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 (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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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상 신분을 쟁취하니 세계는 더더욱 그의 가치관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양상으로 바뀌고 있었다. 출신 배경, 신분, 계급, 이런 것들은 돈 앞에서 큰 의미가 없었다. 권력과 명예, 이따위가 돈보다 우위에 있다는 믿음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존은 그 변화에 오히려 기뻐했다. 실제적인 부의 힘은 그가 트리에스테 제국 안에서 자신만의 또 다른 제국을 일구는 촉진제가 되어 주었다.

    사람들은 늘 욕망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제각기 다른 신분, 배경, 재력, 주어진 환경 안에서 그들은 늘 삶을 지탱해 줄 뭔가를 소비하길 원했다. 그리하여 남녀노소와 계급 막론,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이 소비하는 것 중에서 블랙웰 가문 휘하 공장과 영지, 노동력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는 범인들이 소비하길 원하는 것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자야말로, 공동체가 규정한 모든 것을 철저히 초월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임시 휴전과 불안정한 평화 속에서 사람들의 욕구는 보다 개인적인 향응으로 바뀌었다. 무기와 자원, 산업 기술만큼 집단적이면서 철저히 개별적인 욕구는 시간과 그 다양성이 비례해 갔다.

    마약과 술, 야릇한 도착적 유희, 사냥과 음악 등 각종 오락거리의 보다 고차원적인 형태뿐 아니라 이제 곧 부유한 이들의 전유물이자 편리한 이동 수단이 될 기선과 자동차까지, 인간과 세상은 앞으로도 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가 가장 궁극적으로 원하는 단 한 가지만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터였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 모든 것을 다 가진 존 피츠로이 블랙웰 공작조차 그것만은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카일룸교의 비서(祕書)를 트리에스테 왕실보다 앞서 손에 넣기 전까지는 존 피츠로이 역시 그렇게 믿었다.

    교단에 대대로 전해져 온다는 책에는 블랙 매스와 이터니티, 그리고 그를 위한 방법과 과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말씀, 성경의 대척점에 있었다.

    「가장 완벽하고 풍요로운 자연, 그 땅에서 자란 씨앗이 불멸의 근원이 되리니. 영생을 얻을 자, 가장 가까이에 이어진 피의 숭고한 대가를 치르고 그 명맥을 이어 가는 축복을 누릴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교리는 이교도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제대로 해독만 하는 데 십 년 넘는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그 의식을 실행해 보고자 마음먹은 것은 첫 손주, 로이드와 카일렉이 세상에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존 피츠로이 블랙웰은 꽤 늦게 첫 아이를 보았다. 마흔다섯의 나이에 한참 어린 신부를 맞았으나 허약했던 아내는 가엾게도 출산 후 세상을 떠났다. 몇 달 후, 재혼을 하였으나 후처 역시 출산 직후 죽고 말았다.

    그는 강보에 싸인 두 아기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 년 전 태어나자마자 모친을 잃은 장남, 헨리 데이빗은 좀처럼 울지를 않았다. 반면, 보름 전 모친을 잃은 차남은 보모의 젖을 먹거나 잠을 자지 않을 때는 늘 큰 소리로 울어 댔다.

    “공작님. 작은 도련님의 이름은 어떻게…….”

    “내 할아버지 존함을 따서 에드워드로 하겠다. 에드워드 리암…… 블랙웰.”

    연년생인 아이들은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랐다. 블랙웰 가문의 막대한 권력과 부 덕분에, 그의 아들들은 전쟁의 포화와 혼돈 속에서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다.

    존 피츠로이는 더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가 원했다 해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블랙웰가의 지참금에 눈이 단단히 멀지 않고서야, 흡사 저주처럼 아내를 둘이나 여읜 남자의 세 번째 후처로 제 여식을 밀어 넣을 왕실과 귀족은 대륙 어디에도 없을 터였다.

    그는 후손들이 훌륭하게 성장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삶의 낙으로 여겼다. 그래서 장남인 헨리에게 지적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깊이 절망했다. 그러나 곧 현실을 직시하고 헨리를 호화로운 기숙사 학교로 보냈다. 그 자신이 거금을 들여 세운 특수 시설이었다.

    다행히 에드워드는 그의 기대에 부응해 학업과 체격, 성정, 모든 면에서 지극히 영민한 면모를 드러냈다. 존은 점차 헨리의 존재에 대해서 잊고 에드워드에게만 집중하게 되었다. 영지와 공작저의 가솔들 또한, 미래의 후계자는 의심의 여지 없이 작은 도련님이라 믿고 어릴 적부터 그를 깍듯이 모셨다.

    에드워드가 장성했을 때 두 번째 대륙전이 발발했다. 공작가는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않을, 안전한 피난처를 찾았다. 컬리넌 섬과 멀지 않은 외딴 섬이었다.

    에드워드는 섬에서 지내는 동안 음악 교사의 딸인 유제니아와 사랑에 빠졌다. 존은 둘의 결혼을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왕실이고 귀족이고 죄다 사라지고 세상이 뒤집혀 있을지도 몰랐다.

    유제니아는 첫 아이들을 낳고 건강하게 산후조리까지 마쳤다. 훗날, 카일렉이 제가 태어남과 동시에 모친이 죽었다고 알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유제니아는 카일렉이 첫 생일을 맞기 전까지는 무사히 살아 있었다.

