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 (45/106)
  • #45

    미카엘의 얘기가 끝날 무렵, 시간은 여덟 시가 지나 있었다. 슬슬 부모님이 일하러 올 시간이었다. 앤지는 말을 잃은 채 망연자실 미카엘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미카엘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가 공작저 구석구석에서 제 귀로 엿듣고, 장기간 공작저에서 메이드로 일했던 이모 헤스터에게서 직접 들은 것만은 진실일 터였다. 그게 다 진실이라 해도 미카엘이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 역시 빙산의 일부만 인지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이터니티(eternity)…… 그 약을 먹는 의식이 선대 공작 때부터 실제로 이루어져 왔다고? 도련님까지? 그 의식을 위해 아이들이 레머디…… 치료제로 필요한 것이고?”

    “맞아. 영생과 불멸을 얻기 위한 의식이란 것만 알지, 어떤 식으로 우리를 이용했거나 앞으로 이용할 것인지 거기까진 나도 모르겠어.”

    앤지가 끔찍한 듯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저었다. 영생과 불멸이라니. 그런 것이 실제로 가능할 리 있는지. 그럼 도련님까지 그를 맹신하고 에드워드 님의 대를 이어 의식을 해 왔다는 것일까. 설마.

    “그럼 그건 정말이야? 마약 성분이 든 오피엄 로즈로 만든 차……. 그 최면제를 우리가 물처럼 상용해서 섬에 오기 전의 기억을 잃은 게.”

    “레머디로 지정된 아이들은 확실히 그래. 헬퍼로 일하는 어른들에겐 듣지 않는 것 같은데, 그게 나이 때문인지 어떤 식으로 면역이 되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어. 나처럼 처음부터 섬에서 태어나 자란 경우는 아예 무관하겠지.”

    “그럼 나도…… 나도 원래는 트리에스테나 다른 나라 사람인데 어릴 때 여기로 끌려온 거란 말이야? 그래서 그 노래도…….”

    비바람이 떠나간 바다 위 일몰,

    고요하게 반짝이는 별들,

    봄날 초승달도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사랑스런 그대 눈이 더욱 아름다워라.

    어쩌면 어릴 적 들었던 노래였는지도 모른다. 엄마, 아빠가 오시면 물어봐야 하리라. 하지만 엄마는 분명 그녀를 이 섬에서 낳았다고 하셨었는데. 그럼 일부러 거짓말을 하신 걸까?

    “그럼 우리는 대체 어떤 식으로 레머디…… 치료제나 실험체로 쓰인 걸까? 하지만 난 이렇게 멀쩡한데. 미카엘, 너도 지금 아무렇지도 않잖아. 자수 모임이나 예배당의 친구들도 다…….”

    나탈리아 로헨. 그리고 루시아 페론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그럼 그 아이들이 레머디로 쓰였다가 사라진 걸까? 미카엘은 에드워드 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여러 증세 때문에 몇 명의 아이들을 블랙웰 하이츠로 호출했을 거라 말했다. 하지만 카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했었다.

    “미카엘. 그럼 레머디로 쓸모를 다해 버렸거나 쓸모가 없는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것도 알고 있어?

    미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앤지의 낯이 창백해졌다.

    “예전에 알고 지냈던 아이들이 있었어. 그런데 어느 순간 사라졌고 지금은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해. 네가 말했던 그 기억을 잃는 차- 장미차를 잠깐 끊은 적이 있었어. 기억이 났던 건 그 기간 동안이었고.”

    “너도 면역 체질자였구나. 체질적으로 오피엄 로즈가 듣지 않거나 효력에 제한이 있는……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는 면역자.”

    “미카엘, 너도……?”

    그는 심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처럼 나도 가끔 떠오를 때가 있어. 친하게 지냈던 이웃 여자애가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는데 한참 지난 후에 갑자기 떠오른 거야. 마을의 누구도 그 아이를 기억하지 못했어.”

    “그 애들은 어디 있는 걸까? 만약 섬 안에 있다면 누구도 모를 수가 없을 텐데.”

    순간 앤지의 심장이 서늘해졌다. 최악의 상황이 떠오르자 속이 다시 울렁거릴 것 같았다.

    “설마 죽이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글쎄. 어쩌면 기억만 잃은 채 섬 밖으로 나갔을지도.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 나는 공작가 사람들끼리는 바다 밖으로 나갈 방법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믿거든. 하지만 일부러 막은 거지. 이 섬을 완벽한 고립지로 만들기 위해서.”

    “설마. 일 년에 두세 번 안개가 걷히는 날만 항해가 가능한 게 아니라……?”

    앤지의 뇌리에 마르틴 실바가 떠올랐다. 그는 공작저에서 에드워드 님의 약을 구하러 본토로 항해를 시도했던 8년 전 어느 날, 풍랑에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대륙까지 떠내려가다 구조되었다고 했었다. 미카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안개는 항해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데 그런 척 꾸며 낸 걸 수도 있어. 생각해 봐. 굳이 처음부터 배의 노선을 맞출 필요가 없어. 어느 방향으로든 전진만 하면 결국 안개에서 벗어나게 되어 있잖아. 바깥에서 안개를 뚫고 이 섬에 찾아오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여기서 바다로 나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냐.”

    “하지만 괴상어나 괴어들은? 몇 년 전 엘리엇 호킨스가 안개가 걷힌 밤, 혼자 배를 타고 나갔다가 사지가 처참하게 찢겨서…… 해변가에서 발견됐던 사건이 있었잖아.”

