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 (43/106)
  • #43

    파란 물감을 하늘 가득 풀어 놓은 듯 날이 맑았다. 구름이 솜털처럼 잔잔하게 흘러가는 오후는 평온하다 못해 낙원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나지막한 절벽을 배경으로 우뚝 선 노스쇼어, 수산 작업장으로 쓰이는 별장마저 한 폭의 그림으로 보였다.

    “안녕하세요, 리즈델 부인. 근처에 심부름 온 김에 잠깐 들렀어요.”

    “어서 와, 미카엘. 오랜만이구나. 저번에 앤지 짐을 가져다준 후로는 처음이지?”

    로라는 미카엘을 반갑게 맞았다. 며칠 전 앤지를 방문했던 사실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아도 공작저에 갈 일이 생기면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했단다. 자수 모임에서 우리 앤지를 도와줘서 고마웠어. 안 그래도 엉뚱한 오해를 받아 집에만 틀어박혀 상심해 있었는데…… 공작저에 일이 생겨 거기 가 있으니 다행이야.”

    “네? 앤지가 공작저에요……?”

    미카엘이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노스쇼어에 들린 이유는 사실 앤지의 근황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지, 몸은 좀 어떤지 물으려던 찰나 그녀가 공작저에 있다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몰랐니? 아, 앤지가 별관에만 머물며 일손을 도우느라 본관에는 발길도 못한 모양이구나. 봄맞이로 커튼이며 침구를 바꾸려는데 앤지가 워낙 바느질 솜씨가 좋아서 제롬이 불렀대.”

    “아……. 그렇군요. 제가 요즘은 별관에 갈 일이 없어서 미처 몰랐나 봐요. 그럼 두 분이 앤지 없이 많이 적적하시겠어요.”

    미카엘은 애써 얼버무렸지만 내심 동요하고 있었다. 별관에 일손이 부족하단 얘기는 듣지도 못했다. 게다가 로라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본관과 별관 사이를 수시로 오가고 있어서 앤지를 못 봤을 리도 만무하다.

    어떻게 된 거지. 그럼 앤지는 지금 어디…….

    미카엘은 태연을 가장하며 부부에게 인사하고 별장을 나섰다. 공작저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심란한 마음을 누르지 못했다. 부모님의 농가에도 없고, 공작저에도 없다면 대체 어디 있는 걸까.

    앤지. 지금 어디 있어? 무사한 거야?

    미카엘이 미간을 찡그리며 수평선 너머 하늘을 바라보았다. 밝았던 해가 서서히 밀려나며, 멀리서부터 탁한 덩어리가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비바람을 예고하는 먹구름이었다.

    폭풍우가 돌아오고 있었다.

    * * *

    가문의 유일무이한 장자이자 적법한 에어(heir), 카일렉 로던 블랙웰은 본관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두 손을 깍지 끼고 항해 일지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명징했지만 안색은 수척했다.

    그를 안쪽에서부터 갉아먹는 단 하나의 고뇌, 한 사람이 떠안긴 마음의 고통이 너무 큰 탓이었다.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녹아내릴 듯 천사 같은 미소 뒤로, 강한 의지와 단단한 내면의 소유자임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고집이 세고 단호할 줄은 몰랐다. 그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사랑을 그렇게 단번에 놓아 버릴 수 있는지.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그게 가능한 것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떻게 용납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견디고 살아 낸 모든 이유, 오직 단 하나의 버팀목이 제 곁을 떠나겠다는데. 유일무이한 세계가 그에게서 벗어나 제 영혼을 죽음이나 다름없는 지옥 속에 처박겠다는데 어떻게 묵묵히 보낼 수 있을지.

    앤지가 제 아래서 괴롭게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세상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하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존재를 그토록 짐승처럼 잔혹하게 대하다니 제 역겨움에 토할 것 같았다. 그래서 방문을 열기 직전까지는 다시 설득해 보리라, 늘 결심하곤 했었다.

    하지만 끄덕도 않는 앤지를 마주할 때마다 다시 이성을 잃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오르며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녀를 영원히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무뢰한처럼 그녀를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혼절해 버릴 때까지 마구 밀어붙이고 헤집다 처절하게 후회하고, 다음 날 또다시 짐승처럼 그녀를 범하길 반복했다. 나흘간 한 치 다를 바 없는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진실을 죄다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움이 치밀었다. 만에 하나 역효과가 난다면. 진실을 알게 되면 오히려 더 크게 거부하고 더 멀리 달아나려 애쓸지도 몰랐다.

    카일은 괴로움에 얼굴을 양손에 묻고 있다 서고 사이 설렁줄을 당겼다.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제롬이 비상용 출입문을 통해 들어왔다.

    “도련님, 부르셨습니까.”

    “제롬. 기억을 리셋시키는 약…… 망각제의 제조법을 알고 있지?”

    “도련님. 그건 왜…….”

    제롬이 경악한 듯 저도 모르게 톤을 높였다. 알고 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었다.

