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 (53/106)
  • #53

    컬리넌 섬은 순식간에 존 피츠로이 블랙웰의 거대한 무덤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생존한 헬퍼들은 폐허가 된 섬을 버려 둔 채 수도로, 그리고 다시 테 데움으로 와 있었다.

    “루이스.”

    제롬의 눈에 예리한 빛이 감돌았다.

    “원칙주의자인 평소의 루이스답지 않군요. 모두가 아는 던스트 부인이라면 철저히 규정에 따라 미카엘의 존재를 알리고 멀리 보냈을 텐데.”

    “돌아가신 에드워드 님을 생각하니 측은하여 그럴 뿐이네. 에드워드 님이 살아 계셨다면 아무리 혼외자라도 그리 매정하게 내치진 않으셨을 거야.”

    “게다가 도련님의 현 상태도 좋지 않고요.”

    제롬의 어조가 더 낮아졌다.

    “설마…… 도련님의 대신으로 생각하시는 건가요?”

    루이스는 정곡을 찔린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곧 초연함을 되찾았다.

    “내가 늘 최악의 경우를 내다보고 대비해야 한다는 입장인 건 알지 않은가. 만에 하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미카엘이 유일한 대안이야. 그 역시 에드워드 님의 혈육이니까.”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도련님은 괜찮아지실 겁니다. 레머디에 대한 진실을 알고 나신 다음에는 앤지의 피에 의존하지 않고도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끔 스스로 완쾌까지 하신 분입니다. 곁에서 지켜본 저로서는 초인적인 힘이라고밖엔 설명할 수 없었어요. 도련님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물론 도련님은 강인한 분이야. 약하지 않지.”

    그래서 나도 에드워드 님보다 훨씬 더 큰 기대를 걸었네. 하지만 결국 여자 때문에 저렇게 폐인처럼 되어 가고 있잖은가.

    “제롬. 자네가 도련님을 진심으로 아끼는 건 알고 있어. 돌아가신 에드워드 님에게 향했던 충성심이 고스란히 카일 님에게 이어진 그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나.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돼.”

    “아뇨. 도련님은 한 달 안에 반드시 괜찮아지실 겁니다. 그분만이 블랙웰이 존재하는 한 유일무이한 가문의 수장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의식은…… 이쯤에서 완전히 종식되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터니티를 종식시키자니.”

    이번만은 루이스의 눈빛도 변했다. 잿더미가 되기 전까지 컬리넌 섬에서 헬퍼들이 끝까지 가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일념이 무엇이겠는가. 그들 모두 영생을 갈구했다. 최소한 남들보다 더 길게, 오래 살기를 원했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본능적인 갈망이다.

    “모른 척하지 마세요, 루이스. 도련님은 에드워드 님보다 더 강하지만 영생이니 불멸이니……. 그런 것에는 에드워드 님보다 더 관심이 없으십니다.”

    “도련님은 이제 겨우 스물을 넘겼어. 이터니티의 중요성을 아시기엔 아직 젊지. 하지만 두고 보게. 세월이 흐를수록 도련님도 결국 우리와 같은 마음이 되실 거야.”

    “강한 것과 잔학무도한 것은 다릅니다. 루이스는 정말로 그렇게 믿나요? 카일 님이 진심으로 당신의 첫 아이를…… 죽일 수 있다고 믿냔 말입니다.”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은 필요해. 아이는 얼마든지 가질 수 있어. 그리고 자네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도련님은 그를 위해 일부러 레티샤 데르반과 결혼하기로 하신 거야. 사랑하지도 않고 일말의 정도 없는 여자가 낳은 아이라면 덜 괴로우실 테니까.”

    루이스는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최선은 이것이었어. 도련님이 최적의 레머디였던 앤지와 결혼하고 결국 그녀에게서 첫 아이를 보는 거야. 딸이든 아들이든……. 첫 아이는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던 셈 치고 출산 직후 죽은 것으로 만들면 그뿐이었어. 선대 공작님이 카일 님의 형인 로이드가 요람에서 질식사한 것으로 꾸민 것처럼 말이지. 그럼 도련님도 첫 아이의 희생으로 이터니티를 보다 확실하게 몸에 동화시키고 두 사람은 아무 일 없이 다시 둘째, 셋째…… 많은 아이를 낳고 순조롭게 잘 살게 되었을 거야.”

    “아뇨.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도련님이 체내의 이터니티를 더 강화시킨다 해도 끝까지 팔십 세, 구십 세, 백 세를 넘기기까지 정정하게 불멸의 길을 갈 것이라고, 감히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신이 그렇게 둘 것 같나요?”

    “어차피 우린 몰라. 어느 쪽이 진짜 신인지, 악마인지. 저 성화를 보게. 다들 천사라고 하니 천사인 줄 알고 악마라 하니 악마로 보는 것뿐이지, 무엇이 진실인지는 누구도 모르는 거야.”

    “진실은 이것입니다, 루이스.”

