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 (44/106)
  • #44

    “이번 달…… 아직 월경이 없었어.”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매달 초마다 겪는 달거리 없이 삼 주 가까이 지나 있었다. 예배당에서 레티샤에게 고초를 겪었던 날 전후에 시작했어야 했다.

    어떻게 된 걸까. 혹시…….

    아니, 그건 아냐. 임신일 리 없어. 카이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아무리 그런 적이 없어도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았다. 초경을 시작할 때 마을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에는 완벽한 피임법은 없다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부정하고 싶었다.

    “아냐, 그 책에는 월경이 멈추는 다른 이유들도 쓰여 있었잖아. 극도의 신경쇠약이라든가, 정신적인 충격으로 심신이 피폐해졌을 경우 등등…….”

    카이의 결혼 사실로 큰 충격을 받고 상심했던 게 몸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틀림없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문 쪽에서 소리가 났다. 앤지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밖에서 잠기는 문고리가 철컥거렸다. 열쇠로 여는 소리가 아니라 억지로 열려는 기척이었다. 앤지는 겁에 질려 경직되어 있다가 재빨리 문 앞까지 다가갔다. 육중한 문 너머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여기 누구 있어요?”

    미카엘?

    “누구 없어요? 혹시…… 앤지, 안에 있어?”

    “미카엘!”

    앤지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문고리가 다시 한번 덜걱거렸다.

    “앤지! 역시 여기 갇혀 있었구나! 잠깐만 기다려. 열어 줄게.”

    “미카엘, 어떻게……”

    “도련님과 선장이 동쪽 해변가에 정박된 배를 보러 갔어. 간밤에 폭풍우 때문에 선체에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제롬도 따라간 사이에 열쇠 꾸러미를 잠시 가져왔어. 이 방 자물쇠에 맞는 열쇠가 어디 있을 거야, 잠깐만.”

    수십 개의 열쇠가 꽂혔다가 빠져나가길 한참, 마침내 들어맞는 게 있었다. 육중한 문이 끼긱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앤지, 괜찮아? 얘기는 나중에 하고 어서 나가자! 날이 완전히 밝으면 들켜 버릴 거야.”

    “고마워, 미카엘……!”

    미카엘은 시간을 벌기 위해 문을 다시 걸어 잠그고 앤지를 복도 기둥 뒤에 숨어 있게 했다. 그러고는 열쇠 꾸러미를 제 자리에 돌려놓은 뒤 재빨리 되돌아와 인적 없는 비상용 계단으로 앤지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황망히 별관을 빠져나와 헤네랄리페 정원 안으로 숨어들었다. 앤지가 가쁜 숨을 고르며 미카엘을 돌아보았다.

    “숲을 통해 절벽까지 가면 그 아래 노스쇼어 별장이 있어. 부모님이 오실 테니까 거기라면 안전할 거야.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갈 테니까 넌 빨리 본관으로 돌아가. 나 때문에 네가 곤경에 처하기라도 하면…….”

    “오늘 난 쉬는 날이니까 괜찮아.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줄게.”

    “그건 안 돼! 도련님이 집으로 찾아오면…… 일단 노스쇼어에 가 있는 게 좋겠어.”

    앤지가 불안에 떨자 미카엘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숲으로 이끌었다. 거침없이 옳은 방향으로 가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역시 절벽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절벽 위에 도착했다. 지름길인 아래로 내려서기 직전 앤지가 해변가를 내려다보았다. 3주 전 카일과 나란히 서서 내려다봤던 바다 반딧불이 생각났다. 달보다 더 푸르고 신비로운 빛이 해안선을 따라 조용히 춤췄던 밤, 그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동트기 직전의 바다 역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때의 검푸른 반짝임은 없었다. 앤지는 아래서 받쳐 주려는 미카엘의 손을 잡고 노스쇼어 언덕에 발을 디뎠다. 이른 시간이라 별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는 거실은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앤지, 거실에 앉아서 기다려. 내가 차를 끓여 올 테니까. 리즈델 부인이 오실 때까지 여기 같이 있을게.”

    미카엘은 벽난로에 불부터 지핀 후 담요와 찻주전자, 스콘과 말린 과일 등 먹을거리도 가져왔다. 앤지는 담요를 몸에 두르고 덜덜 떨었지만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하지만 오전 중에 그녀가 달아난 사실을 알고 도련님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 되었다. 그녀도 그녀였지만 미카엘이 염려되었다.

    “미카엘. 도련님이 네가 날 나가게 해 준 걸 알게 되면 어쩌지. 물론 난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 무슨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너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겠지만…….”

    “난 괜찮아, 앤지. 그보다 거기 갇혀 있은 지 며칠이나 됐어?”

    “나흘…… 아니, 닷새……?”

    미카엘은 뭔가 더 말하려다 고개를 떨궜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듯했다. 앤지가 망설이다 운을 뗐다. 그녀를 구해 준 만큼 최소한의 설명은 해 줘야 도리일 터였다.

