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 (42/106)
  • #42

    “도련님이 먼저 절 버리시는 거잖아요……! 그것도 오래전부터 절 버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앤지가 바들바들 떨면서도 말을 이었다. 울먹임 속에서도 악에 받친 속삭임이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도련님을 이해할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정치적인 목적에서 어쩔 수 없다면…… 죽어도 도련님이 그 혼인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면, 기다리겠다고 말하려 했어요. 모든 게 끝나고 다시 혼자의 몸으로 떳떳하게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얼마가 걸려도 좋으니까.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기어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다른 여자와 결혼 서약을 하고 한 침대에 들고, 아이까지 낳을 결심인 남자에게…… 내가 어떻게 기다리겠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앤지. 아이 또한 내가 원해서가 아냐. 레티샤가 공작 부인으로서 아이를 낳는 즉시, 나는 자유가 되는 거라고. 그 아이가 죽든 살든, 앞으로 어떻게 되든 전혀 관심 없어! 만약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평생토록 그 아이를 보지 않겠어. 그리고 너와 곧바로…….”

    “아뇨, 도련님. 그건 옳지 않아요.”

    다른 쪽 뺨도 빠르게 젖어 들었다. 그의 손이 턱을 놓아주고 가녀린 어깨를 짚었다.

    “부모에게서 사랑받아야 할 아이를…… 외면받게 만들 순 없어요. 내 존재 자체가 걸림돌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빌어먹을, 앤지!”

    그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아주 짧은 노호를 뱉어 낸 직후, 카일은 잔뜩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자 애썼다. 어깨가 으스러질 것처럼 아파 왔다. 두 사람의 눈가 모두 붉게 젖어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를 찢어 버릴 듯 형형하게 빛나던 눈이 냉엄해지며 가슴을 들썩여 대던 호흡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녀의 양어깨를 짚은 손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이대로 끝이라고……? 너와 네가?”

    “네. 제가 아니라 도련님이 정하신 끝이에요.”

    “날 사랑하지 않아……?”

    그가 이를 악물고 신음처럼 물었다. 창자가 비틀려 끊어지기 직전의 음색 같았다. 신이 빚은 조각처럼 매끄러운 이마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 그럼 보내 줄게. 내가 믿을 수 있게, 최대한 잘.”

    “당신을 사랑해요.”

    잠깐의 망설임도 없었다. 앤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너무도 차분해서 마치 장엄한 시라도 낭송하는 것 같았다.

    “카일 님을 사랑해요. 모르시겠어요……?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이렇게 괴로운 것을.”

    “앤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아니, 내일, 새로운 날이 밝은 후로는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카일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저를 향한 사랑이 오늘까지만 지속될 거란 다짐, 그 차분한 선언에 말을 잃은 것 같았다. 사형 선고가 내려진 기분이 이럴까.

    수초가 흘렀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웃었다. 그린 듯 아름답지만 기묘한 미소였다. 그 섬뜩함의 의미를 알아차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도련……”

    머리채가 한 움큼 잡히며 몸이 순식간에 뒤로 쓰러졌다. 푹신한 침대가 크게 출렁이며 건장한 그림자가 곧바로 앤지의 몸 위를 덮어 왔다. 옷이 찢겨 나가는 소리에 앤지가 숨을 헐떡였다.

    예전의 다정했던 손길은 괴물의 난폭한 손톱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던 열기는 숨통을 옥죄는 화염으로 변해 갔다. 이마 위에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 찌를 듯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가 앤지의 눈 속 깊이 박혀 왔다.

    “아니, 앤지. 절대 그렇게는 안 돼.”

    옷자락이 요란하게 버석거렸다. 뜨거운 열기가 강렬히 마찰하는 아픔에 앤지가 소리를 질렀다. 쾌감과는 다른 비명이었다.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던 두 눈이 고통을 머금고 빠르게 젖어 갔다.

    “넌 내일도, 다음 날도, 계속, 날 사랑해야 할 거야. 언제까지나……!”

    짐승의 것 같은 으르렁거림이 밭은 숨과 하나로 얽혀 들었다. 고적하던 방 안이 삽시간에 아비규환처럼 변했다. 침대 헤드가 부서질 듯 견고한 벽을 내리쳤다. 저택 전체가 거대한 괴수의 하울링을 뱉어 내는 것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의 살갗에 격렬한 전율이 일었다. 그녀의 몸을 이루는 모든 돌기와 점막이 매 순간, 극한의 감각까지 몰아쳤다가 마비되길 반복하고 있었다.

    앤지는 가쁜 숨결과 둔중하게 이어지는 흔들림 속에서 결국 정신을 놓아 버렸다. 가뜩이나 허약해진 몸은 그의 광기를 견뎌 내질 못했다.