    제롬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한 눈으로 던스트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세상 어느 종교에도 그런 교리는 없었습니다. 제아무리 대단한 권능을 지녔다는 신도, 제 자식을 죽이고 그 피를 취해 생을 더 복되게 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

    “이건 미친 짓입니다! 지금 주변국을 돌아보세요. 종전 후 세상은 나날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빈터가르에는 곧 최초의 기선이 운항될 것이라고들 해요. 산업 혁명을 기점으로 귀족 체제가 붕괴되고 시민 계급이 대두하고 있어요. 여성들도 활발히 사회 활동을 하고 있고, 아이들은 부모의 신분 지위와 상관없이 모두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대체 뭔가요? 시대를 역행해 전쟁 전보다 더 폐쇄적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나라의 국고도 바닥을 보이고 수도에선 농민 봉기가 심심찮게 일어나는 판에……”

    “이 나라는 이 나라대로 다시 재기할 거야. 자네 귀에는 좋은 말만 들리는지 모르겠지만,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급진적인 변화에는 혼란과 대가도 따르는 법이라네. 빈터가르도 신분제의 질서가 와해된 지금 나름의 혼돈을 겪고 있을 거야.”

    “이것만은 확실히 말해 두죠, 루이스. 내게 중요한 것은 오직 도련님의 안위뿐입니다. 고 에드워드 님이 생전에 당부하신 것도 있지만…… 카일렉 도련님이 잘못된 길을 갈 분이 아니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누구든, 도련님을 해하려 하거나 지금의 위치에서 끌어내리려는 자가 있으면 제가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루이스는 대답 없이 테이블 위 찻잔만 내려다보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를 겨냥한 말이었다. 제롬은 더 말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녀는 그가 나간 후에도 착잡한 얼굴로 두 손을 맞잡고 있다가 설렁줄을 당겼다. 장정 하나가 들어왔다. 서슬 퍼런 지시가 떨어졌다.

    “제롬을 주시해. 사람을 붙이고 들키지 않게 조심해.”

    “알겠습니다, 던스트 부인.”

    “만에 하나, 섬에서 가져온 이터니티를 없애려 하거나 지하 저장고에 접근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흔적 없이 독살하도록.”

    장정은 고개를 끄덕이곤 창문을 통해 자취를 감췄다. 3월의 봄 햇살이 유리에 반사되어 한순간 그녀의 주름진 시선을 가렸다. 한 달 전 목격했던 그 순간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불타는 숲을 배경으로 미카엘이 두 손에 도끼를 들고 보랏빛 눈을 빛내며 웃고 있었다. 그는 신들린 사형 집행자처럼 광기에 가득 차 있었다. 사신에게서 받은 특명을 완수하는 것처럼, 언데드가 되어 버린 조부의 목을 뜯어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루이스는 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존 피츠로이보다 에드워드에게, 결국 에드워드보다는 카일렉에게 더 무게를 두었던 기대감이 갑자기 미카엘에 이르러 증폭되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이터니티를 이어 가기에 더 적합한 사람은…….

    * * *

    앤지는 총구를 제 턱 아래 넣고 목을 젖혔다. 백조의 것처럼 투명한 살결 위로 핏줄이 불길하게 비쳐 보였다.

    탕!

    골이 크게 뒤흔들렸다. 제 뒤통수가 꿰뚫리는 착각에 눈을 크게 떴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쓰러지는 것은 그의 여자였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의 눈알에까지 튀어서 수 초간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피에 젖은 얼굴이, 가늘디 가느다란 몸이 벼랑 아래로 떨어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앤지는 죽는 순간까지도 말갛게 웃고 있었다. 어디선가 기괴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귓속을 찢고 들어와 뇌까지 파열시킬 것 같았다.

    악몽에서 깨어나 한동안 가슴을 부여잡고 발작한 후에는 주치의가 달려와 진정제를 놓았다. 다시 잠이 들면 어김없이 앤지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푸른 반딧불을 배경으로 나란히 마주 선 두 사람이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자신과 앤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바라보는 제 모습은 진짜가 아닌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앤지, 제발 날 좀 봐 줘! 난 여기 있어!

    미친 듯 소리쳤지만 그녀에겐 전혀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앤지는 발끝을 들어 진짜 카일이 아닌 허수아비에게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서로를 포옹한 채 한참을 있던 그들은 몸을 돌려 별채 쪽으로 향했다. 황급히 그들을 따라가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두 발이 바닥에 단단히 들러붙어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앤지! 난 여기 있어!

    그 순간 제 허수아비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얼굴이 아니었다. 분명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거울 너머 보듯 제 얼굴이었는데. 어딘가 아버지를 닮은 얼굴이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며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아버지가 지하에 가두었다던 조부, 언데드가 뇌리에 떠올랐다.

    괴물처럼 뒤틀린 얼굴이 앤지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곤 뭐라고 속삭였다. 앤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상태로 둘은 별채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시 목구멍을 찢을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미칠 것 같았다. 악몽이 번갈아 나타나 그를 들볶고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견딜 수 있었다. 이보다 더한 고통도 죽을힘을 다해 버텨 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앤지가 살아 있기만 하다면.

    앤지, 앤지……. 내가 잘못했어. 네 눈앞에서 그들을 그렇게 죽이는 게 아니었어. 아무리 친부모가 아니었어도 네 가족이었는데. 너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그들을 진짜 가족으로 믿고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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