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 (56/106)
  • #56

    마르틴은 감격에 겨웠는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내가 얼마나 초조했는지……. 네가 앰버란 걸 알고 나서는 더더욱.

    앤지도 눈물을 흘렸다. 그가 얼마나 절박하게 그녀를 구하고자 했는지 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혈육임을 몰랐을 때부터도 꿈을 통해 늘 그녀를 도와주고 구해 주려고 최선을 다했던 그였다. 마르틴은 이 폭풍우를 뚫고 항해까지 강행한 것만으로도 생명의 은인이자 구원자였다.

    -고마워요, 마르틴. 정말…… 마르틴이 오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쯤…….

    마르틴은 그녀를 빈터가르의 해양관리국에 넘기지 않고 곧바로 브린의 저택으로 데려갔다. 그의 약혼녀 브린 메이어 아미티지는 매우 상냥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앤지를 간호하고 보살피는 가운데 마르틴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카엘이 알려 준 블랙 매스, 이터니티, 레머디와 헬퍼, 오피엄 로즈에 대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이터니티 실험에 실패해 괴물이 된 존 피츠로이 공작이 공작저 지하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 이터니티 약물의 부작용으로 늘 광증에 시달렸던 에드워드 님과 모든 걸 안 시점에서 얄궂게 화재로 죽은 유제니아 님까지, 마르틴이 차근차근 들려준 비화는 경악을 넘어선 충격이었다. 모든 것이 끔찍했지만 그중 단연 참혹한 것은 ‘피의 인과’였다.

    「……영생을 얻을 자, 가장 가까이에 이어진 피의 숭고한 대가를 치르고 그 명맥을 이어 가는 축복을 누릴 것이다.」

    어릴 적부터 장기간 투약된 이터니티의 부작용을 견뎌 내고, 첫 아이를 낳으면 제물로 바쳐 그 피를 이터니티에 섞어 취하고 몸에 동화시키는 것이 영생의 마무리 단계라니.

    인간이라면 범할 수 없는 죄악이었다. 짐승도 제가 영원히 살겠다고 제 새끼를 죽이고 그 피를 마시진 않을 것이다. 마르틴은 그녀의 충격을 이해한다는 듯 참담하게 덧붙였었다.

    -존 피츠로이도 결국 첫째 아들을 제물로 삼았다가 부작용으로 언데드처럼 되어 버렸어. 카일룸교의 약제사들이 그 부작용을 알아내 개선된 이터니티를 에드워드 님에게 시도했지. 그분의 쌍둥이 아들 중 첫째를 제물로 삼았어. 하지만 에드워드 님도 결국 부작용과 광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그런 최후를 맞았던 거야.

    -쌍둥이……? 그럼 카일렉은 쌍둥이 중 둘째였나요?

    -맞아. 그가 몇 초 일찍 배에서 나온 형이었다면…… 희생된 건 그쪽이었겠지.

    -그 역시 십 대 때까지는 여러 증세에 시달리며 고통을 겪었어요. 하지만 지난 이 년에 걸쳐 완치됐다고 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어요. 적어도 내가 그를 봤던 마지막 순간까지는…….

    앤지는 브린이 가져온 차를 몇 모금 들이켜고 나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브린은 약혼자의 육촌 동생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임신 중이었기에 바로 이어질 화제를 예상한 까닭이었다.

    -배 속의 아이…… 그가 알면 안 돼요. 아빠와 엄마가…… 죽기 전에 그러셨어요.

    ‘카일렉 도련님과 그들은 앤지가 아이를 낳자마자 바로 죽일 거야.’

    -내가 자고 있는 줄 알고 아빠가 엄마에게 말하는 걸 엿들었어요. 그때만 해도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앤지. 다른 걱정은 젖혀 두고 일단 회복하는 데만 신경 써요, 네? 그리고 우리 집에서 안전히 지내면 되니까 아무 걱정 말아요. 아빠도 허락하셨어요. 아빠는 앤지가 원할 때 와서 만나시겠다고 하셨으니까 부담도 갖지 말고요.

    -그렇게 해, 앤지. 나랑 같이 있으면 좋겠지만 방 하나짜리 경찰청 사택은 불편할 테니까.

    -그럼 메이드로 일할게요. 출산 전까지만 있게 해 주시면…….

    -네? 오히려 앤지에게 메이드를 붙여 줄 생각인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앤지. 브린 말대로 일단 기력을 되찾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에만 집중하자. 내가 다음 주 중에 위조 신분증을 마련해 올게. 블랙웰가에서 널 찾으려 할 수 있으니까 당분간 나처럼 가명을 쓰고 지내는 거야. 안심할 만한 소식이 트리에스테에서 들려오기 전까지는.

    -지금 그쪽은 상당히 위태로워요. 언제 왕정이 무너지고 국가가 와해될지 모르니까요.

    브린의 덧붙임에 앤지의 전신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종전 후에도 엄격한 전제 군주제를 고집해 가는 제국, 트리에스테에서는 농민 봉기와 시민 폭동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었다.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빈터가르가 산업 혁명과 여성들의 사회 활동, 전기의 상용화 등으로 점점 발전하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되면 블랙웰 공작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트리에스테를 떠나 타국에 망명하지 않을까? 블랙웰가의 사업이 전 대륙에 걸쳐져 있어서 일가 자체는 건재할 거라고 봐. 에드워드 블랙웰 때부터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것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공작가의 사업과 재산은 거의 국외에 거점을 두고 있어. 본국의 수도 헤데스타드의 영지와 사유 재산도 어마어마하지만 그건 전체 자산의 일부일 뿐이니까.

