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5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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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 선대 공작님은 의식을 결심하기 이전에 그 금서를 들여왔고, 틈만 나면 교리를 들여다보곤 했으니까. 헤스터도 혹시나 했던 거겠지.”

    제롬의 뇌리에 작년 봄, 공작의 장례식 날 미카엘을 처음 봤던 때가 떠올랐다. 공작저에 새로 온 일꾼들 틈에 섞여 있는데도 눈에 확 띄었다. 잘생긴 용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목구비가 묘하게 낯이 익었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에드워드 님을 닮았던 까닭이었다. 카일 님과도 비슷한 윤곽이 보였으나, 붙임성 있게 웃는 인상은 도련님과는 완전히 달랐다.

    “에드워드 님이 아니더라도 존 피츠로이 님이 의식을 고집했을 테니. 그분의 이터니티 의식이 실패해 언데드가 되어 버린 후에도, 에드워드 님이 살아 있는 동안엔 안심할 수 없었겠지. 정작 에드워드 님은 그 의식을 절대 거행할 생각이 없으셨지만…….”

    두 사람 다 그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유제니아 님이 넋 놓고 비명을 지르다 실수로 램프를 떨어뜨리고, 카펫의 불이 순식간에 옷에 옮겨붙으며 전신이 화염에 휩싸이던 순간은 지금도 악몽 같았다.

    -당신들은 미쳤어! 사람이 아니야! 에드워드, 당신은 정말 몰랐어요? 아버님이 그 악마의 책에 쓰인 대로 약물을 제조하고 그걸 일 년 전부터 꾸준히 먹인 걸…….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자주 아팠던 거였어요. 그 악마의 책에 ‘피의 대가’라고 쓰여 있었으니까! 약물이 온전히 신체와 동화하기 위해서는 발작과 정신 분열, 흡혈과 식인 충동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무슨……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유제니아. 약을 복용하면 바로 증상이 완화되고 좋아졌는데.

    -처음은 그렇죠. 좋아졌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마약 성분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날이 더 나빠지고 있잖아요! 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아버님이 십 대 아이들을 대륙 여기저기서 꾸준히 데려와 기억을 조작시킨 거였어요. 젊고 건강한 아이들의 피를 양분 공급하듯 당신에게 주기적으로 수혈해 주기 위해서…….내 피도 언젠가 뽑아서 실험해 봤겠지. 내가 당신의 레머디였어. 여기, 내 팔 여기저기 있던 주삿바늘 자국이 그 흔적이었어……. 아아, 끔찍해!

    -여보, 유제니아. 당신이 잘못 안 거야.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로이드! 내 아이…… 쌍둥이 중 로이드가 몇 달 전에 죽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어. 로이드를 일부러 죽인 거야! 그 아이가 몇 초 더 일찍 배 속에서 나왔으니까! 「영생을 얻을 자, 가장 가까이에 이어진 피의 숭고한 대가를 치르고 그 명맥을 이어 가는 축복을 누릴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 이어진 피가 바로 첫 아이를 의미하는 것이었어……. 아아, 아아악!

    두 사람의 아이는 원래 쌍둥이였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누구도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카일렉에겐 본래 몇 초 일찍 태어난 형이 있었다.

    -뭐라고……?

    -당신이 먹은 약물에 로이드의 피가 섞여 있었던 거야! 당신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그래서 아버…… 그 괴물이 결혼 전에 그리 말했던 거였어. 혹시 첫 출산이 잘못되더라도 둘째 아이부터 다시 잘 키우면 된다고…….

    -유제니아, 진정해. 로이드는 질식사로 우연히…….

    -당신의 형, 헨리 데이빗이 몇 달 전 여기 왔다가 갑자기 급체해서 죽었지. 참 이상하지 않아? 로이드와 헨리의 죽음 모두, 당신과 나는 목격한 바가 없어. 공작이…… 그 늙은 괴물이 늘 우리에게 사후 통보를 했어.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유제니아의 뇌리에 번개 같은 깨달음이 일었다. 존 피츠로이의 의도는 비틀린 부성애였을 것이다. 자신은 이미 늦었지만 후손만은 엄청난 권력과 부를 영원히 누리며 살 수 있게 해 주기 위해서.

    분명 처음에는 그랬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역시 욕심이 생겼던 게 틀림없었다. 점점 노화해 가는 제 육신을 보면서 죽음을 피하고 싶었겠지. ‘이터니티’에 대한 탐욕이 결국 부성애를 눌러 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적 장애를 가진 장남 헨리 데이빗을 희생양으로 삼기로 결심하고 그의 피를 약물과 취했겠지. 그 결과 끔찍한 부작용으로 지금 얼굴이 문둥병 환자처럼 허물어져 내린 것이다.

    -천벌을 받은 거야! 당연하지. 신성 모독에, 짐승도 제 새끼에겐 하지 않을 짓을 저지른 대가라고!

    -유제…….

    -카일……. 내 아들 카일렉……. 당신이 지금까지 먹어 왔고 먹고 있는 그 약! 이미 우유에 섞어서 카일에게 먹이고 있을 거야. 당신이 지금까지 겪은 부작용의 원인을 알아내 다시 제조해서…… 이번엔 성공하길 기원하면서 카일렉에게…….

    오열은 이내 처절한 비명으로 변했다. 격앙된 감정에 휩싸여 램프를 미처 보지 못했고, 그것이 등 뒤로 떨어져 드레스 뒷자락에 확 옮겨붙은 건 찰나였다. 손 쓸 틈도 없었다.

