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 (50/106)
  • #50

    나뭇가지 여기저기 내려앉은 불길이 바람을 타고 다른 나무로, 그 옆의 것으로 끝없이 옮겨붙었다. 화염을 가득 담은 미카엘의 두 눈이 비소로 들떠 있었다. 순수한 즐거움만을 위해 화재를 일으킨 방화범처럼 그는 불이 빠르게 번져 가는 숲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루이스 던스트는 미카엘을 먼발치에서 꼼짝도 않고 바라보았다. 두 눈이 경악과 충격, 그리고 어떤 깨달음에 차 있었다.

    존 피츠로이 블랙웰, 선대 공작의 잿더미 앞에 선 청년은 지금까지 봐 왔던 미카엘 랜들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 * *

    카일은 그가 아슬아슬한 순간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노스쇼어 별장 앞에 다다른 그는 고삐를 힘껏 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거실 창 너머로 로라 리즈델과 앤지가 보였다.

    로라가 약병을 그릇에 기울여 앤지에게 건네는 순간 그는 품에서 리볼버를 꺼냈다. 생각하고 말고 할 틈이 없었다.

    앤지를 망치게 둘 수 없었다. 리즈델 부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이 저지르려는 폭력과 횡포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된 사고와 판단이 불가능했다. 그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멋대로 기억을 지워 그녀를 망가뜨리고 그와의 소중한 기억까지 앗아 가려 하다니.

    친딸이나 다름없이 깊이 정들고 사랑하게 되었다고? 개소리. 진짜 부모라면 그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카일은 분노에 찬 상태에서 총을 들어 올려 방아쇠를 당겼다. 앤지가 다치지 않게끔 최대한 멀리, 리즈델 부부 쪽으로만 총을 난사했지만 명중되지 않았다. 그는 세 사람이 달려간 별장의 후문 쪽으로 말을 몰았다.

    “벼랑 지름길 아래로 가자! 빨리 오렴, 앤지!”

    “아빠, 잠, 잠깐만…….”

    다행히 앤지는 몇 발짝 뒤에 있었다. 서둘러 달아나느라 벗겨진 신발 하나를 집어 드는 그 짧은 순간, 카일은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다시 당겼다.

    총성이 울렸다. 겨울새들이 푸드덕, 나뭇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천둥소리에도 꿈쩍 않던 까마귀 무리조차 비명을 올리며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철컥, 차가운 금속음이 이어 울렸다. 리볼버 권총의 세 번째 총탄이 바로 다음 타깃을 향해 준비되고 있었다. 총성은 한 발 더 울렸다.

    정확히 두 발, 로라와 패트릭은 앤지의 눈앞에서 하나씩 차례대로 쓰러져 갔다. 그녀를 향해 한 팔을 뻗으며 천천히 앞으로 허물어지는 모친의 동공이 앤지의 것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애…… 앤……지…… 앤……”

    “엄마!”

    그녀의 것과 닮은 녹안이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완전히 빛을 잃기 전 두 눈은 그렇게 최후의 찬란한 색을 발하고 스러졌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세찬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 엄마! 아빠!”

    잿빛 수평선 너머 황혼이 몰려오고 있었다. 찢어지는 비명이, 황량한 언덕 한가운데를 마구 할퀴고 흔들어 댔다. 늘 평화롭고 고적하던 해안가에서는 고요한 아비규환이 벌어지고 있었다. 때아닌 폭우와 천둥 때문이 아니었다. 삶과 죽음, 존재와 무존재의 경계가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하늘이 다시 변덕을 부렸다. 빗줄기가 우박처럼 내리꽂히며 벼락이 다시 한번 우르릉거렸다. 앤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턱을 타고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옷깃을 적셨다. 어차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빗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앤지.”

    카일이 말에서 내려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한 쌍의 벽안이 그녀에게 고정되어 한순간도 비껴가지 않았다.

    “멈춰요.”

    그는 열 발자국 정도 남겨 둔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앤지의 명령, 혹은 요청 때문이었다.

    “오지 마.”

    눈물이 한 줄기 그녀의 목 위로 떨어졌다. 눈물방울이 목을 감싼 스카프 천 위에 내려앉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 언젠가 눈앞의 남자가 제 손을 직접 감아 주며 선물해 줬던 것이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

    앤지는 명령을 이었다. 제 귀에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담담하고 낯선 목소리였다. 너무 충격을 받으면 오히려 차갑게 얼어붙어 버릴 수도 있다고 어디선가 읽었는데 과연 그런 모양이다.

    부모님을 죽였어. 내 눈앞에서. 엄마 아빠를. 어째서? 날 수도로 데려가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극한의 공포로 입술이 달싹거렸다. 전신이 떨렸다. 사나운 빗물이 살을 뚫고 뼈를 직접 두들겨 대는 것 같았다.

    눈 하나 깜짝 않고 두 분을 죽였어. 그럼 배 속의 아이 역시도…….

    “진정해, 앤지.”