    마르틴의 추론에 브린이 다시 끼어들었다.

    -어떻게 되든 공작가는 결국 두 가지 노선 중 하나를 택할 거예요. 가문의 치부가 될 블랙 매스, 이터니티, 컬리넌 섬에 얽힌 모든 것을 덮고자 꽁꽁 묻어 버리는 거죠. 특히 카일렉 블랙웰이 예정대로 정혼녀와 결혼해 첫 아이를 낳고 의식이 마무리되는 경우엔 더더욱.

    앤지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만약 레티샤와 결혼해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를 피의 제물로 삼을 거란 말인가? 정말로? 어떻게 그런…….

    -반대로 카일도 선대 공작들의 전철을 밟아 몸에 이상이 생기면…… 둘째 자손에게 의식이 대물림되어 다시 처음부터 되풀이되는 건가요?

    -그렇겠지. 헬퍼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자신들에게도 완성된 이터니티, 그 혜택이 나눠지길 바라니까. 그들은 카일렉 대에서의 성공을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겠지. 그들의 입장에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

    앤지는 루이스 던스트, 야스민, 그 외 집사와 시종들, 레머디의 부모 역할을 맡았던 헬퍼들을 떠올려 보았다. 삼십 대에서 육십 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지만 가장 중심이 되었던 인물들은 사십 대 후반에서 오십 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확실히 그들에겐 여유가 없었다. 만약 카일렉이 실패한다면, 그의 후손이 처음부터 의식을 되풀이해 마무리할 때까지 최소 20년을 또 기다려야 하리라.

    -그들에겐 블랙웰 공작이 일종의 숙주인 셈이야. 헌신하고 조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수장들이 진짜 실험체가 아니냔 말이지.

    마르틴의 말에 브린이 다시 불쑥 물었다.

    -그러고 보니 존 피츠로이 블랙웰은 왜 자신의 몸에 바로 실험을 한 걸까요? 위험성을 고려하면 타인의 몸으로 의식을 집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잘은 모르지만, 처음 의식을 열었던 자의 혈통에게만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게 가능하지 않았을까. 교리에도 그렇게 명시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이 아이…….

    앤지가 창백한 낯을 한 채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대화에 열중하던 두 사람도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 아기는 내가 지킬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리즈델 부부의 죽음을 목도하고 벼랑에서 뛰어내려 파도에 휩쓸려서도 기어이 버텼던 아이였다. 카일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어쩌면 지금도 가슴 깊은 곳에는 그 사랑의 잔재가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남아 있을 것이다. 애써 부정하려 해도 그게 진실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그녀의 아이를 해하려 한다면……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터였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직접 칼을 들어 그의 심장에 꽂을 각오도 되어 있었다.

    -돌아가신 엄마, 아빠 외에는 누구도 이 아이에 대해서 몰라요. 절대 건드릴 수 없어요. 누구도.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 불현듯 깨달음이 있었다.

    어쩌면 카일은 그래서 그녀가 아닌 레티샤와 결혼해 후사를 볼 것이라 했던 걸까. 누구든 공작 부인이 되어 그의 첫 아이를 낳으면 피의 제물로 삼아야 할 테니까……?

    레티샤든 누구든 끔찍한 일이다. 마르틴이 들려준 비화에 따르면 카일의 모친, 유제니아 님은 쌍둥이 중 하나가 죽은 것은 순전히 사고라고 믿었었다. 아이가 자는 동안 세심히 살피지 못했노라고 보모가 석고대죄하며 오열하다 다음 날 스스로 목을 맸다고 했었지.

    그러다 에드워드와 시부와의 밀담, 일기장과 비서(祕書)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고 실수로 떨어뜨린 램프 불이 옷에 들러붙어 그만…….

    앤지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얼굴을 두 손에 묻고 괴로움에 잠시 숨을 골랐다. 배가 당기는 느낌에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려 애썼다.

    아가야, 미안. 미안해. 엄마가 또…….

    카일은 영원히 살고 싶다고 했었다. 그 역시 조부가 그랬던 것처럼 불멸과 영생을 바란다는 뜻이었을까? 제 아이의 목숨과 바꿔서라도 반드시 이루고 싶은, 사악한 열망이 그의 내면에도 존재했던 것이었나.

    -앤지.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바랄 거라 생각해. 특히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미카엘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섬에서의 마지막 날, 노스쇼어에서 블랙 매스와 이터니티에 대해 밝힐 때였다.

    -세상을 발아래 두고 뭐든 다 할 수 있는 사람들……. 왕이나 귀족 같은 최상위 계급이나 대륙을 넘나들며 부를 쌓아 올리는 거상들 같은 이들. 부족한 거 하나 없는 그들이 궁극적으로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것이 뭐겠어. 그 권력과 부를 최대한 오래 누릴 수 있게 조금이라도 더 장수하거나, 영원히 사는 게 아닐까. 존 피츠로이 블랙웰도 결국 그 유혹에 넘어간 거겠지.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열망을 위해 제 자식을 제 손으로 죽게 하진 않는다. 오히려 자식을 위해 제 몸을 희생하는 데 거리낌이 없을 터였다. 그게 인간이며 부모라는 존재가 아닌가.

    “이렇게…… 이렇게 벌써 애틋한데.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지금도 이토록 소중한데.”

    앤지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가 아는 카이는 절대 그런 악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서 엄마 아빠를 잔학무도하게 죽였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그게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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