    “그 역시 공작가에서 꾸몄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날 밤 윈드 위에서 누군가 지키고 있다가 그를 잡아 죽이고 괴상어에게 뜯긴 것처럼 시신을 훼손했을지도 몰라.”

    “그런…… 그렇게까지 끔찍한……!”

    “나는 그들이 그 정도로 잔인할 수 있다고 봐. 너 역시, 지난 일 년 가까이 공작저 여기저기서 오갔던 비밀 대화를 엿들었다면 그렇게 믿을 거야, 앤지.”

    “미카엘. 이 모든 사실을 내 부모님도 아실까? 만약 모르고 계신다면…… 엄마, 아빠는 공작가의 헬퍼가 아니라는 거겠지?”

    “그것까진 모르겠어. 하지만 너희 부모님이 널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해.”

    리즈델 부부는 앤지를 진심으로 친딸처럼 사랑하고 있었다. 어느새 친부모처럼 정이 들어 버린 것이겠지. 그래서 그들이 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임을 앤지에게 차마 밝힐 수가 없었다. 언제고 알게 될 일이지만 반드시 지금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미카엘이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더 진중했다.

    “우리 둘 다 수도에 가는 거야. 실은 어제 선장에게 요청했고 허락도 떨어졌어. 그동안 공작저에서 성실히 일한 덕에 제롬이나 던스트 부인이 잘 봐준 것 같아. 그러니까 너도 같이 떠나자, 앤지. 이게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 있어. 아니, 너에겐 마지막 기회일 거야.”

    “뭐? 하지만 수도에 가면 도련님이…… 게다가 엄마, 아빠만 여기 두고 갈 순 없어. 이 섬이 그렇게 위험한 곳이라면 더더욱.”

    “부모님도 동반하는 조건으로 그의 말에 따르는 척하는 거지. 나도 헤스터 이모도 합류시킬 방법이 없을지 고민 중이거든. 그렇게 수도에 도착하고 나서 기회를 틈타 멀리 떠나는 거야. 이 섬 안에서는 숨을 곳이 없어. 하지만 일단 본토에만 가면 세상 어디로든 달아날 수 있잖아. 국경을 넘어 빈터가르나 비첸틴 같은 인근 국가로 갈 수도 있고……”

    앤지의 녹색 눈이 동요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이 섬에 있는 한 카일에게서 달아날 방법은 없었다. 오늘만 해도 그녀가 없어진 걸 알면 바로 잡으러 올 터였다. 만약 모든 게 미카엘의 말대로라면, 공작가는 지금까지의 구세주 가면을 벗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카일에겐 그럴 물리적인 힘도 있었다. 공작저 지하에 수많은 총기와 도구로 가득 찬 무기고가 있다고 들은 적도 있었다. 그녀가 설득되는 걸 느꼈는지 미카엘이 재차 설득했다.

    “그렇게 하자, 앤지. 넌 혼자가 아냐. 내가 있으니까 불안해할 필요 없어.”

    “출항까지 며칠 남았지……?”

    “며칠 미뤄질 수 있어. 아까 선장이 도련님을 데리고 해변가에 간 걸 보면 배에 자잘한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지난밤 폭풍우가 워낙 거셌으니까 마스트가 찢어졌거나…… 그럼 원래 출항일보다 좀 더 늦어지게 될 거야. 그동안 승선 준비를 하자. 나는 헤스터 이모를 준비시킬 테니까 너는 부모님께 함께 떠나자고 말씀드려. 도련님의 명령이라고 하면 두 분도 따르실 거야.”

    “알았어. 그렇게 할게. 네 말대로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앤지는 결심한 듯 입술을 굳게 감쳐물었다. 선택지가 없었다. 어차피 수도에 끌려가게 될 거라면 카일에게 순응하는 척, 그의 경계와 의심이 최대한 허물어진 상태에서 탈출 기회를 엿보는 게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 네가 말해 준 이야기…… 이 섬과 공작가의 비밀, 블랙 매스와 레머디 등 그 모든 얘기는 부모님께 지금은 함구할 생각이야. 두 분 다 그동안 블랙웰가를 전적으로 믿고 따라 오셨어. 충성심도 깊으실 테고. 지금은 충격받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 얘기는 수도에 도착해서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일단은…… 아!”

    미카엘이 무심코 손바닥을 의자 바닥에 짚었다가 확 떼어 냈다. 하필 튀어나온 나무 끝, 뾰족한 부분에 찔린 모양이었다. 그의 검지 안쪽에서 조그만 핏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미카엘! 괜찮아?”

    “아, 살짝 찔린 거야. 이 정도는 금방 멎어.”

    그가 손가락의 상처를 입 안으로 넣고 훅 빨았다. 빗방울처럼 바닥에 떨어진 피를 보는 순간, 앤지의 뇌리에 흐릿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평소처럼 부모님과 함께 사는 농가, 제 침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침대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며 누군가 제 잠옷 팔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희미한 소독약 냄새, 차디찬 감촉에 이어 따끔한 통증이 있었다. 길고 날카로운 침이 살갗을 찔러 들어왔다. 누군가 그녀의 팔에 주사를 놓고 있었다!

    “미카엘, 나 지금까진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꿈이 아닐 수…… 악!”

    그때 후두둑, 빗줄기가 창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천둥이 요란하게 울렸다. 앤지가 펄쩍 뛸 듯 놀라며 귀를 막았다. 동시에 집 바깥에서 수레바퀴 멈추는 소음과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