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 (47/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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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지의 눈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반짝 떠졌다. 타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그녀는 부스스 일어나 탁자를 더듬어 물을 찾아 마셨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방을 나와 어머니를 찾았다. 비가 사납게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엄마……. 어디 계시지? 아빠는.

    작업이 끝났는지 거실 한가운데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부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때 식재료 보관 창고 쪽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앤지가 보관실로 막 다가갔을 때였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모친의 격앙된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임신이 틀림없어요. 맥을 짚어 본 결과 확실해요. 하지만 절대 비밀로 해야 돼요. 그들이 알면…… 던스트 부인이 알면 앤지를 데려가려 할 건 뻔하고 우리 앤지도 위험해질 수 있어요. 던스트 부인은 우리가 교리의 비밀에 대해 무지한 줄 알지만 사실은 다…….”

    교리? 비밀? 어머니의 뒷말이 흐려지며 웅얼거리는 소리 끝에 끊어졌다. 아버지 패트릭의 말 역시, 저음이라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럼 역시 그 방법밖에 없을까.”

    “네. 앤지를 위해 어쩔 수 없어요. 우리 딸이 지금까지처럼 행복하게, 근심 걱정 없이 살기 위해서는 그 방법만이 최선이에요.”

    빗소리 때문에 이젠 어머니의 말조차 웅웅 소리로만 들렸다. 앤지가 살금살금 발끝을 들고 몇 발짝 더 다가갔을 때였다. 아버지 패트릭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하지만 임신 사실은 절대 새어 나가지 않게 철저히 숨겨야 돼. 만에 하나 아이의 존재가 알려졌다간…… 상상만 해도 끔찍해. 카일렉 도련님과 그들은 앤지가 아이를 낳자마자 바로 죽일 테니까. 고 에드워드 님은 내면이 여리고 독하지 못하셨지만 카일렉 도련님은 다를 수 있어.”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 카일렉 도련님은 에드워드 님보다 훨씬 더 무섭고 냉정한 분이니까요. 앤지에 대한 애정은 진심이실 수 있지만 아이에 대해서는…… 원칙대로 하실 것 같아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끔찍한 행위가 의식을 위한 절대적인 교리 절차라고 하니까요.”

    앤지가 소리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우르릉, 천둥이 으르렁대는 소리를 내며 귓전을 사납게 후려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로라가 뭔가 더 말했지만 천둥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앤지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섰다. 부부는 한참 동안 더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로라가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난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친김에 약을 받아 와야겠어요. 오후엔 본격적으로 폭풍이 몰려온다니 지금 얼른 다녀올게요.”

    “길이 미끄러워 위험해. 나랑 같이……”

    “절벽 위 지름길로 가지 않고 올슨 씨 마차를 빌려 갈 테니 걱정 마세요. 앤지를 혼자 둘 순 없으니 당신은 집에 계세요. 그리고 만에 하나 제롬이나 누군가 공작저에서 앤지를 찾아오면…… 지금은 우리 모두 수도로 갈 것처럼 말해 두세요. 그편이 안전할 것 같아요.”

    “그래. 알겠어.”

    앤지는 거기까지 듣고 재빨리 돌아섰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는 순간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며 로라의 기척이 느껴졌다. 앤지는 잠에 깊이 빠진 척,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뱉기를 반복했다.

    “앤지……. 가엾은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널 지킬 거야. 나와 아빠가 지켜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렴. 우리 딸.”

    모친은 혀를 차고 안타깝게 속삭이다 다시 방을 나갔다. 오래지 않아 마차 바퀴 소리가 바깥에서 희미하게 울려 왔다. 아까 말했던 몸살약을 가지러 아랫마을로 떠난 모양이었다.

    앤지는 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 부모님이 나눴던 말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카일렉 도련님과 그들은 앤지가 아이를 낳자마자 바로 죽일 테니까. 고 에드워드 님은 내면이 여리고 독하지 못하셨지만 카일렉 도련님은 다를 수 있어.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 카일렉 도련님은 에드워드 님보다 훨씬 더 무섭고 냉정한 분이니까요. 앤지에 대한 애정은 진심이실 수 있지만 아이에 대해서는…… 원칙대로 하실 것 같아요.

    어찌나 이불을 꼭 말아 쥐고 있었는지 손톱이 빠질 것처럼 아팠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두 손이 어느새 이불을 떠나 배를 감싸 안고 있었다.

    아이를 낳자마자 바로 죽일 거라고? 유산을 시키거나 태어나면 바로 죽인다는 의미일까? 어째서? 레티샤와의 결혼에 방해가 되니까? 그래서……?

