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 (58/106)
  • #58

    시타델, 빈터가르 수도의 하늘이 여명으로 붉게 물들어 갔다. 마르틴과 브린, 앤지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여정을 서둘렀다. 기차역까지는 아미티지 가의 운전사가 자동차로 데려다주고 기차에 내려서는 마차를 탈 예정이었다.

    앤지는 브린과 나란히 차 뒷좌석에 앉아 창 너머로 아침 풍경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자동차를 봤을 때는 신기하고 겁도 났지만 몇 번 승차를 해 본 지금은 익숙해져 있었다.

    도심은 분주한 활기에 넘쳐 있었다. 아이들은 등에 가방을 메고 무리 지어 학교로 향했고, 신사와 노동자들은 옷차림은 다를망정 안색은 밝았다.

    여자들도 자주 보였다. 치렁치렁한 드레스와 양산을 든 차림새보다는 간편한 재킷과 심플한 라인의 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이 훨씬 많았다. 브린은 이제 미혼 여성도 공장과 사무실, 신문사 등 사회 곳곳에서 남자와 함께 일을 한다고 말해 주었다.

    빈터가르는 컬리넌 섬과 정말 달랐다. 트리에스테 본토와도 다른 세계이며, 점점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마르틴이 말하기도 했었다. 그나마 트리에스테와 빈터가르의 언어가 같은 켈틱어라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앤지. 많이 긴장돼?”

    “아니. 괜찮아.”

    브린이 손을 잡아 주자 앤지가 옅게 웃었다. 마르틴에게처럼 어느새 브린과도 자매처럼 편히 말을 놓고 있었다. 그녀는 늘 언니처럼 세세하게 신경 써 주었다.

    “로르샤와 레반은 섬과 많이 비슷할지…… 생각하고 있었어.”

    “시타델보다는 더 비슷할 거야. 아직은 자동차나 전기가 상용화되지 않았거든. 하지만 지방 거점 마을들이 빠르게 개발 중이니 시간문제겠지. 아쉽지만, 네 고향 로르샤는 하필 며칠 전부터 대공사로 진입이 어렵다니 오늘은 레반에만 가 보자.”

    운전석 옆에 앉은 마르틴이 틈을 두고 덧붙였다.

    “캐서린 할머니가 널 보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점점 기억이 희미해져 가시니 한눈에 알아보실지는 미지수지만.”

    “집 안에서는 벗어도 되겠지?”

    앤지가 제 머리를 슬쩍 가리켜 보였다. 어쩌다 한 번씩 외출 때 쓰는 갈색빛 가발이었다. 브린은 브루넷 외에도 갈색과 백금발, 딸깃빛을 띤 붉은색 등 여러 가지 비상용도 준비해 주었다. 앤지는 아예 염색하는 쪽을 원했지만 브린이 결사반대했었다.

    -안 돼!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머릿결이 상하게 될 거야. 이렇게 예쁜 금발인데…… 손상되게 할 순 없어.

    “밖에서 집 안이 안 보이게 커튼을 치면 괜찮을 거야. 할머니를 돌봐드리는 린튼 부인도 오늘은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

    앤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바다에서 구조되어 빈터가르에 온 지 석 달이 지났다. 지금에야 간신히 기차를 타고 여기까지 올 심신의 준비가 되었다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먼저 눈물을 보인 것은 작은할머니였다. 캐서린 베케트는 한눈에 앤지를 알아보았다. 앤지가 모자와 가발을 한꺼번에 벗는 순간 주름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너는…….”

    “안녕하세요, 할머니. 처음 뵙…… 오랜만에 뵙게 되어 기뻐요. 그동안 잘……”

    “오, 하나님! 네가 정말 앰버니? 릴리안과 랠프의 딸 앰버…… 어릴 적과 똑같구나!”

