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 (55/106)
  • #55

    “도련님, 그동안 말씀드리지 못했던 사안이 있습니다. 이제 기운을 차리셨으니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가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려 하자 제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카일이 말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제롬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하다 마침내 운을 뗐다.

    “도련님. 고 에드워드 님에게…… 다른 후사가 있었습니다.”

    “뭐……?”

    “도련님보다 일 년 먼저 태어난 사내아이가 있었습니다. 유제니아 님과의 결혼 전 일입니다.”

    카일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에게 앤지에 대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기에 별 감흥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쨌든 알아 둬야 할 사안이었다.

    “실은 블랙웰 하이츠에서부터 있던 사용인입니다. 저희 모두 수도로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죽은 헤스터 랜들이 남긴 일기장이 자료로 남아 있으며 무엇보다 명확한 신체상의 증거가……”

    제롬이 말을 이어 가는 동안 그의 눈에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그다지 밝은 빛은 아니었다.

    * * *

    닷새가 눈 깜짝할 새 흘렀다. 테 데움은 왕실에서의 손님맞이로 새벽부터 분주하게 들썩였다. 수도에서 온 왕실 사절단은 의기양양, 조소를 띤 채 공작저에 도착했다가 멀쩡하게 그들을 맞이하는 카일렉 로던 블랙웰의 모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허, 그동안 온갖 괴담이 떠돌았건만 죄다 헛소문에 유언비어였다니. 조금 야위신 편입니다만, 선대 공작 에드워드 경을 꼭 빼닮으셨군요. 그 척박한 섬에서 정말 훌륭하게 성장하셨습니다.”

    “컬리넌 섬은 화재가 나기 전까지는 매우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외람되지만 척박한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오히려 수도에 오자마자 열병이 생겨 지난 두 달간 꼬박 앓다가 얼마 전부터 차도가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필시 공작가에 신의 보살핌과 축복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제 열흘 뒤 수도로 오셔서 폐하를 알현하시고 계승식만 올리시면 만사형통이겠습니다.”

    보좌관 하나가 손으로 성호까지 그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카일은 비웃음을 삼키고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사절단은 뼛속까지 귀족적이며 우아한 몸짓, 기품 넘치는 카리스마를 경외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실상 돈으로 주고 산 작위라는 사실은 잊은 지 오래였다.

    차기 블랙웰 공작이 후사 없이 병사할 경우, 왕실이 그들에게 진 빚이 자동 탕감될 뿐만 아니라 막대한 재산을 중간에서 빼돌릴 수 있을 거란 계산도 잊은 지 오래였다. 왕실의 사용인도 결국 아랫사람일 따름이었다. 누가 됐든 가장 강한 쪽에 붙어서 제 실속만 챙기면 그뿐이었다.

    지금 보좌관 무리의 음험한 눈에는 무능하고 귀 얇은 레니에 8세보다 차기 블랙웰가의 주인이 훨씬 매력적인 주군으로 보였다.

    * * *

    보랏빛 눈동자가 열 지어 꽂힌 양장본 위를 살폈다. 그때 도서실 문이 열리며 중년 여인이 들어섰다. 루이스 던스트였다. 미카엘은 먼지를 닦던 손길을 거두고 사다리에서 내려와 그녀에게 다가섰다.

    “던스트 부인.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정중하게 두 손을 모으고 선 자세는 컬리넌 섬에서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엷게 미소 띤 입가, 반짝이는 낯빛도 그때와 같았다. 섬이 불타던 날, 도끼를 들고 섬뜩하게 웃음 짓던 청년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카엘. 도련님께서 10분 후 서재로 올 것을 지시하셨다. 어제는 왕실 사절단을 상대하시느라 오늘에야 여유가 생기셨어.”

    루이스도 섬에서와 똑같이 그를 대했다. 존칭을 쓰거나 예의를 차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에드워드 님의 핏줄이라 해도 그는 트리에스테 제국의 사생아였다.

    “그렇군요. 지금 가 보겠습니다.”

    “잠깐만, 미카엘. 그 전에 나와 먼저 얘기를 하자꾸나.”

    던스트 부인은 책이 한구석에 쌓여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미카엘도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그녀는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물었다.

    “도련님에게 뭐라고 말씀드릴 생각이니?”

    “네? 뭔가 말씀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그저 인사를 드리려는 것 외에는 딱히…….”

    “앞으로의 거취가 달라질 수 있어. 알고 있겠지만 서자는 관례상 한곳에 살지 않아. 도련님이 내일 당장 너를 수도나 지방의 다른 영지로 차출하셔도 너는 그에 따라야 한다. 거절할 시에는 완전히 블랙웰 가문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야 하고. 도련님이 충분한 독립 자금을 주실 테니 자유롭게 사는 편이 너에겐 더 나을 수도 있어.”

    “저는…… 여기 있고 싶습니다. 지금까지처럼 제 본분을 다하고 도련님을 섬기는 일꾼으로 충실히 살고 싶어요. 달리 갈 곳도 없으니까요.”

    “나도 실은 네가 계속 여기 머물기를 바란단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루이스의 뇌리에 제롬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도련님이 그렇게 해 주실지는 미지수야. 그분이 결정권을 쥐고 계시니까.”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10분이 지나 있었다. 메이드가 문 앞에 서서 미카엘의 서재행을 종용하고 돌아섰다. 그는 의자에서 덤덤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던스트 부인에게 엷게 웃어 보였다. 모두가 좋아하는 상냥하고 온화한 미소였다.

