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 (54/106)
  • #54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목이 메었다. 몸속의 수분이 죄다 눈물로 빠져나가 말라비틀어진 살거죽만 남게 된다 해도 오열을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제롬과 주치의, 집사들까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진정하라고 간청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진정을 할 수 있어. 어떻게 내가……!

    어느 날 메이드가 청소를 하러 들어왔다가 깜짝 놀라 혼비백산 달아나기도 했다. 그는 멍하니 창가에 서 있다가 메이드가 달려 나가는 걸 보고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메이드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옥에서 뒹굴다 온 것 같은 몰골이 유리 너머 보였다. 푹 꺼진 두 눈, 수척하다 못해 움푹 들어간 뺨에 입술은 검게 변해 있었다. 산송장 그 자체였다.

    뭔가가 손가락에서 툭 떨어졌다. 적장자 후계자에게만 대대로 전해지는 블랙웰가의 인장 반지가 카펫 위를 구르고 있었다. 카일은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해골의 것처럼 살점이 거의 붙어 있지 않았다. 반지가 맞지 않아 빠져나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한 달이 더 지나 있었다. 수도 헤데스타드에서 테 데움으로 온 지 한 달, 보름이 흘렀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었고 앤지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으며 주위에서는 이제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종용하고 있었다.

    오래전 앤지가 처음 그를 만나러 왔을 때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그때도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 위에서만 보냈고 방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었다.

    그러나 앤지가 침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변했었다. 그녀의 건강한 온기, 사랑스러운 숨결, 사계절이 봄인 세계에서 온 것처럼 감미롭던 꽃 내음, 앤지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고 삶을 뒤바꾼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죽음을 향해 한 발씩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원인이 되어 있었다. 카일은 침대 아래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두 손 가득 묻은 뺨이 다시 젖어 가고 있었다. 얼굴이 마를 틈이 없었다. 두 달 전까지 늘 보였던 완벽함, 차기 공작으로서 고결하고 오만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앤지, 제발…… 살아 있어 줘. 내가 차라리 죽을 테니까. 내가 죽음으로써 네가 어디선가 무사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이 숨통을 끊어 낼 거야. 내 손으로 이 심장을 뜯어내고 말 테니까.

    * * *

    -도련님의 소원은 뭐예요?

    -소원……?

    -네. 건강해지는 것 외에 다른 소망,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요. 몸은 반드시 나으실 테니까요.

    -영원히 사는 거야…….

    너와 영원히, 언제까지나 함께 하는 것. 이 세상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라도.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디든 좋아. 너만 이대로 내 옆에 있어 준다면…….

    -네? 혹시 불멸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사후 세계?

    -아니야, 아무것도.

    나는 그런 걸 꿈꾸는 게 아니야. 불멸과 영생…… 그런 건 없어. 없어야만 해. 내가 원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이 유한한 생의 모든 순간을 너와 함께 하는 것. 그게 다야. 그리고 이 생이 끝나도 우리의 영혼이 떨어지지 않고 하나로 묶이는 거야. 내가 갈구하는 것은 육신의 것이 아닌 영혼의 불멸이니까. 너와 나의 영혼은 언제까지고 죽지 않고 영원히…….

    카일이 침실에서 뛰쳐나와 비로소 제정신을 차린 것은 제롬이 신문 한 부를 가지고 왔을 때였다. 트리에스테와 국경을 맞댄 인접국, 빈터가르의 신문 지면은 조악한 인쇄술로나마 여러 기사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한 달 전 발행된 종이 뒷면에는 두 달 전에 있었던 폭풍우 조난 사건이 삽화와 활자로 그려져 있었다.

    “도련님! 이걸 보시면 그 무렵, 빈터가르 남해안에서도 폭풍우가 몰아쳤던 기록이 있습니다. 빈터가르 소속인 한 사유 범선이 인근 섬 주민들을 구조했던 사건인데 그 섬은 컬리넌과 멀지 않아요. 게다가 바다에 표류해 있던 선원과 탑승객 몇 명도 구조했는데 그중에는 신원 미상이었던 여자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카일이 신문을 빼앗듯 낚아채어 기사를 훑어 내렸다. 텅 빈 유리알 같던 눈이 명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흥분감에 가슴이 들썩거렸다. 그가 제롬을 올려다보며 숨을 골랐다. 제롬의 입이 먼저 열렸다.

    “어쩌면 앤지도 이 배에 구조됐을지도 모릅니다. 기사가 인쇄되던 때가 보름 전이니 지금쯤은 신원이 밝혀졌을지도…….”

    “조사해 봐, 이 선박과 선주, 당시 타고 있던 사람들, 빈터가르의 경찰까지 죄다. 행정상 기록이 부족할 경우 몽타주를 만들어서 수배령을 내려. 신고 상금은 그쪽 통화로 백만 빈터가르 레반트(VRB)를 내걸어. 위치까지 안내하면 백만 더 붙이고.”

