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 (46/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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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쇠가 철컥대며 잠겼던 문이 활짝 열리고 리즈델 부부가 들어섰다.

    “세상에, 갑자기 비가 이리 쏟아지다니. 어머나, 앤지? 미카엘? 여기서 둘이 뭐 하는 거니?”

    “안녕하세요, 리즈델 부인. 어……. 앤지가 어제부로 바느질 일이 끝났거든요. 며칠 만에 부모님부터 뵙고 싶다고 해서 여기로 데려다줬습니다.”

    “그랬구나. 그런데 앤지, 너 괜찮은 거니? 얼굴이 왜 이렇게 수척해? 일이 많이 고됐던 거야?”

    “엄마……!”

    앤지는 모친 로라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긴장이 풀렸는지 눈물이 나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무서운 현실을 깨닫자 부모님의 온기가 절실했다. 아버지 패트릭이 혀를 차며 그녀의 머리를 뒤에서 토닥거렸다.

    “저런. 일이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어서 휴식용 방에 가서 눕거라. 오늘은 비도 오고 일거리도 많지 않으니까 우리밖에 없으니까 괜찮다. 여보, 집에서 수프 챙겨 온 거 어서 데워 줘. 배부터 채우고 쉬게 해야지. 미카엘, 아침 아직이면 자네도 먹고 가게.”

    “말씀은 감사하지만 지금 공작저로 가 봐야겠어요. 오늘 쉬는 날이지만 폭풍이 다시 몰려오고 있으니 일손이 필요할 겁니다. 다음 폭풍 전에 창문을 다 손보겠다고 빼 둔 것들이 있거든요.”

    그는 앤지를 향해 돌아섰다. 미처 말로 담지 못한 메시지가 눈빛에 실려 있었다.

    “앤지. 일단 푹 쉬고…… 나중에 다시 올게.”

    앤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누군가 주사를 놓았던 꿈, 혹은 현실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현관까지 그를 배웅하며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미카엘은 별장을 나오자마자 아까 앤지와 내려왔던 절벽 위로 다시 향했다. 비에 젖어 미끌미끌한 가운데서도 간신히 기어오르는 데 성공한 그는 빠르게 숲을 가로질렀다. 얼마 전 던스트 부인이 야스민과 은밀히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천둥이 칠 때 ‘그것’을 제거하라는 도련님의 명령이 떨어졌어.

    헉, 헉, 미카엘은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지금이 적기라고 그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던스트 부인은 지하 밑바닥, 거대한 짐승의 우리처럼 만들어진 감옥 속 ‘그것’이 제거될 적시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발끝마다 웅덩이가 불길하게 철벅거렸다. 물보라가 기묘한 흉조처럼 땅을 박차고 솟을 듯하다 부질없이 흩어지길 반복했다.

    * * *

    로라와 패트릭은 서로 당혹감의 눈빛을 짧게 교환했다. 앤지는 식탁에 리즈델 부부와 마주 앉아 트리에스테 본토로 다 같이 떠나자고 청하고 있었다. 다른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미카엘에게 말한 대로 도련님이 그녀가 수도에 함께 가길 원한다고만 알렸다.

    “두 분을 여기 두고 갈 순 없잖아요. 헤데스타드 영지에서 지내 보시고 불편하시면 다시 섬으로 돌아오시면 어때요?”

    하지만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모친 로라가 본질을 꿰뚫는 예리한 질문을 던져 왔다.

    “하지만 앤지, 도련님은 거기 도착하는 대로 레티샤와 약혼하실 예정인데 어째서 널 데려가길 원하시는 거니? 숙련된 메이드는 수도에도 넘칠 만큼 많을 테고 네가 아직도 예전처럼 도련님께 책을 읽어 드리거나 그런 것도 아니잖니.”

    부부는 철저히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모든 걸 알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무지를 연기하는 그들의 일념은 오직 한 가지였다.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앤지를 보호하고 저들 곁에 두기 위함이었다.

    “그건…….”

    말문이 막혔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변명을 생각해 두지 않았다. 그래서 재빨리 다른 명분을 쥐어짜 냈다.

    “죄송해요. 실은 도련님은 그냥 가볍게 권유하신 거고 제가 본토에 가고 싶어서요. 미카엘도 간다고 하니까 부럽기도 하고……. 더 넓은 세상에 나가 보고 싶어서 던스트 부인께 청하려고 했어요. 도련님에게 말씀드려 달라고요.”

    부모님의 얼굴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로라가 남편 패트릭을 힐끗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앤지. 아빠와 나는 네가 이 섬에 있었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우리 곁에 말이야.”

    “저도 그러고 싶어요, 엄마. 아빠. 하지만…….”

    아무래도 도련님과 제 관계에 대해 털어놔야 할 것 같았다. 앤지가 결심하고 물잔을 집어 들려 할 때였다. 그 옆의 수프 냄새가 갑자기 역하게 느껴졌다. 감자와 양파를 버터에 볶아 각종 향신료와 치즈를 듬뿍 넣은 수프는 평소 제일 좋아하는 모친의 요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욕지기를 치밀게 하는 원인밖에 되지 않았다.

    “헉……. 윽!”

    그녀가 입을 틀어막고 재빨리 욕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 냈다. 로라가 황급히 따라 들어가 딸의 입가를 닦아 주고 침실까지 부축해 주었다. 패트릭도 곧장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앤지, 왜 그래. 너 몸이 안 좋은 거 아니냐!”