    “만약 도련님께서 떠나길 원하신다면 저로서도 어쩔 수 없겠지요.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미카엘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이곤 방을 나섰다. 헝클어진 앞머리를 가지런히 다듬던 손이 목덜미 뒤를 쓸어내렸다. 조그만 푸른 장미가 문신처럼 언뜻 드러났다 사라졌다.

    태어날 때부터 점처럼 박혀 있던 문양이었다. 생전의 에드워드와 카일렉의 몸에도 똑같은 것이 있었다.

    * * *

    ‘나는 영원히 살고 싶어, 앤지.’

    앤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두 입술이 경련으로 파르르 열렸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막혀서 바람 소리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막 잠에서 깬 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언젠가 그에게 물었지.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련님의 소원은 뭐예요?’

    ‘소원……?’

    ‘네. 건강해지는 것 외에 다른 소망,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요. 몸은 반드시 나으실 테니까요.’

    ‘영원히 사는 거야…….’

    시트를 꼭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앤지는 한참 동안 어둠 속을 보다가 초에 불을 붙였다. 전등이 있었지만 되도록 기름을 아끼려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브린이 신경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앤지는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섰다. 살짝 부풀어 오른 배의 윤곽이 창문 위로 어른거렸다. 주수가 지날수록 임산부 티가 나날이 역력해지고 있었다. 앤지는 본능적으로 배를 두 손으로 감쌌다. 창 너머 보름달이 시타델 부촌을 휘영청 밝혀 주고 있었다.

    앤지는 크게 숨을 내쉬곤 두 손을 꼭 맞잡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브린의 고급스러운 타운하우스는 안전했고 정갈한 방 안은 훈훈했다. 그런데도 손의 떨림이 멎지를 않았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석 달 전 눈앞에서 엄마와 아빠가 총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마르틴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친부모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 충격과 비통함은 조금도 가시지를 않았다.

    로라 리즈델과 패트릭 리즈델, 두 사람은 그녀를 친딸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믿기 어려운 것들 사이에서도 그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모친은 천둥과 번개, 폭우 속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위해 몸살약을 지어 왔다. 어느 양어머니가 그렇게 헌신적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카일이 제 부모를 잔인하게 쏴 죽였다는 사실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늘 똑같은 꿈이었다. 카일이 한 손에 총을 들고 있었다. 눈앞에서 엄마와 아빠가 차례대로 총탄에 쓰러지고 그녀는 벼랑 끝에서 비틀거리다 바다로 몸을 던졌다. 카일이 절규하며 그녀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추락하던 몸이 철썩이는 파도에 휘감기며 뼛속 깊이 추위가 몰려왔다. 앤지는 눈을 감고 몸에서 힘을 빼 버렸다. 그때만 해도 몸이 수면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아 심연까지 다다를 줄 알았다. 바닥에 닿기 전 숨이 끊어지게 해 달라고 빌었다. 동시에 용서를 빌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어쩌면 배 속에 있을지 모를 아기에게도.

    수없이 번민하고 생각했다. 카일이 그들을 죽여야 했던 어떤 오해나 이유가 있지는 않았을지. 하지만 아무리 쥐어짜고 고민해도 결론은 늘 같았다. 어떤 것도 그 살인을 정당화할 순 없었다.

    게다가…… 배 속의 아이에 대해 알고 있었더라면.

    몸서리가 쳐졌다. 앤지는 몸에 이불을 두르고 가늘게 떨었다. 그렇게 의식을 잃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빈터가르의 범선 선실 위에 있었다. 그리고 꿈속에서만 만났던 마르틴 다 실바, 본명 필립 베케트와 난생처음 현실에서 마주 보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감당하기 벅찬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그녀를 공황 상태에 빠뜨렸다. 죽은 줄 알았건만 살아난 안도감은 거기 없었다. 눈앞에서 부모님이 죽은 참극, 마르틴이 정말로 실존하는 빈터가르 사람이었을뿐만 아니라 그녀의 사촌이었다니.

    -너 역시 빈터가르 사람이야. 앤지. 아니…… 앰버. 네 이름은 앰버 윈. 너희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는 사촌지간이었어. 우린 어릴 때 일 년에 두 번씩 만났는데…… 노래도 가르쳐 줬는데 기억이 전혀 안 나?

    -어릴 적 기억은 전혀 안 나요. 하지만 노래는 가끔 떠올랐던 게 있어요. 비바람이 떠나간 바다 위 일몰……

    -바로 그거야! 우리 어머니의 고향에서 널리 불렸던 노래였어.

    -제가 빈터가르 사람이었다니…….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컬리넌 섬에서 살았던 것밖에는. 거기서 태어나 쭉 거기서 살았던 것만 같았는데 어떻게…….

    -최면제로 기억이 조작되고 그 후로도 오피엄 로즈, 장미차로 그 상태가 계속 유지되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앤지. 나 역시 빈터가르에 와서 환경이 바뀌고 장미차를 마시지 않게 되면서부터 예전 기억이 거의 돌아왔었으니까. 너도 그렇게 될 거야. 이렇게 무사히 널 데려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신의 도움인지, 파도에 휩쓸리던 앤지를 다른 인근 섬의 조난자들과 태우자마자 폭풍이 가라앉았다고 했다. 시타델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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