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 (60/106)
  • #60

    재작년 10월에 노아를 출산하고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됐을 때만 해도 브린의 집에서 나와 독립할 계획이었다. 더 이상 신세를 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가까이에 살되 의식주는 스스로 해결하는 게 도리라고 믿은 까닭이다.

    하지만 뭘 해서 먹고살지 막막했다. 섬에서 열여섯 살까지 학교를 다녔고 많은 책을 읽은 게 다였다. 빈터가르식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고 딱히 특출난 기술도 없었다. 그래서 메이드 자리를 알아봐 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을 때 마르틴과 브린, 두 사람에게서 호된 질책을 듣기도 했었다. 특히 브린은 얼굴이 벌게지도록 펄펄 뛰었다.

    -뭐라고? 나가 사는 것도 안 될 말인데 남의 집 메이드를 하겠다고? 노아는 여기에 두고?

    -응. 아무래도 가정 교사로는 부적격이니까……. 섬에서도 공작저에 인력이 부족할 때는 메이드로 일하기도 했었어. 눈에 띄지 않게 메이드를 많이 쓰는 큰 집이나 외교관저, 이런 곳이면 좋을 텐데. 그런 곳은 들어가기 어려울까?

    -앤지, 도대체…….

    -괜찮아, 브린. 섬에서는 주로 키친 메이드나 런드리 메이드 보조만 했지만 스컬러리나 챔버 쪽도 할 수 있어. 주말마다 와서 노아를 돌보다 보면 나중에 너서리 메이드도 가능하지 않을까?

    -절대 안 돼. 앤지. 앤지가 우리 집 사용인들만 봐서 그게 기준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모든 고용주가 우리 아버지 같지는 않아. 아무리 여성 근로자의 위상이 변해 가는 시대라도 하우스 메이드 쪽 고용 환경은 여전히 열악해.

    -하지만…….

    -잠깐만, 앤지!

    브린과 마르틴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브린이 먼저 말했다.

    -지금 생각났어. 그러고 보니 앤지, 엄청나게 특별한 기술이 있잖아. 노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 옷이랑 양말, 신발 만들었던 거! 섬에서도 기퓌르 레이스처럼 어려운 것도 잘 만들어서 다들 좋아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도 그게 막 떠올랐어. 전에 나와 브린에게도 손수건을 떠 줬는데 전문 의상실 못잖게 훌륭한 솜씨였어. 너도 옷 만들 때가 가장 즐겁다고 했잖아. 정 일해 보고 싶다면 그 재능을 활용해 보면 어떨까?

    -그래, 앤지! 그게 특출난 기술이 아니면 뭐가 기술이겠어? 메이드 일자리는 좀 더 숙련된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앤지는 그쪽 일을 해 보면 어때? 작업은 집에서 하고, 최대한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 직업용 가명을 써서 전문 의상실에 납품하는 거야.

    -아……. 그럴 수 있다면 감사하겠지만 그게 가능할까?

    -얼마든지! 처음엔 내가 단골 의상실에서 일거리를 받아다 줄게,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면, 물론 나는 다들 깜짝 놀랄 거라고 확신하지만, 그다음에는 가만히 있어도 의뢰가 들어오게 될 거야. 그러니까 이 집에서 지금처럼 함께 살자, 앤지!

    결국 두 사람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마담 M’이란 가명으로 도심의 의상실에 작업물을 내보인 결과, 반응은 만족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폭발적이었다.

    앤지의 정교한 솜씨는 레이스 손수건과 양말로 시작해 드레스와 모자, 숄과 니트, 헤어피스와 크라바트 고정핀과 브로치, 꽃장식 등 사치스러운 액세서리에까지 나날이 그 범위를 넓혀 갔다.

    가장 유명한 마담들의 의상실에서는 브린을 통해 스카우트 제의를 해 왔고 정체불명의 마담 M에 대해 문의가 끊이지를 않았다. 물론 브린은 그녀도 중간에서 소개를 받은 입장이라 잘 모른다고 시치미를 뗐다. 그나마 밝힌 것은 가명의 ‘M’이 매리골드(marigold) 꽃에서 따온 머리글자라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일거리가 많아짐에 따라 거대한 재봉틀과 테이블 등, 필요한 장비들이 많아졌다. 브린은 집 안에 작업실을 만들어 주겠노라 적극 나섰고 저택의 소유주인 아미티지 씨도 찬성해 주었다.

    하지만 마르틴은 5분 거리의 제 아파트를 쓰는 게 좋겠다고 주장했고 결국 앤지도 그 의견에 따랐다. 브린의 저택이 아무리 안전하다 해도, 사용인들 틈에서 앤지가 마담 M이라는 의혹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사자인 앤지 역시 폭발적인 인기와 수요에 얼떨떨한 가운데서도 경각심이 고조되어 있었다.

    -아무리 공작이 혼인을 한 상황이라도 최소 몇 년간은 안심할 수 없어. 그들이 아직도 이스케이피를 쫓고 있는지 어떤지 블랙웰가의 내부 사정은 누구도 모르니까, 최대한 몸을 사리고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끔 조심해야 돼.

