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 (59/106)
  • #59

    “나…… 생각났어, 마르틴. 어떻게 그 섬에 가게 되었는지.”

    “생각이 났어?”

    마르틴과 브린이 앤지를 둘러싸고 벤치에 앉았다.

    “만약 그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보호소 사람들이 예정대로 데려다줬을 거야. 그럼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여기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을 텐데. 그 섬에서…… 그런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도……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까지. 나 때문에…….”

    앤지가 목이 멘 소리로 갑자기 떠오른 기억을 두서없이 털어놓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브린이 꼭 잡아 주었다. 마르틴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 앤지. 네가 끝까지 따라가지 않았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야. 한 번 목표로 삼은 이상 포기했을 리 없으니 강제로라도 데려갔을 거라 생각해.”

    “마르틴…….”

    녹색 눈이 빠르게 젖어 갔다. 심장이 에일 듯 아파 왔다. 시리도록 맑은 하늘과 봄의 아지랑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과 꿀벌 소리, 주위를 둘러싼 평온함과 그녀의 내면은 너무도 큰 괴리 속에 있었다.

    “도대체 그들은 무슨 짓을 한 거야! 절대 용서 못 해. 절대로…….”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존 피츠로이 블랙웰은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감히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넘보고 순리에 역행하는 탐욕을 위해, 무고한 아이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고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켰다.

    그 죄의 대가로, 죽지도 못하는 괴물이 되어 공작저의 지하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생된 아이들의 잃어버린 시간이 보상되고 죽은 목숨이 되돌아오는 건 아니다. 공작가는 어떤 식으로도 갚을 수 없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중일지도 몰랐다.

    따뜻한 손이 그녀의 머리며 등을 토닥였다. 앤지는 브린의 품에 안겨 지칠 때까지 울었다. 캐서린 할머니가 낮잠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진정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간신히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불과 반나절 만에 많은 기억이 떠올랐다. 앞으로도 하나하나, 꾸준히 떠오를 것이다. 마르틴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섬에서의 일은 그 기억의 재생과 순환 속에서도 결코 묻히지 않을 터였다.

    카일의 두 얼굴이 동시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차갑고 무감한 얼굴로 총을 들고 있던 카일렉 로던 블랙웰. 그녀에게 한없이 다정하고 달콤했던 카일. 끝없는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며 그녀를 열락에 빠뜨리고 천국으로 이끌었던 카이. 나의 카이.

    차라리 잊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온전히 증오스럽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두 손이 저절로 배 위로 향했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제발 누가 알려 주길 바랐다. 블랙웰이란 이름을 증오하게 된 것처럼, 이 아이의 아버지 역시 진심으로 미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 * *

    컬리넌 섬과 카일의 근황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3주가 지난 후였다. 마르틴은 저녁때 경시청에서 브린의 저택으로 곧장 달려왔다.

    “앤지. 컬리넌 섬에 넉 달 전쯤 큰 화재가 있었다는 소식이야. 공작저 절반이 불에 타고 사상자도 많았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널 찾아낸 직후였던 것 같아.”

    “네? 어떻게 그런 일이……!”

    앤지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미카엘, 자수 모임 친구들, 그리고……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한 남자도 거기 포함되어 있었다.

    “카일렉 블랙웰과 측근들은 무사히 수도로 건너간 모양이야. 트리에스테를 정기적으로 오가는 무역상에게서 들은 얘기로는……”

    마르틴은 잠시 틈을 두었다. 앤지는 그에게 괜찮으니 마저 말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심장이 덜걱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카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려는 마음을 애써 붙잡는 동안, 마르틴이 어렵게 말을 이었다.

    “지난주 공작 작위 승계식이 있었고 어제는…….”

    마르틴이 다시 틈을 두었다. 그 짧은 찰나 앤지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녀의 두 손은 무의식적으로 복부를 향해 갔다.

    “어제는…… 마르틴?”

    브린이 염려스런 눈으로 앤지를 살피며 마르틴을 부드럽게 독촉했다. 그가 마침내 결심한 듯 한숨처럼 대답을 뱉어냈다.

    “어제 카일렉 블랙웰의 결혼식이 있었어.”

    앤지의 심장이 한순간 얼어붙었다. 참 이상하지. 예상했던 일이고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키워 주신 부모님의 원수일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의 결혼이었다. 그래야만 하는데도 심장은 자꾸만 빠르게 뛰었다.

    “레티샤 데르반과…… 약혼은 생략하고 바로 본식을 올렸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앤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마르틴의 말과는 맥이 달랐다.

    “그럼 섬의 레머디……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날 도와줬던 미카엘이란 사람과 자수 모임 친구들은……”

    마르틴이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사망자 명단은 따로 없을 것 같아. 공작가에서 극비리에 처리했을 테니까. 부디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야.”

