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 (49/106)
  • #49

    미카엘은 이를 악물고 더 속력을 냈다. 앤지가 지하실에 갈가리 찢겨 널브러졌을 사람들처럼 잔인하게 희생되도록 둘 순 없었다. 등 뒤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지하의 참사를 발견했는지 뒤늦게 장정들이 손에 횃불을 들고 그쪽으로 오고 있었다.

    음산한 회색빛 마른하늘에 천둥이 크게 울었다. 저 멀리, 임시 초소가 우르르 무너지며 일꾼들의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추위를 녹일 겸 불을 피운 양철통이 쓰러지며 불길이 나무에 확 치솟았다. 피가 튀며 도끼가 그의 발치에까지 날아왔다. 난데없이 나타난 ‘그것’의 습격을 피하고자 누군가 던졌지만 빗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미카엘은 미동도 않고 ‘그것’의 살육을 지켜보았다. 공포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생존 본능이 기어이 그의 발을 떼어 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발치에 널브러진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일꾼의 목을 잡아 비트는 ‘그것’의 등 뒤로 다가섰다. 발아래서 사박, 비에 젖은 나뭇가지 밟히는 소리가 났을 때였다.

    “으아아- 사탄아, 물러가라! 이 괴물아!”

    사내는 목이 꺾이기 직전, 한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그것’의 얼굴에 내리꽂았다. 하지만 ‘그것’이 좀 더 빨랐다. 뚜둑, 목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가엾은 남자는 땅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크아아아- ‘그것’이 불붙은 제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크게 흔들어 댔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던스트 부인은 ‘그것’이 불멸이라 했었다. 총으로 쏘면 총알에 심장 한가운데가 뻥 뚫리면서도 이내 부활했고 칼로 사지를 절단해도 금세 붙어 버렸다. 심지어 목을 잘라 내려 해도 몇 분 내로 몸통에 붙는다고 했으니.

    불로 산 채로 태우면 끔찍한 화상만 입을 뿐 목숨은 붙어 있다고도 들었다. 십자가나 은, 성물, 성수도 듣지 않고 심장에 말뚝을 박아 봐도 소용없다 했었다.

    그래서 산 채로 오크통에 넣어 바닷속 깊이 가라앉히려 했을 터였다. 혹시라도 ‘그것’의 괴음이 바깥에 새어 나갈지 모르니 천둥이 치는 날, 풍랑이 거칠어 멀리 쓸려가 확실히 수장 가능한 날씨가 될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미카엘은 머리가 통째로 불길에 휩싸여 고통 속에 허우적대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지옥에서나 들을 법한 가공할 포효를 연신 지르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것’은 영혼과 의식 없이 그저 움직이는 시체일 뿐인지.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과 행복했던 순간은 뇌리에 전혀 남아 있지 않은지. 희미한 한 가닥의 동정심이 스며들려는 찰나 미카엘은 애써 그 연민을 떨쳐 냈다.

    동정할 필요 없어. 자진해서 초래한 비극이니까. 스스로가 인간이길 포기하고 감히 신의 영역을 넘본 결과일 뿐이야.

    그는 양손 가득 도끼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콰광! 천둥이 섬 전체를 뒤흔들 기세로 재차 울려 퍼졌다. 미카엘은 단단히 결심한 듯 이를 악물고 ‘그것’의 가슴에 도끼를 내리찍었다. 괴음이 더 커지며 ‘그것’의 몸통이 바닥에 쓰러졌다. 미카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끼날을 ‘그것’의 목을 향해 들어 올렸다.

    막연한 예감이 있었다. 지금까지 누구도 괴멸시킬 수 없었던 이 실험체, 한때는 모두가 존경과 경외심을 다해 우러러보았던 존재를 확실히 멸할 방법을 알 것만 같았다. 굳이 바다에 수장시킬 필요 없이 단번에 확실히…….

    캬아아악- 불길에 싸인 머리통에서 괴물의 울음이 더 크게 터져 나왔다.

    * * *

    로라 리즈델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별장으로 들어와 딸을 찾았다. 앤지는 숄을 목까지 단단히 두르고 거실 한가운데 앉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아버지 패트릭이 벽난로에 장작을 잔뜩 넣어 불길을 최대치로 키웠는데도 안색이 파리하기 그지없었다.

    “엄마!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내내 걱정했는데…….”

    “저런, 폭우 때문에 걱정했나 보구나. 아랫마을 쪽엔 비가 거의 멎었어. 마른 천둥만 계속 쳐서 깜짝깜짝 놀랄 뿐이지.”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저 위에 절벽 쪽에서 계속 비명 소리 같은 게 들렸어요.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너무 무섭고 섬뜩한…….”

    “마차로 길을 돌아와서 모르겠구나. 바람 소리겠지. 그보다 어서 앉으렴. 앤지, 몸살약을 가져왔으니까 이것부터 마셔.”

    로라는 공작저에서 가져온 약병부터 꺼내 작은 그릇에 담았다. 아버지 패트릭은 심란한 얼굴로 옆에 앉아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기억을 죄다 잃을지도 모르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먼저 기억을 지우고 그 후에 공작저 사람들 몰래 태아를 자연 유산시킬 방도를 궁리해 봐야 하리라.

    “한 번에 쭉 들이켜야 돼. 조금 쓰더라도 참으렴.”