    에드워드는 유제니아의 장례를 치르고 때맞춰 언데드로 변해 가는 부친을 지하 맨 밑바닥에 가뒀다. 그리고 자신은 언제 죽어도 상관없으니 이대로 내버려 두고 홀로 남은 카일렉의 건강을 위해서만 집중해 달라고 모든 헬퍼에게 명했다.

    헬퍼들은 그에 이의가 없었다. 어차피 교리에서 칭한 ‘피의 인과’에 의하면 두 번째 아이부터는 희생의 인과를 피해 갈 수 있었다. 단지, 선대의 몸에 나타났던 부작용이 개선된 지금의 약물이 그에게는 잘 맞고, 훗날 카일렉이 첫 아이를 보게 되면 의식대로 아이의 피를 약에 섞기만 하면 족했다.

    그리고 그 약이 비로소 완성체 ‘이터니티’가 되어 약속대로 모든 헬퍼에게도 수혜가 돌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소망의 결실이었다. 그들이 나이 들어 죽기 전에 이터니티는 반드시 완성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모든 헌신과 만행이 허무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누구도 그런 심중을 에드워드 앞에서는 내비치지 않았다.

    -명심해. 내가 발작 중에 아무리 살려 달라 말해도 절대 레머디를 데려와선 안 되네. 무고한 아이들을 희생시키느니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나아.

    에드워드는 피폐해진 가운데서도 단호히 명했다. 그는 자결까지 감행했을 만큼 괴로워 보였다. 하지만 카일렉이 걱정되어 그럴 수도 없었으리라. 지금 스스로를 죽여 카일렉에게까지 미칠 저주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죽은 유제니아의 주장이 사실임이 드러났다. 존 피츠로이가 정신을 놓고 지하에 갇히자마자 카일렉의 보모가 두려움에 떨며 사실을 자백해 왔다.

    -그동안 공작님의 명으로 이터니티를 우유에 섞었습니다. 사, 살려만 주십시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발, 제발 선처를…….

    카일렉이 멀쩡히 잘 자라는 걸 보기 전까지는 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여러 부작용과 광증에 시달리면서도 질긴 목숨을 이어 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결국 자신이 한 말을 뒤집고, 기력이 한계에 다다를 때마다 레머디의 피를 취했다. 비정상적으로 밀려오는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여자를 불렀으며, 피에 굶주린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심야의 숲을 광란 상태로 떠돌아 다녔다.

    가끔 착란 상태에서 지하에 내려갈 때도 있었다. 이제는 다들 ‘그것’이라 칭하는 부친을 손수 죽이기 위해 난동을 부렸다. 총을 난사하고 횃불을 몸에 던져 태워 죽이려 했으나 언데드는 죽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하지만 헬퍼들에겐 희망적으로, 카일렉 역시 세 살 무렵부터 여러 가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기 때부터 투약한 이터니티의 효과가 나타나 발작과 기면증, 원인 불명의 열병을 수시로 앓았고 햇빛도 쬘 수 없었다. 골격과 신체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성장하는 사춘기 시절에는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어 침실에만 은둔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미카엘의 이름도 레머디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롬의 지적에, 루이스는 과거를 더듬던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미성년자는 일단 다 넣어야 하니 헤스터도 어쩔 수 없었겠지. 어차피 유제니아 님이 죽고 에드워드 님이 모든 것을 포기한 시점에서, 남자 레머디는 무사하게 된 셈이기도 하고.”

    “하긴 그렇군요. 교리는 피수혈자와 레머디의 성별이 달라야 한다고 규정해 놓았으니.”

    만약 에드워드나 카일렉이 여자였다면 그들의 레머디는 남자가 되었을 것이다. 교리는 남녀의 성별이 반대임은 기본이고, 두 사람간의 정신적인 교감을 잘 형성시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명시했다.

    그래서 카일렉 도련님을 위해 여러 명의 소녀를 불렀다. 혈액의 상성은 물론, 말동무 겸 책 읽어 주는 상대로 정서적으로 잘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나탈리아 로헨과 루시아 페론 다음으로 앤지 리즈델이 소환되었고, 결국 그녀가 가장 우수한 레머디로 낙찰된 것이다.

    앤지. 그 아이에게 그 정도로 깊이 빠지실 줄은 몰랐는데. 처음부터 그 아이를 레머디로 도련님께 보내는 게 아니었어. 에드워드 님도 유제니아 님의 죽음으로 그리 폐인이 되다 돌아가셨는데 도련님까지 재기하지 못하면…….

    “어쨌든 미카엘과는 조만간 다시 얘기해 보겠네. 알다시피 이모인 헤스터를 화재로 잃었으니 충격이 꽤 클 거야.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잠시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나.”

    미카엘의 이모 헤스터 랜들은 섬의 절반이 잿더미로 변할 때 연기 질식사로 사망했다. 그녀뿐 아니라 섬 주민의 반 이상이 죽었다. 하필 불타 스러진 예배당에 모여 있었던 레머디 아이들은 단 한 명도 생존하지 못했다. 한때는 고귀한 공작 전하로 불렸던 ‘그것’이 모두를 저승길의 길동무로 삼은 셈이었다.

    불길은 폭우 속에서도 더 크게 번져만 갔었다. 마치 신이 섬 자체를 버린 것처럼. 사시사철 아름답고 울창했던 숲은 잿더미로 화했고 드넓은 평원은 황무지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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