    “아니에요. 속이 안 좋아서…… 잠깐 누워 있으면 괜찮을 거예요.”

    “여보, 여자들만 아픈 증상이 있어요. 앤지는 내가 돌볼 테니까 당신은 나가서 어제 작업 마무리하세요.”

    로라는 남편을 달래서 문을 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창 너머 빗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앤지, 너……”

    로라가 그녀를 침대에 앉히며 창백한 낯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너 혹시 임신한 게 아니니?”

    “네?”

    앤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스스로도 의심한 적이 있기에 차마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아무리 도련님이 조심했다 해도 늘 예외적인 상황이 있다고 들었으니까.

    “임신 맞는 것 같아. 이번 달 월경은 있었니? 응?”

    로라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아무리 봐도 임신 증세였다. 10년 전 레머디의 부모로 배정되어 섬으로 오기 전, 본토의 친척 여자가 지금의 앤지와 똑같은 증상을 보인 적이 있었다. 일반적인 속앓이라면 음식 냄새만으로 구토까지 하진 않는다.

    “엄마. 사실은……”

    앤지가 입술을 깨물고 눈에 힘을 주었다. 울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핏기 없는 이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엄마. 죄송해요. 전에 루이제가 공작저에서 목격했다던 그 일…… 실은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이었어요. 저와 도련님…… 밤마다 몰래 만나고 있었어요.”

    “뭐라고……?”

    로라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미 알고 있는 바였지만 굳이 놀란 척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 임신까지 될 줄은 몰랐기에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경악한 상태였다.

    “도련님을 사랑했어요.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정혼녀가 있었다는 건 꿈에도 몰랐어요. 하지만 저, 임신은 아닐 수 있어요. 도련님이 정말 조심했기 때문에……. 단지 속이 안 좋아서일 수도 있어요, 엄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임신이라니. 카일의 정혼 사실을 알게 되고 파국을 앞둔 지금 그의 아이를 가졌다니! 말도 안 된다.

    로라는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거리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앤지를 닮은 눈에는 염려와 당혹감 외에 다른 감정들도 일렁거리고 있었다.

    “앤지. 일단…… 일단은 한숨 자는 게 좋겠다. 지금 너, 몰골이 말이 아니야. 엄마도 지금은 아빠 일을 거들어야 하니까 푹 자고 다시 얘기하자.”

    그녀는 한숨을 삼키고는 애써 앤지를 다독였다. 딸이 임신이 아닐 거라 믿고 있으니 일단은 안심시키는 게 급선무일 듯했다.

    “도련님이 절 찾아오실 거예요. 제롬이나 다른 누군가를 보낼 수도 있어요. 제가 말도 없이 여기로 바로 왔기 때문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는 사실은 함구했다. 모친은 그녀가 일손을 거들러 공작저에 머문 것으로만 알고 있다. 감금 사실을 알면 더한 충격을 받을 터였다.

    “누구든 절 찾아오면 제 뜻을 말씀드려 주세요. 저도 여기 섬에 남아 있고 싶지만…….”

    카일이 그녀를 정부로 원한다는 것을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다. 딸이 귀족의 정부로, 뒤로는 손가락질 받고 불명예스럽게 사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을 터였다. 어떤 부모는 금전적인 보상 때문에 그러길 바랄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아는 두 사람은 그럴 리가 없었다.

    “저는 엄마 아빠도 같이 가셨으면 좋겠어요. 두 분이 안 가시면 저도 안 가겠지만…… 언제든 다시 섬에 돌아올 수 있다는 전제하에 한 번 가 보면 안 될까요?”

    “그래. 이따 아빠랑 다시 논의해 볼게. 너는 일단 푹 자렴. 이럴 게 아니라 불을 더 지펴야겠다. 방이 냉골이구나. 엄마가 읍내에 가서 몸살약도 받아 올게.”

    로라는 딸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턱 아래까지 바짝 당겨 주었다. 앤지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머리를 가지런히 쓸어 주는 따스한 손길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오래지 않아 앤지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로라는 딸의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 방을 나갔다.

    * * *

    작지만 튼튼한 클리퍼 고속선, 커스틴 호의 선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빈터가르 해협을 벗어나며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하늘은 스산하다 못해 뿌옇게 흐려진 지 오래였다.

    “마르틴. 괜찮나? 뱃멀미는 안 하는 모양일세.”

    선주이자 선장인 조지 커스틴이 마르틴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풍랑이 점점 심해지는데도 여유가 만만해 보였다.

    “네. 아직은 견딜 만합니다. 선장님은 괜찮으시죠?”

    “허허, 산전수전 겪은 나한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세. 자네도 역시 만만치 않군. 시타델 경시청의 촉망받는 경관답게 체력과 지구력이 보통이 아니야. 그럼 좀 더 버텨 보자고. 폭우로 안개를 확 걷어 내 주면 섬도 예상보다 빨리 발견될 걸세.”

    마르틴은 우비를 머리 위까지 뒤집어쓴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보였다. 부디 항해를 안전히 마친 후 모두가 무사히 빈터가르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물론 이 무리한 항해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의 혈육인 앤지를 찾아 무사히 데려갈 수만 있다면.

    앤지, 아니, 앰버. 부디 무사하길 빈다. 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 신의 가호가 너와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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