    로라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음용을 독려했다. 앤지는 두 손에 그릇을 받쳐 들고 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피처럼 붉은빛 도는 액체가 어딘가 불길해 보였다. 하지만 저항 없이 그릇을 천천히 입가로 가져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님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될 일을 종용할 리 없었다. 이제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엄마, 아빠, 미카엘밖에 없었다. 세 사람만은 오롯이 그녀의 편임이 확실하니까.

    탕!

    그릇을 입에 대고 기울이려는 순간 총소리가 울렸다. 거실의 창이 순식간에 깨지며 요란한 소음이 났다. 앤지는 그릇을 손에 든 채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리즈델 부부도 경악하며 벌떡 일어났다.

    총이 몇 발 더 울렸다. 유리창이 완전히 박살 나며 바깥바람이 집 안까지 휘몰아쳤다. 말에 탄 누군가가 앙상한 가지 사이로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카이……?

    앤지의 심장이 크게 내려앉았다. 나뭇가지에 윤곽이 가려져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패트릭과 로라가 확 끌어당기는 통에 더는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이 무슨……? 일단 달아나자! 이쪽으로 와!”

    아버지가 그들을 앞장세워 후문을 향해 달렸다. 총소리는 멈췄지만 죽음에의 공포는 더 고조되어 갔다. 말이 히잉, 크게 우는 소리가 그 신호가 된 것처럼 스산한 잿빛 구름이 빠르게 몰려왔다.

    * * *

    같은 시간, 시퍼런 도끼날이 언데드의 목을 단번에 내리찍었다. 몸통에서 목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며 분리된 순간, 미카엘이 바닥에 널브러진 희생자의 손에서 횃불을 낚아채 언데드의 심장에도 붙였다.

    캬아악- 크아아아아-

    언데드의 비명에 하늘이 화답하듯 낙뢰가 울려 퍼졌다. 세상의 종말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수천, 수만 마리의 박쥐 떼가 일제히 날아오르는 소리처럼도 들렸다. 미카엘은 섬이 통째로 가라앉을 것처럼 질러 대는 괴음을 견디며 몸통 위로도 도끼를 들어 올렸다. 사지가 연결되는 지점마다 날을 내리치는 손에 엄청난 힘이 실려 있었다.

    한 번, 두 번, 피가 사정없이 튀기고 육신이 훼손되는 동안 미카엘은 기묘한 희열에 젖어 있었다. 흡사 악마에게 철퇴를 가하는 신의 대리인이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의 도끼질은 매우 능숙했다. 틈틈이 가엾은 산짐승과 작은 동물을 죽여 왔기에 노련할 수밖에 없었다. 몸통이 완전히 조각난 채 불에 활활 타올랐다. 살이 타고 뼈가 녹는 냄새에 미카엘은 재빨리 언데드의 머리로 주의를 돌렸다.

    미카엘은 갈 곳 잃은 머리통에 다시 불을 붙이고 도끼를 무수히 내려찍었다. 한때 눈과 귀, 코와 이마, 턱이었던 부분이 화염 속에서 으스러지고 무너져 갔다. 그때 째질듯한 비명이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미카엘!”

    던스트 부인이 먼발치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명확히 볼 수 있는 거리였다. 부인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사색이 되어 있었다. 미카엘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 깊은 호를 그렸다.

    시선은 루이스 던스트에게 고정한 채, 그는 온 힘을 실어 언데드의 머리통에 일격을 가했다. 쨍, 뭔가 금이 가며 깨지는 소리가 났다. 존 피츠로이 블랙웰 공작, 한때는 그렇게 불렸던 언데드의 얼굴은 이제 불꽃에 휩싸인 가루가 되어 있었다.

    카일룸교 비서(祕書)에 담겨 있던 블랙 매스, 영생과 불멸의 의식은 오래전 쇠퇴했던 연금술과는 달랐다. 완전히 주술적인 맹신만은 아니었다. 그 증거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비록 실패해 언데드, 살아 있는 구십구 세의 시체가 되어 버렸지만.

    미카엘은 등을 똑바로 펴고 곧 잿더미로 화할 화염 덩어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입술만 움직여 고인의 애도를 표했다.

    할아버님. 이제는 지옥에서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 금기에 손을 대고 신의 영역에 도전한 그 모든 죄를 고스란히 안고 말이지요.

    당신의 장남 헨리 데이빗 블랙웰을 제 손으로 희생시키고, 사랑하는 여자와 행복할 수 있었던 차남 에드워드 리암 블랙웰의 삶을 송두리째 산지옥으로 만든 죄. 에드워드의 쌍둥이 중 첫째 로이드를 생후 몇 달 만에 피의 제물로 바치고, 둘째 아들 카일렉마저 태어난 순간부터 이터니티에 중독되어 성장기를 고통 속에 뒹굴게 했던 죄.

    그중 가장 큰 업보는 조부가 실제로는 저지르지 않은 죄였다. 하지만 미카엘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저질러진 죄악이나 다름없었다.

    헤스터 랜들의 언니, 에디스가 아들의 존재를 재빨리 숨기지 않았다면 저 역시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다. 고 에드워드 님의 진짜 첫 아이이자 서자, 어둠의 자식인 그는 지금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지 못했을 터였다. 이렇게 언데드가 되어 버린 친조부의 최후를 직접 관장하고 지켜볼 수도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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