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 (61/106)
  • #61

    냉혹한 지적에 레티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그녀가 신분을 숨긴 채 살롱에서 남자들과 밀회를 나누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말에 틀린 건 없었다. 결혼 전 남편은 그 네 가지를 약속했고 한 가지는 철저히 엄금했다.

    -나와의 관계에서 아기를 바라진 마십시오. 애인의 아기를 가지는 건 상관없지만 태어나는 즉시 아기는 사고사로 위장될 겁니다.

    -네? 그, 그게 무슨…….

    끔찍한 단언에 아연실색했다. 그녀는 블랙 매스와 피의 인과에 대해 무지했다. 누구나 바라는 공작가의 결혼, 그것도 컬리넌 섬에서부터 깊이 동경했던 도련님과 혼인하게 될 거란 사실을 삼촌에게서 듣고 뛸 듯이 기뻐했었다. 어릴 적 말로만 들었던 백부, 사무엘 데르반 남작이 섬의 부모님 대신 보호자 자격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혼인을 관장해 주었다.

    -하지만 다들 결혼 전부터 회임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어요. 빨리 아기를 가지라고…….

    -말했듯이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죽어도 상관없다면 누구의 아이든 가져도 됩니다. 난 그 애가 내 아이라고 기꺼이 인정할 테니까. 싫다면 지금이라도 혼인을 취소하시지요.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 이혼을 신청하면 받아 주겠습니다.

    레티샤는 경악에 벌벌 떨었다. 삼촌과 카일렉, 양쪽 다 두려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 구두 계약은 끝까지 함구하며 혼인까지 치러 냈다. 온 나라의 여자가 꿈꾸는 공작 부인의 지위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첫날밤 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챔버 메이드가 사슴의 피를 묻힌 침대 시트만 거둬 간 게 다였다. 두 사람이 개별 침실을 쓰고 있으며 합방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철저히 함구되었다.

    약속은 이행되었다. 그녀는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했고 보석과 옷, 별장, 하녀, 원하는 것은 뭐든 가지고 누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기쁨의 환호를 지르며 어쩔 줄 몰랐다. 컬리넌 섬에서도 그럭저럭 풍족하게 살았지만 지금의 생활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물질적으로만 풍요로운 삶이 미치도록 공허해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만날 수가 없었고,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무관심과 방치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결혼 때 독려한 대로 다른 남자들을 만났다.

    트리에스테에는 본래 종전 전이나 후에나 공식적인 축첩 제도가 없었다. 하지만 정략혼이 비일비재한 귀족 혼맥의 특성상, 은밀한 혼외 관계는 흔하디흔했으며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한 서로 모른 척하는 관습은 잔존했다.

    레티샤는 내로라하는 음악가, 화가와 같은 예술가나 배우, 극작가의 후원자로서 애인을 번갈아 바꾸며 밀회를 즐겼다. 언제 헤어져도 뒤탈 없고 안전한 관계들이었다. 하지만 어떤 남자를 만나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지금, 새삼 재확인했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남편의 관심과 애정이었다. 다른 어떤 남자도 카일렉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처럼 아름답고 완벽한 피조물은 공작저 밖에서 본 적이 없다.

    “카일렉. 다들 제가 불임이라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삼촌도, 왕실 사람들도……. 얼마 전 테 데움에 있는 루이스 던스트는 안부 편지랍시고 아직도 임신 징조가 없는지 빙빙 돌려 물어봤다고요. 제가 언제까지 석녀 취급을 받아야 하죠? 네? 당신은 아기가 태어나는 즉시 죽을 거라 하고, 다른 이들은 왜 아기를 갖지 못하냐고 닦달하고…….”

    레티샤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의 아기를 가질 기회는 처음부터 없었고, 만에 하나 다른 남자의 아기를 낳는다 해도 죽을 거라니.

    그녀의 회임을 압박하는 이들에게 그 미친 소리를 죄다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카일렉이 곧바로 이혼을 선언할 터였다. 그가 직접 그러겠다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럴 거란 예감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똑같은 걸 물을 수밖에 없겠군요. 내가 뭘 더 해 줘야 합니까.”

    제발 저 지긋지긋한 존대부터 어떻게 했으면. 책이라도 읽듯 억양 없이,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음색으로 말하는 것부터 집어치워 주길 간절히 바랐다. 카일렉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감정 자체를 내비친 적이 없었다.

    “아직도…… 그 애를 잊지 못하신 건가요?”

    레티샤가 기어이 선을 넘고 말았다. 차라리 분노라도 해 주길 바라는 내면의 발로였을지도 몰랐다.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3년이에요. 3년. 그렇게 애타게 찾는데도 흔적조차 없다는 건 결국 한 가지 결론밖에 나오지 않잖아요!”

    레티샤는 기어이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내뱉는 순간 입술이 두려움에 파들거렸다. 공작이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뼛속까지 공포가 차올랐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섭도록 고요한 정적이 숨통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카일렉은 대꾸하지 않았다. 고개 들어 그녀를 보지도 않았다. 테이블 구석의 종을 들어 살짝 흔든 게 다였다. 맑은 울림이 퍼져 나가자 홀에 있던 집사가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부인을 홀까지 잘 모시고 가. 공기가 나쁘니 여긴 환기시키고.”