    검과 총, 대포가 연일 빗발치는 바깥과는 달리 모든 것이 순조롭고 평안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날, 존 피츠로이가 갓 태어난 손주들을 보며 회한에 잠겨 있기 전까지만 해도 모두는 그 평화가 지속될 거라 믿었다.

    어느 날 존이 인명의 한계에 한탄하여 이단의 교리에 손을 대고, 그 결과 어떤 끔찍한 참극이 일가를 덮칠 것인지 그때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교리에 명시된 ‘가장 완벽하고 풍요로운 자연’, ‘그 땅에서 자라는 씨앗’ -그에 부합되는 컬리넌 섬과 그 풀을 찾아내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에 맞게, 그 나름대로의 유한한 가치를 다하고 유종의 미를 거뒀을 터였다.

    * * *

    쨍강!

    잔이 깨지는 소리에 이어 처절한 비명이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 보름째 매일같이 반복되는 차기 공작의 절규에 다름 아니었다.

    “앤지…… 앤지를 찾아와! 수색은? 배들이 아직도 섬 주위를 찾고 있는 거지? 샅샅이 찾고 있냔 말이야!”

    장정들이 몰려와 카일의 양쪽 팔을 잡았다. 극도로 야위었는데도 힘이 엄청나 제압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카일은 주치의가 팔에 진정제를 놓을 때까지 쉼 없이 날뛰다 의식을 잃었다. 제롬은 심란한 낯으로 주인의 잠든 얼굴을 살피다 방을 나왔다. 화려하고 웅장한 마스터 베드룸은 병실로 변한 지 오래였다.

    “루이스.”

    루이스 던스트는 복도를 서성이다 제롬의 눈짓에 그를 뒤따랐다. 두 사람은 묵묵히 저택의 라이트 윙으로 향했다. 테 데움(Te Deum), 신성한 찬가라는 의미를 지닌 공작저는 컬리넌 섬 저택의 열 배가 넘는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동서남북을 이루는 각각의 날개 구역과 중앙의 센트럴 챔버를 오가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테 데움은 블랙웰 일가의 요양지로 쓰이는 남부 스카보르 영지, 호수 한가운데 섬처럼 떠 있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트리에스테 본토의 수도, 헤데스타드에 있었다.

    하지만 도련님의 상태 때문에 작위 계승식과 레티샤와의 약혼식 모두 연기하고 요양을 내세워 남부 섬에 내려왔다. 그러기를 보름째, 상황은 여전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 더 악화되기만 했다.

    두 사람은 티룸에 들어서서 마주 앉았다. 테이블 위로 무거운 침묵이 드리워지길 한참, 제롬이 먼저 운을 뗐다. 침잠된 음성이 그의 번민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답답하군요. 차라리 시체라도 찾으면 좋을 텐데……. 그 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깨끗이 포기하실 증거라도 나올 수 있다면.”

    “증거가 있대도 믿지 않으실 거야. 그 파도에 휩쓸려 갔다면 살아 있을 리가 없건만, 평소처럼 냉철하게 판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으셔.”

    “루이스. 앤지가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걸까요? 도련님도 저희가 구조했듯이, 그 애도 풍랑에 휩쓸려 인접국의 어선에 구조되었다든가 말입니다. 트리에스테의 바닷가와 선착장은 철저히 조사했으니 가장 가까운 빈터가르나 비첸틴에…….”

    “이미 그쪽도 조사하고 있지 않은가. 생존 가능성은 없으니 어차피 헛수고에 불과해. 도련님이 어서 마음을 추스르시고 죄다 털어 버리길 바라실 뿐이야. 앞으로 한 달 안엔 반드시 계승식을 거행해야 돼.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어. 약혼 역시……”

    레티샤는 수도의 데르반 영지에 머물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모른 채 도련님의 쾌차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겠지만, 더 미뤄지면 데르반뿐 아니라 왕실에서도 의혹을 제기할 터였다.

    “이제 슬슬 미카엘에 대해서도 밝혀야 하지 않을까요? 도련님께 알리는 건 미루더라도 사용인들은 이제 알고 있어야죠. 그가 왜 별관 서재에서 사서 담당만 하고 있는지 다들 의아해하고 있어요. 관례대로라면, 카일 도련님의 승인 없이는 여길 떠나는 게 옳습니다.”

    제롬이 심란하게 운을 뗐다. 엄밀히는 미카엘 님, 혹은 큰 도련님이라 칭해야 하겠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트리에스테는 법률상 사생아를 인정하지 않았다. 가주가 원할 시 입적을 시키거나 일정 부분 유산을 남겨 주긴 했으나 사생아 스스로 권리를 주장할 순 없었다.

    “저는 지금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에드워드 님의 아들이었다니. 에드워드 님이 유제니아 님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결심하시기 전, 딱 한 번 만취해 에디스와 잠자리를 가지신 건 알고 있었지만……. 에드워드 님은 기억도 못 하고 계셨습니다.”

    “에디스는 에드워드 님을 연모하고 있었어. 그래서 임신한 걸 알고 많이 고민했을 거야. 하지만 그녀 역시 가문의 헬퍼로서 에드워드 님의 첫 번째 아이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알았겠지. 제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그리될 운명인 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나. 남의 자식이야 응당 의식의 일환이니 어쩔 수 없다 여겼겠지만 제 아이라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니까 말일세. 에디스도 가엾어. 약물로 유산도 시키지 않고 낳았건만 정작 출산 때 죽었으니.”

    “그래서 에드워드 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헤스터가 꽁꽁 숨겨 두고 키운 것이었군요. 누구도 미카엘의 존재를 모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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