    천둥이 또 한 번 노호를 질렀다. 빗줄기 아래서도 남자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똑같이 흠뻑 젖었는데도 원래 처음부터 그렇게 젖은 상태였던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는 앤지를 똑바로 응시한 채 한 손에 들고 있던 총을 아래로 내렸다. 뒤이어 허리 뒤로 숨겼다가 다시 돌아온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너만은 해치지 않아- 명확한 무언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앤지의 경계 가득한 얼굴에 안도의 기미는 전무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자꾸만 눈 속으로 들어차는 빗물이 시야를 가렸다. 무서워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이미 차갑게 식어 있을 부모의 시신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세찬 빗물에 씻겨 내려가고 있을 피 웅덩이를 보는 것도 끔찍하도록 무서웠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괴로움에 숨도 쉴 수 없었다.

    “다 설명할게, 앤지. 내 말부터 들어 줘. 날 믿어 줘……!”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눈앞에서 제 부모를 죽인 남자가 말했다. 평소처럼 차분하고 여유 있진 않았다. 다급하고 간절한 감정이 온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확실히 동요하고 있었다. 왜일까. 그녀가 보는 앞에서 부모를 죽일 의도까진 없었기에? 혹은 앤지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어서? 앤지는 눈물로 흐려진 눈을 닦을 새도 없이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아니. 난 당신을 믿지 않아.”

    철썩, 등 뒤로 파도치는 소리가 귓전을 흔들었다.

    “내 부모를 죽인 살인자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지?”

    “앤지!”

    흐느낌 사이 울먹임이 파도 소리에 묻혀 띄엄띄엄 울렸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중에도 앤지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흐린 눈에는 아직도 총에 맞아 쓰러진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이렇게라도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면…… 차라리 이게…… 낫겠어…….”

    하나님. 제가 지금 지독한 악몽 속에 있는 것이라면 부디 어서 깨어나게 해 주세요. 만약 이게 꿈이 아니라면…… 당신께서 정말로 이 땅에 존재하신다면…… 모두 제자리로 돌려놓아 주세요. 모두가 있어야 할 올바른 자리로.

    “앤지!”

    무서운 예감이 엄습해 왔다. 그가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하지만 카일보다 그녀의 동작이 좀 더 빨랐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라 어쩔 틈도 없었다. 가늘게 흔들리던 앤지의 몸이 순식간에 언덕의 고점을 이룬 벼랑 뒤로 넘어갔다. 비바람이 추락을 부추기듯 세차게 휘몰아쳤다.

    “앤지! 앤……! 안 돼!”

    피를 토하듯 자지러지는 비명이 온 섬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카일은 벼랑 아래에 주저앉아 거칠게 파도치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앤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낙뢰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노호하는 천둥 소리가 울부짖는 비명과 운율을 함께 했다.

    앤지! 앤지- 아아악!

    카일은 곧바로 바닷속에 뛰어들었다. 성난 파도가 두 번째로 추락하는 몸뚱어리를 주저 않고 받아 삼켰다. 그는 물 위에 떠서 미친 듯이 앤지를 찾아 헤맸다.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기도가 난생처음 입술 새로 흘러 나왔다.

    신이여, 제발.

    파도는 가련한 그의 외침을 더 들어주지 않았다. 철썩, 커다란 파도가 몰려와 미약한 몸을 크게 후려쳤다.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울부짖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절벽 위, 숲을 기점으로 빠르게 번져 오던 불길이 기어이 별장 아래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독수리 한 마리가 빗속에서도 두 시신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피가 굳기 전에, 혹은 불이 거기까지 번져 오기 전 신선한 생살을 쪼아 먹을지 여부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 * *

    두 번에 걸친 대륙전이 있었다. 첫 번째 전쟁 직후 전 세계에 창궐했던 전염병, 세균병까지 더해 유럽이라 불렸던 지역의 절반은 폐허가 되었다. 그 결과 구대륙의 귀족들은 불모지를 뒤로하고 모험을 감행했다.

    그들이 배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가 태초의 주인들을 몰아내기 바쁠 무렵, 트리에스테의 대지주 존 피츠로이는 거금을 들여 블랙웰 공작 작위를 사들였다.

    이후로 그는 전쟁으로 피폐한 혼란의 시대 속에서도 승승장구의 길만을 걸었다. 구대륙과 신대륙, 수많은 식민지가 된 여러 작은 나라를 오가며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귀족 사회의 최하층인 자작에 불과했던 그는 어마어마하게 부유한 데다 최상위 계급에까지 올라가 있었다. 돈의 힘에 의한 신분 세탁이었으나 감히 그 사실을 거론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늘 두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또 다른 부(富)와 이어진 새로운 연결 고리, 나날이 자가 증강하는 사유 재산을 가장 효과적으로 은닉할 방책. 존의 눈에는 돈으로 연결된 재료가 세상에 널려 있었다. 돈을 벌 방법이 이렇게나 무궁무진한데 왜 사람들의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는 걸까.

    그래서 세상은 두 부류로 나뉘는 거야. 돈을 볼 수 있는 자. 그렇지 못한 자.

    그리고 세상은 크게 격변하고 있었다. 블랙웰 공작은 2차 대륙전의 발발과 그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격동기를 누구보다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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