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 (48/106)
  • #48

    “야스민. 어제까지 분명히 앤지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었지?”

    “네, 부인. 식사도 거의 하지 못하고 구토에 시달리는 것 같았습니다.”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두 사람은 카일렉이 닷새 전부터 앤지를 별채 침실에 가둬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주시해 왔다. 도련님이 차기 공작으로서 기본 소임과 역할을 다하기로 결심한 이상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런 관여를 허용할 도련님도 아니었다.

    “역시 그렇군. 앤지가 새벽에 별채를 빠져나갔어. 도련님이 해변에서 돌아오시면 바로 알게 되실 거야. 그 전에 우리 쪽에서 앤지를 데려와야 해. 리즈델 부부가 임신 사실을 숨기고 있으니까 더더욱.”

    “역시 임신이었군요. 어쩐지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을 데리고 노스쇼어로 간 다음 기회를 봐서 그 애를 몰래 데려와. 난 지하에 내려가 봐야겠어. 지금쯤 ‘그것’도 약으로 가사 상태에 빠져 있……”

    그때 우르릉, 낙뢰 소리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날씨가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고 있었다. 섬 위의 하늘이 정말로 미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서둘러. 내가 네 몫까지 ‘그분’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마지막 기도를 드릴 테니까…….”

    ‘그것’은 어느새 ‘그분’으로 바뀌어 있었다. 야스민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다가 그녀의 명령에 재빨리 움직였다.

    저택은 삽시간에 저녁처럼 어둡고 음산해졌다. 쾅! 콰광! 창문이 덜걱거릴 만큼 천둥이 크게 울었다. 빗줄기가 무수한 바늘처럼 사정없이 창 위를 두드리고 땅을 뚫을 기세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신이 흡사 노한 것 같았다.

    루이스는 복도 끝에 다다라 비밀 출입구를 열었다. 그러고는 지하, 그 아래 더 깊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한 손에 램프를 드는 눈빛이 비장했다. 어딘가 슬퍼 보이기도 했다.

    “주인님. 오늘로 주인님의 생명줄이 온전히 끊어질 겁니다. 저로서도 안타깝고 비통하나…… 카일 도련님이 말씀하셨듯 이제는 실패한 실험에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니까요.”

    그러니 이제는 지옥에서 평안히 잠드시길.

    * * *

    폭우와 천둥이 섬을 뒤흔들다 잦아들었다 다시 발작처럼 되풀이되는 가운데, 카일은 임시 선착장으로 만든 도크 하우스에서 선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선박의 미비한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고 예정된 항해를 얼마나 미룰 수 있을지 논의가 끝났을 때는 정오가 넘어 있었다.

    “최대한 정비를 서둘러 아무리 늦어도 일주일 내에는 배를 띄울 수 있게 해 보겠습니다, 도련님.”

    “그렇게 해 주면 고맙겠네. 그럼.”

    카일은 하우스를 나와 마차로 향했다. 제롬은 커다란 우산을 주인의 머리 위로 높이 받쳐 들고 마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우려되는 바를 말했다.

    “도련님. 일주일 후 항해하시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때는 폭풍이 완전히 잠잠해질 테니 더 나은 셈이지요. 하지만 해무가 원상태로 돌아왔을 때 항해를 하시게 되면 레머디들의 의혹을 살 텐데 그 부분은 어떻게…….”

    “더 이상 어설프게 덮는 건 불가능해, 제롬. 언제까지 그들의 머리가 모래 속에 파묻혀 있을 거라 생각하지?”

    카일은 냉소적으로 말을 이었다.

    “레머디들은 바보가 아냐. 전쟁 중 기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중에서도 까다롭게 선별된 아이들이니 더더욱.”

    “그 말씀은…….”

    “더 이상 얕은꾀로 속이려 들어 봤자 소용없다는 거지. 그들은 결국 언제든 항해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시간문제일 뿐.”

    “도련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장미차와 망각제가 있습니다. 루이스 던스트가 앞으로는 그것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눈치입니다.”

    “결국은 각자 자유롭게 떠나도록 풀어 줄 수밖에 없어. 더 이상 레머디는 필요치 않아.”

    “도련님! 카일렉 도련님!”

    제롬이 대답하기도 전에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카일과 제롬 둘 다 부재 시, 그들의 눈과 귀를 대신해 블랙웰 하이츠의 상황을 살피고 던스트 부인을 감시하는 심복이었다.

    “방금 로라 리즈델이 던스트 부인을 만나고 저택을 떠났습니다. 동시에 보관실에 있던 마지막 망각제도 사라졌습니다.”

    “뭐라고?”

    제롬이 도련님을 대신해 반문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앤지 리즈델이 새벽에 별채를 빠져나와 현재는 노스쇼어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로라 리즈델과 던스트 부인 사이의 대화를 유추해 보면 아무래도 망각제를 딸에게 먹이려는 것 같습니다.”

    카일의 냉담하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그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곧장 말에게 다가섰다. 제롬은 도련님이 마차와 연결된 하네스와 샤프트를 분리해 말 위에 안장도 없이 올라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도련님, 위험합니다! 제가 모시겠……”

    그는 들은 척도 않고 그에게 한 손을 뻗었다. 그 의미를 간파한 제롬이 다시 뭔가 말하려 했지만 카일은 이 악물고 명했다.

