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 (57/106)
  • #57

    그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수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이유 외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을 수도로 데려가서 정부로 삼는 데 결국 걸림돌이 될 거라고 여겼거나, 그들이 수도행을 반대하는 의사를 공작저에 전달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앤지는 다시 흐느끼다 눈물을 닦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중요한 일정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백지상태인 진짜 기억의 근원지, 앰버 윈으로 살았던 로르샤와 캐서린 할머니가 있는 레반 마을을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카엘…… 무사히 잘 있을까? 엠마와 스테파니, 마리아. 모두들.

    다른 친구들도 모두 그녀처럼 레머디일 것이다. 이대로 그들을 거기 방치해 둘 순 없었다. 공작가에서 더는 레머디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과 별개로, 그들 역시 섬을 벗어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전쟁고아들만 노렸다고 하지만 일가친척 중 생존자가 있는 아이도 있을 터였다. 마르틴과 그녀처럼.

    마르틴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섬의 동향에 대해 수시로 정보를 수집하고, 섬의 비밀을 세상에 어떻게 알릴 수 있을지 예비 장인인 빌렘 반 아미티지와 꾸준히 논의 중에 있었다.

    하지만 섬이 타국인 트리에스터 제국령이었기에 그들이 뭔가 실행에 옮기기란 쉽지 않았다. 그것은 기상 이변으로 섬 주변의 안개가 조금씩 사라져 가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 * *

    미카엘은 중앙 서재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만에 짧은 명령이 육중한 문 너머로 흘러나왔다.

    “들어와.”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미카엘은 카일이 앉아 있는 책상 앞까지 다가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복형제임에도 일견 주인과 종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분위기였다. 카일 역시 그를 형으로 대할 의도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앉으라는 말도 없이 문서를 옆으로 밀어 두고 미카엘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미카엘은 늘 그랬듯 모두가 좋아하는 서글서글한 눈빛과 선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카일의 냉담한 표정은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경계와 의혹, 회의적인 감정이 상대방에게 본능적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침묵이 영원처럼 흘렀다.

    “도련님.”

    결국 미카엘이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아무리 넉살 좋은 그라도 차기 공작이 뿜어내는 무언의 위압감을 견디긴 어려웠다.

    “이미 알고 있으실 줄 압니다만……. 저는 달리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 테 데움에 계속 있게 해 주시면 제 본분을 다하며 조용히 살겠습니다.”

    “네 짓이겠지?”

    카일은 두 손을 맞잡고 미카엘을 서늘하게 응시했다. 크림색 크라바트 위의 입술이 붉었다. 동시에 푸른빛이 감돌아 어딘가 불길함마저 감돌았다.

    “그날…… 별채 침실 문을 열어 준 놈.”

    차디찬 두 눈이 확실한 심증을 담고 있었다. 미카엘은 그 서슬에 흠칫 놀랐지만 인정했다. 하지만 카일을 향한 두려움과 긴장만 있을 뿐 죄책감이나 후회는 없었다.

    “네. 제가 앤지를 풀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결과적으로 그러지 않았다면…… 앤지가 그날 공작저 밖에 있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 ‘그것’이 지하를 탈출해 별채 옆으로 달아나 사람들을 습격했고 결국 화재를 일으켰습니다. 불길이 삽시간에 번져 헤네랄리페 정원과 별채의 절반이 다 타 버렸고 앤지가 있던 침실의 복도 또한 무너지고 훼손되었으니까요. 만약 불이 번졌을 때 앤지가 방 안에 갇혀 있었다면…….”

    “네가 생명의 은인이라 주장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 네가 그녀를 구한 건 아냐. 게다가 결국은……”

    카일이 말끝을 흐리며 이를 악물었다. 이마에 고통스러운 균열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결국은 그날 앤지의 눈앞에서 그녀의 부모 노릇을 했던 자들을 죽이고 결국 앤지마저 바다에 잃어버렸다. 다행히 뒤늦게 범선의 단서를 찾아 트리에스테 본토와 인접국들을 수색 중이었지만 여전히 행방은 묘연했다.

    “좋아. 결과에 좀 더 무게를 두어 네 죄는 더 거론하지 않겠다. 하지만 너를 여기 둘 수는 없어. 원하는 만큼 독립할 자금을 지원해 줄 테니 어디든 떠나라.”

    “도련님.”

    “그 애는 내 거야. 처음부터 내 것이었고 지금도 내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

    “내 것에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을 품었던 놈을 내 영역에 둘 생각은 없다. 수도의 영지든, 여기든.”

    그 단언이 함축한 의미는 간명했다. 앤지가 생존해 있는 한, 시간이 아무리 걸리더라도 그녀는 결국 그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따라서 열쇠를 훔쳐 탈출까지 시켜 줄 만큼 흑심이 있었던 남자를, 다시 앤지 주변에 얼쩡거리게 할 순 없다는 뜻이었다.

