만약 살아 있다면- 제롬은 그 말은 안으로 눌러 삼켰다.

“변장을 하고 있다면 몽타주는 큰 쓸모가 없으니까요. 일단은 저도 동행하니 자세한 것은 이동 중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카일은 제롬이 말하는 동안 묵묵히 옷을 갈아입고 창가의 커튼을 열어젖혔다. 황금 사자가 조각된 분수대가 정원 한가운데 내려다보였다. 이른 아침 공기는 맑지만 서늘했다. 10월로 접어든 헤데스타드, 블랙웰 영지는 빠르게 겨울로 향해 가고 있었다.

그가 제롬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악몽에 시달리며 헐떡이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카일은 오연한 블랙웰 공작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제 왕실에서 서신을 보내왔다. 폐하의 호위에 지원 요청을 해 왔더군.”

“예? 왕실 호위대와 별도로 말입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안심이 되지 않는 거겠지. 한 번 습격을 받은 후로 벌벌 떨고 있어.”

얼마 전 레니에 8세는 수도 인근으로 요양을 떠나는 길에 농민들의 습격을 받았다. 다행히 부상은 없었지만 충격이 꽤 컸는지 한동안 본궁 안에만 두문불출한 채 나오지를 않았다. 이번에 빈터가르 국빈 초청도 처음에는 동생인 윈스턴 대공을 대신 보내려는 걸, 추밀원에서 간신히 만류해 가게 된 것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보다 윈스턴 쪽에서 몸을 사리는 게 더 의심스러워. 우리가 빈터가르에 있을 동안 무슨 일을 획책할지 모르니 긴장을 늦춰선 안 돼.”

“네,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미 사람을 붙여 두고 동향을 철저히 지켜보게끔 지시해 두었습니다.”

트리에스테의 정치, 경제적인 상황은 나날이 악화일로에 있었다. 왕정은 더 심각한 상태에 봉착해 있었다. 입헌 군주제로 자리 잡은 빈터가르와는 달리, 국민의 신망은 바닥을 치고 매일같이 봉기와 반란이 곳곳에서 발발했다.

폐쇄 정책으로 외국과의 무역이 막혀서 가뜩이나 생계도 어려운 판에, 과도한 세금 징수까지 해 대니 당연한 결과였다. 블랙웰 가문이 나서서 중재하고 금전적인 방패막이 되는 것에도 점점 한계가 오고 있었다.

“왕정 폐지는 시간문제야. 이대로는 언제 쿠데타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제롬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표했다. 그가 폐하의 빈터가르 초대를 적극 독려하고 직접 동행해 보좌하겠다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폐하가 빈터가르의 사례를 직접 보고 최소 입헌 군주제 전환으로 생각을 달리하는 게 최선이었다. 적어도 유혈 혁명을 통해 강제로 폐위되고 왕정 자체가 폐지되는 것보다는 그들로서도 훨씬 나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더 강화된 절대 군주제를 고집하는 윈스턴 대공 측은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들은 결코 현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을 터였다.

“이번 외유로도 폐하가 마음을 바꾸지 않거나 윈스턴 쪽에서 반대할 경우, 계획은 예정대로 실행한다.”

카일은 냉연하게 덧붙였다. 왕실이 끝까지 버틴다면, 부득이 외세를 개입시켜서라도 12월 중에 왕정 폐지를 놓고 국민투표를 강행할 생각이었다. 혹독한 겨울이 되겠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블랙웰 일가를 정리하는 데만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가 컬리넌 섬에서 고립되어 있는 동안, 방계 중 왕실을 뒤에서 조종해 트리에스테를 봉건제로 되돌리고자 애썼던 자들을 하나씩 가지치기하고 재정비한 과정이 막바지에 있었다.

그 배경에는 레티샤의 백부, 사무엘 데르반 남작의 조력이 있었다. 카일의 편에 선 처가는 여전히 신뢰할 수 없는 기회주의자 무리였다. 데르반의 진짜 목적은 방계의 잔챙이들 힘까지 죄다 흡수해 저들의 입지를 더 확고히 다지는 데 있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판세가 바뀌는 즉시 노선을 달리하여 그를 배신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는 뜻이다.

사방이 적이었다. 호시탐탐 틈을 엿보고 있는 가운데, 비밀리에 재산을 해외로 틈틈이 이동시키고 사업을 확장시키는 것만도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다. 설상가상, 앤지를 찾는 일에 진척이 없다는 사실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심신을 더한 나락으로 끌어당겼다.

이번에야말로 실마리가 잡힐지도 몰라. 빈터가르에 가면…….

변장이든, 신분 위장이든, 국경 밖에 숨어 살고 있다면 필시 빈터가르일 것이다. 트리에스테와 빈터가르는 언어와 문화, 사람들의 외모가 가장 흡사했다. 게다가 무역이 활발하고 외국인력과 관광객의 유입도 많아 숨어 살기 안성맞춤인 환경이다.

“나가 봐. 한 시간 후 일정대로 남부 광산 쪽을 시찰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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