    “무사했으면 좋겠어, 정말로. 진심으로 그러길 바라.”

    담담하지만 슬픈 목소리였다. 마르틴과 브린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더 이상은 블랙웰가의 결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보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짚고 넘어갈 것들이 있었다.

    “아직은 가발을 쓰고 다니는 게 좋겠어. 위조된 신분증도 꼭 들고 다니고. 브린의 아버지께서 아미티지가의 먼 친척인 것처럼 서류 하나도 만들어 주실 거야. 이제 가명도 하나 만들자.”

    “대외적인 이름은 앰버로 할게. 하지만 앤지라는 이름은…… 버리고 싶지 않아. 날 친딸처럼 키워 주셨던 분들이 지어 준 것일 테니까. 우리끼리 있을 때만은 앤지로 불리고 싶어.”

    “당연하지, 앤지.”

    브린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앤지의 팔목 곳곳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주삿바늘은 이제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당시에는 꿈인 줄 알았으나 도련님의 레머디로 몇 번 채혈이 되었던 흔적이었다.

    “비록 네 의지에 의해서는 아니었지만…… 조작된 어린 시절은 제외하더라도, 그분들의 딸로서 행복하게 살았던 시간들은 꾸밈없는 그대로의 사실이니까.”

    “고마워. 이해해 줘서. 마르틴 오빠와 브린 언니 둘 다. 두 사람이 없었으면 난 어떻게 되었을지…….”

    “나랑 마르틴이야말로 네가 이렇게 무사히 우리 곁에 와 줘서 고맙지. 나는 다리가 이래서 사교 모임도 꺼려 왔고 친구도 없었는데 앤지가 있어 줘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앞으로도 늘 이렇게 함께 있자. 응?”

    앤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엷은 웃음 뒤로 억눌린 슬픔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의 결혼 소식에 한편으론 안도감도 들었다.

    이제는 정말로 카이를 마음에서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본인이 일전에 밝혔던 대로 정치적인 목적의 혼인이든 무엇이든 그는 이제 기혼자였다. 부디 첫 아이를 끔찍한 의식의 희생양으로 삼지 않기만을, 조부의 전철을 밟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따름이었다.

    아가, 괜찮아. 너에겐 내가 있어. 비록 아빠는 없지만……. 내가 아빠 몫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해 줄게. 그리고 삼촌과 숙모, 캐서린 할머니도 계시니까. 넌 절대 외롭지 않을 거란다.

    * * *

    3년이 훌쩍 지났다. 모두가 평화를 만끽하며 하루하루 각자의 삶을 알차게 영위해 가고 있었다.

    두 번에 걸친 대륙전의 자취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급속히 사라져 갔다. 시간의 흐름과 노력의 대가는 누구에게나 공평하여, 더 열심히 미래를 준비할수록 전쟁의 상흔은 더 확실히 증발해 가고 있었다.

    울긋불긋 물든 낙엽이 도심에 만연해 있었다. 가을로 옷을 바꿔 입은 하늘 아래, 무르익은 추수의 공기는 딱딱한 돌바닥에까지 깊숙이 배어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튜닉 원피스에 주홍빛 감색 코트를 받쳐 입은 여자는 새벽 공기에 뺨이 발그레했다. 소녀라기엔 성숙해 보였고 여인이라기엔 너무 앳된 얼굴이었다.

    그녀는 아미티지가의 저택이 있던 골목을 굽이돌아 커다란 공원을 가로질렀다. 마침내 낡은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건물 관리인 여자가 반갑게 아는 척을 해 보였다.

    “앰버. 벌써 일어났어? 하여간 부지런해.”

    “안녕하세요, 바버 부인. 좋은 아침이에요. 이거, 어제 제가 만든 거예요.”

    스물둘의 여자는 중년 아낙을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그녀에게 내미는 봉투 안에는 레몬커드와 무화과 잼을 담은 병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어머나, 또 이런걸! 잘 먹을게. 너무 맛있는 걸 아니 사양도 할 수가 없네. 대신 전에 우리 집 양반이 약속한 그네 말이야, 다음 달 노아 생일 선물로 만들어 줄 테니 기대해!”

    “감사해요. 저 정말로 기대 많이 하고 있어요.”

    앤지는 활짝 웃어 보이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2층의 원룸은 마르틴이 올봄 브린과 결혼하기 전까지 경찰견과 함께 살았던 사택이다. 지금은 마르틴이 렌트 계약을 맺어 앤지의 공방 작업실로 쓰이고 있었다.

    오전부터 늦은 오후, 때로는 저녁때까지 여기서 홀로 작업에 몰두했다. 그날 일과를 마친 후에는 아미티지가의 집에 돌아가 보모에게서 아기를 넘겨받아 노아를 돌보고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매일 똑같지만 근심 걱정 없이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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