    “제가 앤지를 좋아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고백도 했었지요. 하지만 앤지는 제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고…… 이미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미카엘이 담담히 덧붙였다. 굳이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도련님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진작 알았다면 고백하지도…… 아니, 마음을 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확실히 포기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렇다 해도 널 여기 둘 생각은 없어.”

    “여긴 휴양지 역할의 외곽 별장일 뿐 도련님께서는 곧 수도로 가게 되십니다. 거기서 계승식을 하시고 앞으로도 본 영지에 머무시게 되니……. 제가 여기 있다 해도 저를 보실 일은 거의 없으실 겁니다. 던스트 부인처럼 믿을 만한 충복이 하나 더 생긴 거라 생각하시고 이곳의 관리를 맡겨 주시면…… 최선을 다해서 제 본분을 다하겠습니다.”

    던스트 부인처럼 믿을 만한……? 카일은 내심 조소를 삼켰다. 신뢰하기는커녕 가장 경계하는 인물을 그리 일컫다니 비웃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너를 믿을 만한 근거라도 있나? 그걸 확실히 보여 줄 방법이 있긴 한데.”

    “그게 무엇입니까?”

    “가을이 오기 전 메이드 중 하나와 혼인하는 것이다. 네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면 내 마음도 놓이겠지. 단, 아이를 가져선 안 돼.”

    카일은 차갑게 일갈하듯 말을 이었다.

    “네가 내 아버지의 핏줄이 아니라면 아이를 몇을 낳든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지. 아무리 주종 관계라 해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첫 번째 아이로 블랙 매스와 이터니티를 꾀하는 것은 나로서도 충분하니까.”

    물론 그에게도 영생을 향한 열망은 추호도 없었다. 불멸 따위 믿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의식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현왕 레니에 8세와 헬퍼들의 눈을 가려야 했다. 그가 모든 것을 올바른 자리에 되돌려 놓고 카일룸교의 종말을 실행할 힘이 생기기 전까지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가문에 속하지 않는 자로서 감히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혼과 아이 역시…… 도련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만에 하나 아이가 생기는 즉시 독립할 자금을 받고 조용히 떠나도록.”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일은 잠시 틈을 두고 그의 대답을 곱씹어 보았다. 선선히 응한다고 경계가 허물어지진 않았다. 숨 막히는 침묵 끝에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물러가.”

    “네, 도련님.”

    미카엘은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가 문고리에 손을 대려는 찰나, 카일의 무감한 음성이 다시 등줄기에 꽂혀 왔다.

    “기분이 어떻던가, ‘그것’의 목을 베어 내고 불을 붙였을 때.”

    미카엘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카일은 두 손을 마주 잡고 팔꿈치를 책상에 짚은 채 그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그것’이 누구인지, 너와 어떤 관계에 있는 존재인지 알고 있었을 텐데.”

    “…….”

    “말하기가 어려운가? 언데드가 되어 날뛰는 조부의 목을 제 손으로 끊어 내고 마침내 괴멸시켰을 때…… 손자로서 어떤 기분이었는지 묻는 거야.”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입술만 달싹이던 미카엘이 메마른 대답을 뱉어 냈다. 시선은 카일의 목 아래, 타이핀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때는 경황이 없었습니다. 습격당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숲은 불타고……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어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가…….”

    대답이 없었다. 미카엘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찌를 듯 푸른 동공이 그의 보랏빛 눈동자를 사로잡아 왔다. 카일은 그를 한참 더 응시하다가 낮게 말했다.

    “나가 봐.”

    미카엘은 꾸벅 인사해 보이고 문을 열었다. 육중한 문이 닫히고 거기 기대고 나서야 한숨처럼 커다란 호흡이 튀어나왔다. 방에 있는 내내 반쯤 막혀 있던 숨통이 그제야 확 뚫려 있었다.

    혹시 그 역시…….

    미카엘의 뇌리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도련님 역시 레티샤 데르반과 결혼은 하되 아이는 갖지 않을 생각인 건가. 실은 그가 이터니티에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하지만 루이스 던스트는 아닐 거라 말했다. 처음에는 카일렉 도련님도 크게 반발하였지만 결국은 그도 영생을 원할 것이라고. 수도에 도착해 블랙웰 가문이 지닌 부와 권력, 그 엄청난 힘을 실감하게 된다면 분명 확고히 마음을 굳힐 거라 단언했었다.

    하긴 자력으로 부작용을 이겨 낸 그에게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만약 첫 아이의 피를 희생으로 의식의 마무리를 짓는다면, 그리고 수년간 상태를 지켜보고 노화가 멈췄음을 확인하게 된다면…….

    카일렉이 정말로 첫 메시아가 되는 걸까. 언데드가 되어 버린 ‘그것’과는 달리, 이터니티를 최초로 성공시킨 ‘선택받은 자’로 거듭나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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