    * * *

    카일은 나흘간 자정마다 찾아왔다. 식사는 제대로 했는지 미리 보고를 받고 왔을 텐데도 그에 대해 힐문하고, 아직도 마음이 바뀌지 않았는지 캐묻고 설득하다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끝났다.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반대로 악을 쓰는 건 늘 앤지 쪽이었다. 그가 그녀를 침대에 쓰러뜨리고 거칠게 취하는 것으로 분노를 터트릴 때마다, 온 힘을 다해 저항하고 사정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럴 때마다 도련님은 다른 인격체가 된 것 같았다. 이성이 광기에 온통 잠식되어 버린 듯, 완전히 미쳐 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그와의 결별을 철회하라 강요했고, 거부하면 할수록 그녀가 제 것임을 주장하려는 듯했다. 비틀린 소유욕의 발로였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옷이 너덜너덜 찢기고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지난밤의 흔적이 시트 여기저기 남아 있었고, 벌거벗은 제 몸은 온통 붉은 자국투성이였다. 밤새 두드려 맞은 것처럼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가끔은 그의 애원을 들은 것도 같았다. 혼절 직전까지 밀어붙이다 의식이 흐려지기 직전, 그녀를 끌어안고 빌었다.

    -앤지. 제발…… 이러지 마. 제발. 나는 너밖에 없어…….

    잠결에 따뜻한 손길을 느낀 적도 있었다. 축 늘어진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과 손바닥, 손가락 마디마다 입을 맞추고 뭐라고 속삭였다. 목에 얼굴을 묻을 때는 제 목덜미며 뺨이 눈물로 젖어 들 때도 있었다. 그녀의 것이 아닌 눈물이 얼굴과 목, 여기저기 빗방울처럼 떨어지곤 했다.

    -앤지, 사랑해.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마.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네가 나를…….

    하지만 침대 위에서 뒤엉키기 전에는 무섭도록 차가운 태도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전신을 얼려 버릴 것처럼 싸늘하고 무자비한 눈빛에 앤지는 흡사 죄인이 된 것 같았다. 부정을 저지른 여자를 취조하듯 그의 압박이 가혹해지면 가혹해질수록, 그녀 또한 더 차가운 시선으로 응수했다.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제 마음이 비참했다. 그래서 더 마음을 닫은 것처럼 굴었고 그에 카일도 더 격한 반응을 보였다. 화가 나면 날수록 차분하게 가라앉는 외양과는 달리, 눈빛은 더 험악해졌고 침대 위에서는 미쳐 버린 짐승처럼 날뛰었다.

    지리멸렬한 그 어둠 속 반복에 앤지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차라리 그의 말에 따르는 척, 저택을 나와서 멀리 달아날까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섬 안에선 도주라는 표현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먼 구역까지 도망가서 숨어도 며칠 안에 잡힐 건 뻔했다.

    엄마…… 아빠. 지금쯤 걱정하고 계시진 않겠지.

    최근 공작저는 다가올 봄을 맞아 정원 재정비와 수리 등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다. 인력이 다시 필요하게 되어서 저택으로 급히 불렀다는 등 제롬이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 자신의 부재를 두 분에게 설명했을 터였다. 적어도 그 하나만은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여기 갇혀 있어야 할까. 고작 며칠 지났을 뿐인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배에 강제로 태워지게 되리라. 그럼 부모님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수도로 끌려가게 될 터였다.

    제발 도련님이 마음을 바꿔 그녀를 풀어 주길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처음엔 카일에게도 열심히 빌고 애원했지만 더 이상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가 애원하면 애원할수록 그의 분노가 더 커지는 까닭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수도까지 같이 가서 거기서 달아나 버릴까. 하지만 본토에는 연고자도, 아무것도 없었다. 섬 밖의 세상은 그녀에게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었다. 달아난다 해도 빈털터리 맨몸으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머릿속이 백짓장 같았다.

    마르틴 실바…….

    한동안 꿈에 나타나지 않았던 남자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섬에서 하루빨리 탈출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고도 했었지.

    장미차를 끊었는데도 그는 왜 더 이상 꿈에 나타나지 않는 걸까? 게다가 그 노래도 어느덧 의식 속에서 희미해져 있었다.

    비바람이 떠나간 바다 위 일몰…….

    그다음 구절이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존재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 있던 자수 모임의 여자애들 역시.

    이름이 뭐였지? 빅토리아? 아냐. 나탈…… 나탈리? 다른 한 명은 아예 가물가물했다. 앤지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한 가지 사실만은 명징하게 다가와 심장을 아프도록 쥐어짜고 있었다.

    카일은 달라졌지만 그녀의 감정은 변하지를 않았다. 그가 아무리 제 몸을 함부로 다루고 사납게 뒤흔들어도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 모든 분노와 패악이 결국 그녀를 변함없이 원한다는 전제하에서 비롯된 탓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미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형식적이며 한시적인 결혼이라 주장한들 절대 그럴 수는 없다. 그는 분명히 레티샤와 2세를 가질 거라 말했다. 그게 어떻게 형식적인 혼인이 될 수 있겠는가.

    부부로 서약을 맺고 생겨난 아이가, 어떻게 두 사람 모두에게 의미가 없을 수 있을까.

    0