    캐서린은 앤지의 손을 덥석 잡고 감격에 겨워했다. 앤지는 얼떨떨한 가운데 노부인의 품에 안겼다. 기억에는 없었지만, 뺨에 입술을 맞추고 눈물을 글썽이는 얼굴을 대하자 가슴 깊은 곳에서 온기가 퍼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앤지를 포옹하다 배를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세상에! 아이를 가졌니? 결혼도 했나 보구나. 남편은 같이 오지 않았니?”

    “네. 그게……”

    “할머니. 그 얘기는 차차 말씀드릴 테니 일단 브린과 다 같이 앉으세요. 제가 차를 내올게요.”

    네 사람은 감격적인 상봉을 한참이나 나눴다. 캐서린은 앤지가 사고로 어릴 적 기억을 모두 잃은 채 지금까지 트리에스테령 외딴 섬에 살았다는 얘기를 듣고, 낡은 가족사진이며 그녀가 어릴 적 가지고 놀았다던 장난감 등 여러 가지 물건들을 꺼내 왔다. 다행히 앤지의 결혼 여부나 남편에 대해서는 잠시 잊어버린 듯했다.

    “당장 기억해 내지 못해도 괜찮단다. 이렇게 무사히 살아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이니. 전쟁이 터지고 다들 뿔뿔이 흩어졌을 때 너희 식구도 걱정했는데…….”

    노부인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으며 말끝을 흐렸다. 앤지의 진짜 부모인 랠프와 릴리안 부부 역시, 마르틴의 가족처럼 전쟁 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마음을 추스른 캐서린의 눈꺼풀이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어느덧 낮잠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저녁까지 함께 먹고 갈 것을 신신당부하며 침실로 들어가 누웠다. 앤지는 노부인이 오수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 나서야 방을 나와 집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뒤뜰로 나와 담벼락 위의 고양이를 본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펌킨…….”

    뇌리에 고양이 한 마리가 가물거렸다. 털 색깔이 펌킨파이 빛깔이라 그렇게 불렀던 스코티시 폴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부가 키우던 고양이였다. 담 위의 고양이는 펌킨과 다른 생김새에 회색빛 털이었지만 꼬리를 세우는 몸짓이 비슷했다.

    “마르틴. 나…… 여기서 고양이와 놀았던 것 같아.”

    “맞아, 앤지! 기억나? 개와 고양이가 많아서 네가 무척 좋아했었어.”

    커다란 세인트 버나드 개들과 강아지도 어렴풋이 스쳐 갔다. 한 번은 어른들이 준 쿠키를 한 녀석이 날름 뺏어가 울었던 순간도 떠올랐다. 소리내어 울자 다른 개가 다가와 달래 주듯 뺨을 핥아 주기도 했었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앤지가 비틀거리자 마르틴이 재빨리 부축해 주었다. 스틱을 짚고 서 있던 브린도 옆으로 다가왔다.

    “앤지, 괜찮아?”

    “응……. 갑자기 여러 가지가 떠올라서……. 잠깐만 앉을게.”

    담 위의 고양이가 야옹, 울더니 이웃집 쪽으로 날렵하게 뛰어올랐다. 앤지는 뒤뜰 포치에 앉아 잠시 호흡을 골랐다. 갑자기 머릿속에 기억의 파도가 밀물처럼 밀어닥치고 있었다.

    “역시…… 실재했던 장소에 오니 본격적으로 떠오르는구나. 나처럼.”

    “마르틴도 이랬어?”

    “응. 처음 몇 달간 빈터가르 홈리스 시설에 있다가 내가 있었을 법한 고아원을 수소문해서 찾아냈어. 고아원까지 가는 길, 건물과 시설을 보는 동안 갑자기 많은 것이 떠올랐었어. 지금의 너처럼.”