    “제롬.”

    거역할 수 없었다. 제롬은 주인이 뜻한 물건을 품에서 꺼내 건네주었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체가 손안에 잡혔다. 원하던 것을 얻은 카일은 곧바로 말의 고삐를 당겼다. 남겨진 제롬과 심복도 그를 뒤따르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카일의 질주를 신호하듯 하늘에 번쩍, 섬광이 어렸다. 마른하늘에 치는 천둥은 모두에게 더한 공포를 자아내고 있었다.

    * * *

    “어찌 된 거야? 어째서 마취제가 먹히지 않지? 사슬, 사슬을 더 가져와서 묶어!”

    “사람 살려! 으, 으악! 누가 좀!”

    “저 괴물을 어서 막아! 총도 소용없어! 어서 제압해서 목을…… 크악!”

    “횃불부터 가져와! 횃불을……! 으아악! 아악!”

    지하 속 지하는 아비규환 속에 빠져 있었다. 짐승의 하울링 같은 괴음, 사람들의 비명에 미카엘은 두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다 결국 수챗구멍에서 빠져나와 지하로 이어지는 나선 계단으로 달렸다. 더는 숨어서 엿들을 필요도 없는 긴급 상황이었다.

    야스민과 다른 시종들도 뒤늦게 소식을 들었는지 다른 쪽 경로로 내려가고 있었다. 저마다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견고한 철문이 열리자 무시무시한 포효 소리가 훨씬 더 선명하게 울렸다.

    “모두 조심해! 다들 벽에서 횃불을 떼어 내 방어해!”

    미카엘은 무리 틈에 섞여 안으로 재빨리 문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굵직한 나무토막을 철문 귀퉁이에 쑤셔 넣어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게 한 다음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지독한 악취에 코가 마비될 것 같았다. 야만적인 포효와 총소리, 비명 소리에 귀도 멀어 버릴 것 같았다. 미카엘은 발밑을 내려다보곤 숨을 들이켰다. 축축한 지하실 바닥이 검붉은 웅덩이를 이루며 그의 발치까지 흘러오고 있었다.

    심장이 쿵, 쿵, 거세게 뛰었다. 생존 본능이 그의 뇌리에 세차게 종을 울려 댔다. 미카엘은 공포감에 숨을 헐떡이며 재빨리 돌아서서 철문 너머로 되돌아갔다. 그러고는 계단 중간, 커다란 기둥 뒤에 웅크리고 숨었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크으으…….”

    마물이 이를 갈며 으르렁대는 소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것’이 빠른 속도로 지상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지하에 있던 사람들은 ‘그것’을 제압해 궤멸시키는 데 실패했다. 미카엘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들이 죄다 잔인하게 학살되었음을 직감하자 이젠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크으……. 크아아아!”

    미카엘은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덜덜 떨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기척을 냈다간 그 역시 잔혹하게 찢길 터였다.

    마침내 ‘그것’이 기둥 옆을 빠르게 스치며 계단 위로 뛰어올랐다. 미카엘의 흔들리는 두 동공이 아주 짧은 순간, ‘그것’의 모습을 담았다가 놓쳤다.

    맙소사,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신이시여. 미카엘은 몸에 지니지도 않는 십자가를 눈앞에 그렸다가 질끈 감았다 떴다. ‘그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원래는 흰색이었을 퍼프 소맷단, 남성용 셔츠가 검붉게 젖어 있었다. 바지 모두 너덜너덜 찢긴 채 몇 가닥 남지 않은 백발이 총채처럼 길게 늘어져 흔들려 댔다. 팔다리는 기괴한 모양으로 비틀려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대고 있었다. 뭣보다 찰나 목격한 얼굴은…….

    미카엘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뱉었다. 해골과 다름없이 뼈만 남은 얼굴 절반이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문둥병 환자 같았다. 더 끔찍한 것은 그런 상태에서도 두 눈은 안쪽이 텅 빈 채 형형하게 빛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호흡을 고르며 기둥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지금쯤 어디로 가고 있을까. 여기까지 흘러오는 피비린내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지하로 내려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저택 일 층은 텅 비어 있을 터였다. 던스트 부인이 비상시를 대비해 일꾼들에게 다른 쪽 지하 방공소에 피신해 있도록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로 갔을까. 어느 방향으로?

    지하 계단의 끝에는 후문이 있었다. 문을 열면 별채의 헤네랄리페 정원, 그 너머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 정면으로 보인다.

    “숲. 그쪽이야!”

    미카엘은 황급히 계단으로 뛰어올랐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활짝 열린 후문 너머, ‘그것’이 사지를 흐느적대며 숲을 향해 가고 있었다.

    미카엘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다가 ‘그것’의 뒤를 쫓았다. 숲 초입에 벌목용 도끼와 연장들이 있을 터였다. 폭풍이 완전히 물러가면 마저 작업하고자 일꾼들이 임시 초소를 세워 뒀었다.

    만에 하나, 앤지가 있을 노스쇼어 절벽에 가게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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