    제롬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이백만 레반트는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빈터가르에서 평생 풍족하게 놀고먹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물론 그 정도는 블랙웰가의 금고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다. 드넓은 영지 중 소규모 전답을 처분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왕실이었다.

    “도련님. 만에 하나 수도 황궁에까지 알려지게 되면 골치 아파질 수 있습니다. 최근 왕실에서 블랙웰 가문이 국가 채무를 대신 갚아 주길 은근히 종용하고 있으니까요. 이곳 테 데움은 감시꾼이 발붙일 틈 없이 철저히 관리되고 있지만, 수도로 올라가는 즉시 왕실 끄나풀이 여기저기 따라붙을 겁니다.”

    “영지는 그대로 두고 대륙의 사업체 중 기호품 하나를 매각해. 커피나 차, 담배, 향신료……. 뭐가 됐든 유통 독점권을 외국 기업 어디든 원하는 곳에 넘겨줘.”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럼 저는 조사와 수색, 모든 걸 처리할 테니 도련님은 부디 기운을 차려 주십시오. 당장 닷새 후 수도 사절단의 병문안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때 이런 모습을 보이셔서 틈을 보이시면…… 분명 왕실에서 뭔가 꾸밀 수 있습니다.”

    “알고 있어. 병문안은 핑계일 뿐 염탐하러 오는 거겠지. 내가 죽어 간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할 테니.”

    카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동안 산송장 같던 얼굴에 처음으로 생기가 떠올라 있었다. 앤지가 정말로 살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들끓었다. 희박한 가능성일지라도 그에게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제롬. 닷새 후 사절단이 도착할 때까지 수도에 소문을 퍼뜨려. 내가 심각한 광증에 시달리다 못해 회복 불가능한 착란 상태에 있다고.”

    제롬은 그의 의도를 곧바로 간파했다. 쇠락해 가는 트리에스테 왕가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서였다. 카일은 겉으로만 공작가를 전적으로 믿고 의존하는 척, 호시탐탐 블랙웰의 막대한 부를 노리는 왕실을 조롱하려는 심산이었다.

    “네, 도련님. 최대한 강도를 높여서 퍼지게 하겠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웨스트윙 챔버로 옮기겠다. 의원의 입을 단속시키고 지금도 산송장 상태인 것처럼 함구해.”

    제롬은 기꺼이 그러겠다 답했다. 도련님은 루이스 던스트와 그녀 쪽 사람들을 여전히 믿지 않았다. 그는 괴물로 변해 비참한 말로를 맞은 존 피츠로이 선대 공작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한 가지 더 할 일이 있어, 제롬. 빈터가르 중앙은행에 계좌를 하나 개설해. 앤지를 무사히 찾으면 그 계좌에도 만오천 빈터가르 레반트를 넣어 놓겠다. 유통권 하나를 처리하면 그 정도가 남겠지. 알겠지만 트리에스테의 통화인 디네센은 점점 더 가치가 떨어질 테니 빈터가르에 가지고 있는 편이 나을 거야.”

    “도련님? 저는 그런 걸 원한 적이…….”

    “지금까지 내 오른팔이 되어 준 것, 앞으로도 되어 줄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야.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훨씬 더 많은 금액이 그 계좌로 송금되게끔 유언장도 고쳐 놓을 예정이다. 그러니…….”

    카일이 신문으로 시선을 되돌리며 덧붙였다.

    “앤지를 찾는 데 전력을 다해 줘. 돈이 얼마가 들든, 어떤 방법과 수단을 쓰든 상관없어.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알겠습니다, 도련님. 수색에 온 힘을 다 쏟겠습니다.”

    “닷새 후 왕실 사절단을 만나고, 보름 후 수도로 올라가겠다. 영지의 본저에서 작위 계승식을 치르고…….”

    카일이 잠시 틈을 두었다. 레티샤 데르반과의 약혼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계승식에는 블랙웰 가문의 방계, 정확히는 작위를 돈으로 사기 전 대지주였던 존 피츠로이의 친인척인 데르반 남작가도 참석할 터였다.

    사무엘 데르반의 교활한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는 카일룸교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이자 레티샤의 삼촌이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가엾은 질녀를 레머디로 이용하기 위해 기억을 조작시키고 컬리넌 섬에 보낸 사람이자, 블랙 매스의 이터니티 의식을 본격적으로 촉발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제 친딸은 일부러 왕실의 방계인 크로포드 후작에게 출가시키고 조카는 끝까지 의식의 희생양으로 삼고자 하다니. 카일은 비소를 흘렸다. 레티샤에겐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전에 앤지에게 했던 짓거리를 생각하면 동정심조차 들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레티샤는 그에게 감사해야 할 터였다. 그녀의 복수를 대신해 줄 이는 자신일 테니까. 데르반 혈족은 그의 손에 통째로 멸문될 예정이었다.

    그것이 카일이 생각하는 진정한 ‘피의 인과’였다. 이터니티 의식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자들은 뼛속까지 검게 태워 버릴 작정이었다. 그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려 한 대가이자 신의 엄중한 단죄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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