    “비켜. 안내는 필요 없어.”

    레티샤는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 채 제 발로 걸어 나갔다. 볼썽사납게 방에서 쫓겨나는 모양새가 될 순 없었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한 줄기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갑갑했다.

    제발 하루빨리 시신이나 무덤이 발견됐으면. 앤지가 죽었다는 걸 제 눈으로 봐야 포기를 할 것이다. 그러면 그도 결국 마음을 돌리고 이 결혼도 진짜가 되겠지.

    그러니까 부탁이야, 앤지. 제발 죽은 채 나타나 줘. 이 세상에 너란 존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증거를 드러내 달라고!

    * * *

    테 데움을 굽어보는 하늘이 보랏빛을 띠기 시작했다. 미카엘은 동이 트기도 전에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는 방을 나서기 전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아내는 얇은 네글리제만 걸친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뭍까지 그를 태울 배가 입구 앞에 정박해 있었다. 루이스 던스트가 나무 옆에 그림자처럼 서 있다가 앞으로 나섰다. 수도 헤데스타드로 향하는 그를 배웅하고자 기다렸던 모양이다.

    “던스트 부인. 3주 후에 뵙겠습니다.”

    “조심하거라. 되도록 공작님의 눈에는 띄지 말고.”

    “호위대와 달리 그림자는 본래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아야죠. 지켜야 할 대상의 시야 역시……. 그게 그림자 경호단의 역할이니까요.”

    “공작님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하란 뜻이다. 네가 아무리 뛰어나도 카일렉 님의 적수는 못 돼. 문무 모두에 타고난 데다 이터니티 중독도 자력으로 이겨 낸 분이야.”

    “염려 마십시오. 제 본분을 다할 뿐 선을 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배에 올랐다. 테 데움 호수를 오가는 뱃사공 하인리히는 그에게 호의적인 미소를 보였다. 전쟁의 부상으로 흉터가 남은 얼굴 위는 두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걸쭉한 목소리가 고적한 새벽 호수의 정적을 깨뜨렸다.

    “이번엔 오래 다녀올 모양이구만. 먼저 헤데스타드에 갔다가 빈터가르행 사절단으로 가는 겐가?”

    “네. 공작님의 호위대에 합류하게 됩니다.”

    “하긴 폐하의 외유에 공작님도 동행을 하셔야지. 우리끼리니 말이네만 블랙웰 가문이 이 나라를 떠받치는 실세가 아닌가. 빈터가르에서도 사실 공작님과의 교류를 더 학수고대하고 있을 게야. 명목은 빈터가르 건국 기념일을 맞아 시타델 왕실의 초대를 받은 거라지만 말이야.”

    미카엘은 대꾸 없이 웃어 보였다. 사공은 수다스러웠지만 기밀 사항은 일절 외부에 유출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물어다 주는 정보 중 유용한 게 있기도 했다.

    “두 나라 간 수교가 얼마 만에 이뤄지는지 모르겠어. 영원히 쇄국 정책을 고수하실 줄 알았더니 폐하도 역시 어쩔 수 없으셨나 보군. 하긴 이웃 나라엔 여기저기 자동차란 게 길거리를 말처럼 누비고 있다며? 바다엔 기선이란 게 떠다녀서 마스트도 필요 없고 이렇게 노를 젓지 않아도 된다니, 참 별세계 얘기 같구만.”

    “그렇다는군요. 저도 국경을 넘어 보는 건 처음이라 실제로 보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폐하가 더 깜짝 놀라, 생각을 달리하셨으면 좋겠군. 이 나라는 개혁과 개방이 필요해. 이대로는 쇠락의 길로만 갈 뿐이야. 잠잠해질 만하면 전국 여기저기서 농민 봉기에 시민 혁명으로 평화로울 날이 없잖나. 카일렉 님이 몇 배로 불려 놓은 국외 사업과 막강한 군대가 아니었으면 왕실은 진작에 망해 버렸을 걸세.”

    “이번 초대가 실질적인 기점이 되기만을 바랍니다. 그보다 아내분과 출가한 따님들은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나요? 새라가 얼마 전 첫 아이를 낳았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축하드려요.”

    “아, 고맙네. 하하. 아주 예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네. 그렇지 않아도 다음 주 세례식을 할 예정이야.”

    왕실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토로하던 사공의 어조가 확 변했다. 화제는 자연스레 전환됐지만 이번에는 미카엘의 사생활이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아이는 신이 내린 축복일세. 얼마나 신기한가. 어제만 해도 없었던 생명이 오늘 새로 태어나 하나의 존재가 된다니 말이야. 그러고 보니 자네와 샬럿도 빨리 아이가 생겨야 할 텐데……. 벌써 2년하고 절반이나 넘었는데 말이야.”

    “좀 늦어지는 경우도 있다 합니다. 의원 말로는 저희 둘 다 이상이 없다고 하니까요.”

    천연덕스럽게 허언이 흘러나왔다. 그는 선천적인 불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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