    의식이며 교리니, 모친의 마지막 말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앤지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공포감이 뼛속 깊이 파고들어 왔다.

    엄마, 아빠. 난 어떻게 해야 되죠……?

    다행히 부모님은 오롯이 그녀의 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지켜 주고 보호하고자 하는 두 분의 진심이 또렷이 읽혔다. 하긴 자식의 절대적인 편이 아닌 부모가 세상 어디 있겠는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럴 것이다.

    하지만 도련님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혼외자가 될 거라 해도 제 자식을 죽일 거라니. 지금까지 마르틴 실바가 꿈속에서 주장했던 말들, 미카엘이 오전에 들려줬던 섬의 어떤 비밀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이야기였다.

    아예 태어날 필요도 없이 유산을 시키려고 하진 않을까. 그편이 번거롭지 않고 훨씬 깔끔할 테니까.

    앤지는 침대에서 일어나 어머니가 두고 간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울기만 할 생각도 없었다. 늦어도 오후에는 그녀의 탈출이 발각될 것이다. 어쩌면 이미 알고 수색 중일지도 몰랐다. 제롬이나 누군가 금방이라도 그녀를 찾으러 올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될까. 정말 임신이라면 그 사실을 숨기고, 나머지는 원래 계획대로 이끌고 간다면…….

    앤지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두 손이 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두려운 중에도 자꾸 미련이 들었다. 한 줄기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부모님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 최근 며칠간의 도련님은 확실히 무서웠고 제정신이 아니었었다. 하지만 그전까지의 다정함, 그녀에게 세상 뭣보다 따스하고 애틋했던 카이를 잊을 수가 없었다.

    결혼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은 알았다. 그가 수없이 말했으니까. 음지에서 그의 정부로 살 생각이 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시 한번만 서로의 진심을 털어놓고 얘기해 봐야 하지 않을까. 배 속의 아이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수도에 도착하면 다 설명하겠다고 누누이 말했던 것까지. 부모님이 어떤 이유로 그가 아이를 없앨 거라 생각하는지는 모르나, 그녀는 한 번만 더 믿고 싶었다.

    적어도 그의 애정만은 확실했기에.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 *

    로라 리즈델은 폭우를 꿰뚫고 도착한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잠시 후 마주 앉은 던스트 부인에게 앤지의 임신에 대한 것은 쏙 빼놓고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루이스 던스트는 상대방이 선택적으로 들려준 얘기를 진지하게 경청했으나 매우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로라가 좀 더 강하게 설득하자 중년 부인은 결국 못 이기는 척 보관실에서 약병을 꺼내 왔다. 눈빛에는 여전히 고뇌가 어려 있었다.

    “어쩔 수 없군요. 역시 이걸로 앤지와 도련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내는 게 낫겠어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부인.”

    “하지만 부작용의 가능성도 감수하시겠다는 건데……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새로운 사람으로 처음부터 다시 인생을 시작하는 게 더 행복하다면, 현실에서 불행한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앤지를 보호하고 지킬 테니 이젠 아무 문제도 없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굳은 결심을 하셨다면…….”

    “네. 앤지는 우리 친딸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로라가 약병을 품에 꼼꼼히 넣고 일어나려 할 때였다. 던스트 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넌지시 떠보듯 물었다.

    “혹시 앤지가 심적으로 힘들어하는 것 외에 다른 신체적인 증세를 보이지는 않나요?”

    로라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숨길 수 없는 동요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뇨. 그건 왜…….”

    “혹시 몸이 안 좋으면 영양제가 될 만한 다른 약도 같이 주고 싶어서요.”

    “아, 기력이 좀 쇠해진 것 같아서 여기 오기 전 마을 약방에 들러 몸살 약을 받아 왔어요. 아 참,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이 약…… 다른 것과 함께 먹어도 상관은 없겠지요?”

    “몸살 약 때문이라면 상관없습니다. 별개로 작용할 거예요.”

    “그럼 안심이에요.”

    로라는 그녀를 향해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한 뒤에야 방을 나갔다. 그제야 안심하는 초록빛 눈, 하나로 단정히 묶어 올린 금발은 앤지의 용모와 일견 닮아 보였다.

    하긴 그게 당연하겠지. 부모 역할의 헬퍼와 레머디 아이는 일차적으로 외모상 공통점을 기반으로 맺어지니까.

    루이스 던스트는 창 너머로 로라의 뒷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설렁줄을 당겼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 야스민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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