    “도련님이…… 날 수도에 데려가길 원하셔. 하지만 나는 그러길 원하지 않아.”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미카엘도 알고 있었다. 그의 눈에 슬픈 빛이 어렸다. 얼마 전 앤지에게 고백했을 때 그녀가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털어놓던 순간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대략적인 상황이 파악된 이상 기실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카일렉 도련님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이모 헤스터를 통해 작위를 샀다고는 들었지만 마치 뼛속까지 귀족인 사람처럼 고결하고 오만하면서도 종종 날것의 뭔가가 느껴지곤 했다. 그에게는 단순한 위압감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앤지를 설득하다 여의치 않자 감금까지 감행한 것이리라. 최악의 경우 의식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 강제로 배에 태울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도련님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텐데.”

    “모르겠어. 일단 엄마 아빠가 오시면 다 털어놓을 생각이야. 아무리 이 섬 전체가 도련님의 것이고 우리 모두 공작가를 위해 일한다고는 해도, 부모님까지 알게 되시면 도련님도 강제로 더 어떻게 하실 수는 없지 않을까? 사람들이 블랙웰 가문에 품은 존경과 충성심을 봐서라도 말야.”

    “앤지.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이 컬리넌 섬은 더 이상 세상의 전부가 아냐. 여기가 유일한 세계라면 도련님도 자신의 뜻대로만 할 순 없을 거야. 하지만 이제 바깥세상과의 단절이 끝나고 본토와의 경로도 곧 뚫리게 돼. 만에 하나, 안개 현상이나 바다 괴어들의 도래로 도련님이 널 데려가 다시는 섬에 돌아오지 않으시게 되면…… 상황은 예전으로 돌아가겠지.”

    “예전……?”

    “선장이 던스트 부인과 얘기하는 걸 들었어. 본국 트리에스테 제국은 왕정과 귀족의 말이 곧 법인 군주국이고 전쟁이 끝나서 회복 중인 지금은 체제를 더 강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대. 그렇게 되면 블랙웰 공작님의 말과 의지 자체가 곧 법이라는 뜻이야. 너나 나나…… 이 섬의 모두도 종국에는 공작가에 복종하고 집집마다 계급과 서열이 나뉘어 철저히 통제되는 그런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

    “뭐라고……?”

    앤지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지금의 컬리넌 섬, 모두가 서로를 돕고 아끼는 지금의 분위기가 그렇게 변질된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말도 안 돼. 이 섬의 평화가 그런 식으로 깨진다니…….”

    “앤지. 사실 이 섬은 평화롭지 않아. 평화로운 낙원인 것처럼 보일 뿐. 우린 결국 이 섬을 벗어나야 돼. 그렇지 않으면…….”

    앤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마르틴 실바- 그 역시 꿈에 나타나 똑같은 말을 했었다. 반드시 이 섬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그래서 그가 시키는 대로 기억을 희석시킨다는 장미차의 음용을 중단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왜인지 기껏 되살려 낸 기억은 다시 희미해졌고 마르틴 실바도 더는 꿈에 나타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미카엘, 혹시 마르틴 실바를 알아? 그 사람도 네 꿈에 나왔었니?”

    “마르틴 실바? 그게 누군데?”

    거짓말을 하는 눈이 아니었다. 정말로 모르는 것 같았다. 앤지의 녹안이 희미하게 떨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잠시만.”

    미카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문이 잠긴 걸 확인한 그는 다시 앤지의 맞은편에 앉았다. 비장한 얼굴이었다.

    “앤지. 부모님이 오시기 전에 내 얘기 들어줄 수 있겠어? 많이 놀라겠지만…… 부디 충격이 크지 않기만을 바라.”

    “무슨 이야기?”

    미카엘이 두 손을 맞잡고 뜸을 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앤지. 도련님에 대한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면…… 최대한 빨리 추스르는 게 좋아. 도련님은…… 블랙웰 공작가는 우리에게 은인이 아냐. 전쟁 중 갈 곳 없는 생존자들을 모아서 이 섬에 데려와 돌봐 준 건 목적이 있어서였어. 공작가는…… 그 사람들은 괴물이야.”

    앤지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미카엘을 보는 눈에 어리둥절함과 의혹 모두 담겨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그라도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런 얼굴을 했을 터였다.

    “앤지. 블랙 매스(Black Mass), 검은 미사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어?”

    앤지는 고개를 저었다. 불현듯 기시감이 일었다. 언젠가 마르틴 실바도 꿈에서 똑같은 질문을 한 것 같았다.

    “그게 도대체 뭐야? 설마 악마 숭배 의식 같은 건 아니지? 말도 안 돼.”

    “앤지, 나는 공작저에 온 뒤부터 던스트 부인과 야스민, 고 에드워드 님의 최측근들이 나누는 얘기를 쭉 엿들었어. 이모 헤스터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훨씬 많긴 하지만. 그러니까 날 믿고 내 얘기를 들어 줘.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은 진실이야.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정보도 일부에 불과할 테니까 정확히는 진실의 일부일 거라 생각해. 정말로 중요한 핵심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 수 있어.”

    앤지의 눈에 깊은 불안이 서렸다. 하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엘의 이야기를 경청하겠다는 신호였다. 그는 주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이 섬의 미성년자는 모두 레머디야, 앤지. 너와 나도 포함해서. 그 외는 모두가 공작가를 위한 헬퍼들이야.”

    그는 잠시 망설였다. 레머디인 아이들과 그 부모가 실은 타인이며 눈과 머리색 등을 고려해서 인위적으로 가족으로 지정되었다는 것까지 밝히면 앤지가 크게 상처받을 것이다. 그는 짧은 번민 끝에 그 부분은 일단 함구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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