    앤지는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여 보였다. 중간에 한 번 끊었던 장미차뿐 아니라 섬에서 자란 식재료로 만들어진 음식, 물,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시점부터 가끔씩 낯선 잔상이 떠올랐다 사라질 때가 있었다. 섬에서도 가끔씩 떠올랐던 그 노래처럼. 그 상태에서, 과거에 실제로 머물렀던 곳으로 오니 잃었던 심상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

    “잠깐만 마을 주위를 돌아보고 싶어. 할머니가 주무시니까 이 근처만.”

    앤지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은 후문을 통해 집 밖으로 나왔다.

    “앤지. 레반 호수에 가 보자. 올 때 봤던 그 호수. 수심이 얕아서 아이들이 모이면 자주 다리 위를 오가며 놀았어. 거기 가면 뭔가 더 기억날지도 몰라.”

    앤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틱을 짚은 브린의 걸음에 맞춰 다들 호수를 향해 유유자적 걸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오후였다. 시골 특유의 목가적인 분위기는 평온 그 자체였다. 한창 일할 시간대의 골목과 호수 주변에는 인적이 거의 없었다.

    앤지는 걸음을 멈추고 아치형의 장식문 아래 벤치 앞에 섰다. 또 다른 잔상이 뇌리를 휙 스쳐 갔다. 어린 소녀들이 벤치 위에 프린세스 인형을 올려놓고 옹기종기 모여 티타임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또래 소년들이 달려와 훼방을 놓거나 장난을 치면, 다들 한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야유하곤 했었다.

    기억 속 얼굴은 모두 흐릿했다. 아무리 애써도 이목구비의 윤곽이 잡히지가 않았다. 하지만 유쾌한 웃음소리, 종소리처럼 발랄한 외침은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어쩌면 기억의 궤적이란 것은 시각보다 청각적인 감각과 더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도.

    그녀는 벤치에 앉아 오래된 교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앰버- 누군가 달려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버지였다. 그 옆에 엄마의 고운 선이 흐리게 보였다. 두 사람의 얼굴도 또렷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의 따스한 손길, 다정하게 속삭이던 톤만 희미하게 반짝일 따름이었다.

    두 눈이 아기처럼 슴벅이다 저절로 감겼다. 아주 아름다운 추억의 언저리를 더듬는 기묘함에 머리가 멍했다. 동시에 맑게 개기 시작한 하늘처럼 투명했다.

    -호수. 레반 호수가 있는 마을이었어요. 레반. 로르샤가 공습으로 폐허가 됐대요. 그래서 다음 달에 자선단체 아저씨들이 우릴 레반으로 데려다주기로 했어요. 거긴 안전하대요……. 거기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도 계실 거예요.

    앤지가 흠칫, 감았던 눈을 떴다. 열 살? 열한 살? 어린 그녀가 한 무리의 군인들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빈터가르 군복을 입은 남자들은 친절했으나 그녀와 보호소의 친구들을 끈질기게 종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달이면 너무 멀잖니. 지금 우리랑 같이 가면 오늘 저녁 당장 도착할 수 있단다. 그러니 함께 가자. 네 친구들도 같이. 우리가 보호해 줄게.

    -네? 오늘 저녁…… 그렇게 빨리요?

    -해로로 가면 금방이란다. 배에 타고 해협만 건너면 육로보다 더 가까워.

    앤지와 소녀들은 결국 아무것도 모르고 군인으로 가장한 무리를 따랐다. 존 피츠로이 블랙웰 공작의 수족들은 늘 하던 대로 매끄럽게 일을 진행시켰다.

    그녀가 수면제를 탄 차를 마시고 배에 태워져 다시 망각제가 주입되고, 마침내 컬리넌 섬의 레머디로서 새로 눈을 떴을 때는…… 그때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앰버 윈은 앤지 리즈델이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리즈델 부부의 사랑스러운 외동딸로 그 섬에서 태어나 쭉 살아왔던 것처럼, 그렇게 기억을 상실하고 조작된 과거의 잔상에 지배되어 아무것도 모르고 9년 남짓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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