    “어떤 특정 구간의 기억만 삭제할 순 없을까? 최면과 병행하면 가능할 듯한데 약이 보관실에 얼마나……”

    차라리 보름 전 그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된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없애 버린다면. 그 상태로 배에 태워 수도에 가서…… 아니. 소용없어. 아무리 수도의 외진 곳에 데려다 놓아도 그의 결혼에 대해 모르게 할 수는 없었다. 눈 가리고 아웅인 격이다.

    카일이 말을 끊자 제롬이 염려스러운 얼굴로 입을 뗐다.

    “제조는 가능하나 지금은 주재료가 되는 오피엄 그래스를 재배할 시기가 아닙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약병이 보관실에 있긴 합니다만……. 아직 부작용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그대로 방치된 상태입니다.”

    “부작용? 어떤?”

    “이전 실험에서 기억 전체가 소실되는 현상이 초래됐습니다. 전에 항해를 시도했다 죽은 엘리엇 호킨스 기억하시지요. 호킨스 부인이 친아들이 아닌데도 엘리엇에게 정이 많이 들었는지 무척 힘들어하다가 급기야 마을 레머디 아이들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던스트 부인과 헬퍼들이 망각제를 주입하게 했었습니다. 그 결과 호킨스 부인은……”

    “얼마나, 어디까지 상실했지?”

    “아들의 존재 하나만 잊게 하려던 최면 효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머릿속이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린 겁니다. 지금은 호킨스 씨와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농사일과 일상은 이어 가고 있지만, 안정을 찾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요.”

    카일은 대꾸 없이 깍지 낀 두 손에 힘만 주었다. 앤지에게도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게 할 순 없었다. 그녀가 어떤 상태가 되든, 설령 호킨스 부인처럼 백지상태가 되어 버린다 해도 제 감정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그가 나서서 앤지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철저히 보호할 터였다.

    세상이 통째로 무너지고 멸망한다 해도 앤지를 향한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앤지가 지난 3년을 잊는 것은 절대 원치 않았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그 시절, 어두운 그의 세계로 걸어 들어와 빛이 되어 주었던 앤지. 그녀가 책장을 펼치고 입술을 열어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침침했던 휘장 안쪽은 빛의 낙원으로 변했다. 그리고 첫 키스와 기다림, 또 다른 기다림의 연속.

    널 지키기 위해, 너의 소중한 피 한 방울조차 아끼기 위해 이 악물고 견뎠던 지난한 치유의 과정. 해가 바뀌고 드디어 하나가 되었던 첫 순간. 매일 밤 서로의 존재를 갈구하며 헤네랄리페 정원으로 향했던 발걸음.

    그때의 세상은 오롯이 그 둘만을 위해 존재했고 온전히 그들만의 시간이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간들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앤지의 뇌리에서 무(無)로 돌아가게 할 순 없었다.

    * * *

    앤지는 무지근한 통증 속에서 눈을 떴다. 전신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사지가 너무도 무거워 이대로 침대 바닥으로 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창 너머로 새날을 알리는 여명이 희부옇게 밝아 왔지만 아무런 의지도, 의욕도 없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시간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흘 밤이 지났으니 감금된 지 어림잡아 닷새째가 된 것 같았다. 그나마 간밤에 무섭도록 몰아치던 폭풍우가 물러간 덕에 창이 흔들려 대던 진동도 멈춰 있었다.

    몸을 가누려고 움직이기 무섭게 욕지기가 확 올라왔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욕실로 향하는 동안에도 위가 뒤집히는 고통에 숨쉬기 어려웠다.

    앤지는 욕실 바닥에 두 손을 짚고 무릎을 굽혔다. 먹은 게 물밖에 없어서 게워 내도 나오는 것은 없었다. 앤지는 몸을 둥글게 말고 앉은 채 흐느꼈다.

    감금된 첫날, 그녀가 잠든 새 벽 한쪽에 걸려 있던 그림이 치워지고 숨겨졌던 벽 속 공간이 드러나 있었다. 벽장처럼 텅 빈 칸에는 도르래가 달려 있어 매 끼니마다 물과 음식을 담은 쟁반이 그를 통해 아래층에서 올라왔다.

    지난 나흘간은 도련님의 압박에 못 이겨 그릇의 절반쯤은 간신히 비워 냈다. 하지만 오늘은 오전부터 속앓이가 너무 심해 음식에 손을 댈 수조차 없었다. 속에서 아예 받지를 않았다.

    힘없이 침대에 몸을 눕혔을 때였다. 언젠가 공작저 본관에서 메이드 중 누군가 같은 증상을 보인 적이 있었다. 며칠 동안 음식도 잘 먹지 못하고 헛구역질만 해 대서 시종장 야스민과 다른 메이드들이 걱정을 표했었다.

    -마리. 괜찮은 거야? 임산부처럼 왜 그래? 임신했을 가능성은 없으니 체한 모양인데. 오늘은 그만 방에 가서 쉬어.

    -그러게 말이에요. 지난주에 달거리도 했으니 임신했을 리는 없지. 마리. 어서 가. 나머지는 내가 정리할게.

    앤지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축축 늘어지기만 하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두 눈은 경악에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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