    다행히 지난 3년간은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못했다. 위조된 신분증이 무색할 만큼, 어떠한 사교적인 활동도 하지 않고 대외적인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터였다.

    앤지는 간단히 차를 마시고 반쯤 완성한 장갑용 레이스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노아가 보고 싶었다.

    노아 실바. 우리 아기.

    뇌리에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은 마르틴의 가명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언젠가는 노아 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언제쯤 올지는 미지수였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블랙웰가의 마각이 세상에 드러나고 온전한 안전과 자유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그때까진 반드시 노아를 지킬 거야. 내 힘으로.

    * * *

    헤데스타드 내 블랙웰 공작가의 본 영지는 레니에 8세가 거주하는 황궁과 인접해 있었다. 토지와 저택의 외관, 별채의 수는 황궁에 버금가는 면적과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압도시키는 웅장함과는 별개로, 내부는 이미 스산한 겨울 같았다.

    “마님, 지금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주인님께서…….”

    “비켜!”

    부채로 뺨을 갈기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메이드들은 더는 그녀를 막아서지 못했다. 레티샤 블랙웰 공작 부인은 태피스트리 홀을 성난 걸음으로 힘주어 걸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지나 성화가 그려진 궁륭 아래를 거쳐 그랜드 챔버에 다다랐을 때는 표정 관리조차 되지 않았다.

    그녀는 챔버 안의 티룸에 들어서서 푸른 휘장을 신경질적으로 확 젖혔다. 휘장 너머에는 그녀의 남편이 찻잔을 들고 막 입가로 가져가려던 참이었다. 방문 중이었던 왕정 행정관이 난데없이 들이닥친 공작 부인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부인.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니……. 죄송합니다. 저야말로 결례를 범했습니다.”

    행정관은 마침 이야기가 끝났다며 둘 모두에게 공손한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손님이 사라지기 무섭게 레티샤는 남편의 맞은편에 앉아 턱을 덜덜 떨었다. 남편의 위압감이 두려웠지만 이대로 물러서기엔 분노가 너무도 컸다.

    이름뿐인 남편은 그녀를 본 척도 않고 찻잔을 마저 기울였다. 시선은 행정관이 두고 간 서류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보나 마나 또 적자가 되어 버린 왕실 재정에 대한 종이 쪼가리일 터였다.

    “어제가 제 생일이었어요. 사교계의 귀족이란 귀족은 죄다 초대해 큰 연회를 열었죠.”

    “알고 있습니다. 내가 직접 그 연회비에 쓰일 수표에 서명해 줬으니까.”

    “랜돌프 백작 부인이 제게 은근히 모욕을 줬어요. 3년 내내 아내의 생축연에 불참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고. 레니에 8세께서도 그 정도로 바쁘시진 않을 거라며…….”

    말끝이 분노와 서러움에 바들바들 떨렸다. 침묵이 지속되자 카일은 시선을 문서에 고정한 채 입술을 떼어 냈다. 눈길만 종이 위에 있을 뿐, 머릿속엔 제롬이 오전에 보고한 사실로 꽉 차 있었다.

    -차주부터 국내의 수색 인력을 모두 해외로 집중시킬 계획입니다. 수백 개의 트리에스테령 섬과 산간 지역까지 인구 조사란 명목으로 나라 전체를 샅샅이 뒤진 게 3년입니다. 이제는 빈터가르와 비첸틴 쪽에 집중하되 혼인 여부와 인적 사항, 외모적 특징 무관하게 모든 여성을 조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혼인 여부. 그 단어가 내내 그의 머릿속에 얼룩처럼 들러붙어 떠나지를 않았다. 어째서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까. 위장이든 진짜든 앤지가 누군가의 아내로 살고 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의 본능이 부정했기 때문에 그 확률은 아예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을 뿐.

    “지금 제 말 듣고 계세요? 제가 어제 생축연에서 어떤 모독을 당했는지 방금 말씀드렸…….”

    “그래서 어쩌란 겁니까.”

    카일의 차디찬 벽안이 마침내 그녀에게 향했다. 레티샤의 몸에 오한이 일었다. 차라리 그 시선에 분노나 혐오, 경멸이 있었다면 차라리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이 악감정일지라도 그에게 어떤 감정 자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적어도 무생물 취급은 아니라는 안심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눈 속에는 서늘한 무감함만이 떠 있었다.

    “정정당당히 백작가에 찾아가 사과를 요구하시지요. 내게 하소연하지 말고.”

    “하소연이 아니에요. 제가 정말로 괴로운 것은 다른 이들의 시선이 아니라…….”

    레티샤의 눈에서 눈물이 톡 떨어졌다. 카일의 시선은 다시 종이 위로 옮겨 갔다. 부인을 향한 일말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저는 단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저는 이 가문의 안주인인데…….”

    “부족한 게 무엇입니까. 블랙웰 공작 부인이라는 타이틀, 돈, 자유, 남자. 혼인 조건으로 그 모두를 다 누리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더 뭘 해 줘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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